•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2. 5위체제의 확립과 중앙군제
  • 5) 수도방위의 실제
  • (3) 시위·첩고·첩종

(3) 시위·첩고·첩종

 이 시위는 좁은 의미의 侍立을 뜻한다. 가령 왕이 군의 習陣을 친히 보기 위한 의식인 대열이라던가, 강무 혹은 순회여행인 순행, 왕이 친히 행하는 수렵을 말하는 打圍 및 왕이 친히 행하는 국가 제사 등의 각종 행사가 있을 때에 병조가 왕이 명령하는 대로 시위조건을 만들어 공문을 담당 군문에 보내면 그 시위조건에 따라 시위하였다. 이는 왕세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왕이 친히 제사를 행할 때에는 旗鼓를 장비한 시위군이 제단 밖에 머물러 시위하였고 묘나 능에 제사지낼 때는 문 밖에 머물러 시위하였다. 만약 크고 작은 국가정사가 있어 국왕에게 축하를 드리는 朝賀가 있을 때라든가 연회가 있을 때에는 위장이 그 군사를 이끌고 궁정에 정렬 시위하게 했으며 병조와 도총부 이하의 관직으로서 군무를 띤 자 및 겸사복은 왕의 가까이서 시립하고 내금위는 별시위와 함께 궁궐 계단 위에 정렬하여 왕권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보통 고관들이 왕을 만나 상주하는 常參이 있을 때에는 입직하고 있던 장사들로 하여금 시위하게 하였는데 입직 장사는 궁정에 들어오는 대로 각각 그 방향을 점하도록 하였다. 즉 東所로 들어온 자는 동쪽에서 방향을 점하여 시위하도록 한 따위다.

 그리고 대내에 입직한 군사들을 집합시킬 때에는 큰 북을 계속하여 두드렸는데 이것을 疊鼓라 하였다. 이는 평시에 있어서 비상에 대처하는 훈련이라든가 혹은 실제로 비상에 처하여 왕권을 급속히 보호하고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조치로 생각된다. 궁중에 있는 큰 북이 계속해서 울리면 각 문을 지키는 자 이외의 입직한 모든 위의 군사는 勤政殿 뜰에 모여서 각각 그 방향을 점하고 정렬하였는데 병조는 思政殿 남문의 좌협문인 東閤門 밖에 시립하고, 도총부가 그 다음, 그리고 상·대호군, 호군이 이에 따랐으며 금군인 내금위는 우협문인 西閤門 밖에서 시위하였고 겸사복은 왕의 바로 앞에서 시위하였다. 이는 대궐 안에서의 뜻밖에 군사동원으로 시위하는 것이지마는 왕이 만약에 군사들을 대열하고자 할 때는 궁중 누마루에 걸려 있던 대종을 계속해서 울려 신호로 삼았는데 이를 疊鐘이라 하였다. 만약 대종이 계속해서 울리면 입직하고 있던 모든 군사가 앞에서 본 첩고의 예에 의하여 모두 모이고 왕이 만약 근정전이나 다른 문에 나오면 그 나오는 곳을 따라서 그 뜰에 모여 왕을 호위·시립하였다. 그리고 5위 소속의 군사들은 光化門 앞길부터 종로, 흥인문까지 열을 지어 시립하고 위장 이하가 명을 받들어 영솔하였다. 이 정렬 시위를 구체적으로 보면 의흥위의 좌부는 광화문 앞에 서고, 후부가 그 다음, 중부가 그 다음, 전부가 그 다음, 우부가 그 다음으로 열립했으며 용양위·호분위·충좌위·충무위 등이 그 뒤에 열립하였는데 각 부의 차례는 의흥위의 예를 따랐다. 또 이 때는 군사뿐만 아니라 백관들도 그 소속 관청을 지키는 한 사람의 관리 이외는 모두 갑주를 입고 군기를 준비하여 각각 궁문 옆의 조우 장소인 朝房에 모여서 명령을 기다렸다. 다만 국가의 기초가 되는 종묘와 사직의 관리들은 모두 그 소속관청을 그대로 지키게 했으며 외국 사신들이 머물고 있는 객관의 인원은 객관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궐 내의 모든 관청과 도성 밖에 있는 여러 관청도 각각 소속 관청에서 명을 기다리게 했으며 미처 대궐문을 나가지 못한 자는 조방에 모이고 대궐문을 들어오지 못한 자는 문 밖에 모이게 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을 직접 모시고 있는 시신들은 경복궁 동문인 建春門과 서문인 迎秋門에 모여서 명을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출직한 병조나 도총부·위장·부장·선전관·사복·내금위 및 훈련원·군기시의 관리들은 본청을 지키는 자 외는 모두 광화문 앞에 모여서 명을 기다리게 했다. 다만 군기시는 두 사람이 명을 기다리고 나머지 사람은 본청과 직숙소를 지켜야 했다. 이는 군기를 관장하는 곳이기 때문에 대열이 있다고 해서 그 경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궁성 4문 및 도성 여러 문은 모두 표신을 대조한 후에야 출입할 수 있었으며 왕의 가마가 문을 나서면 표신의 대조를 풀었다.284)≪經國大典≫권 4, 兵典 侍衛·疊鼓·疊鐘. 이러한 왕의 거동을 중심한 철저한 경비와 시위는 왕의 위용을 갖추는 데도 의의가 있겠으나 국권과 왕권이 사실상 왕권으로 귀일되었던 당시 사회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금군과 5위군은 왕권 보호를 중심한 입직·행순·시위 등의 기능을 다하기 위하여 왕조적인 법의 테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는 곧 왕권의 소재와 연결된 수도권의 방위와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로서는 이러한 금군과 5위군의 직무 수행의 기능이 수도방위제도와 직결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제도적인 조치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5軍營이 차례로 설치됨으로써 경비 내지는 방위제도가 더욱 확연하게 수도를 중심으로 정비되어 간 것이었다. 그리고 중앙군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 매월 2일과 16일에는 敎閱과 습진에 참가했으며 2월과 9월의 20일에는 서울 교외에서 병기 점검을 받아야 했고, 번상 군사들은 때로 도총부 당상관에 의하여 騎·駄馬의 점열을 받아야 했다. 또한 평소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출직하면 助番巡綽 이외는 반드시 3일 안의 하루는 훈련원에 나아가 습진이나 활쏘기 등을 연습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여기에서도 소관 부장 및 훈련원 당상관에 의하여 점검 시험되었으며 승진에도 도움을 받게 하여 사기를 높이는 등, 항상 수도를 지키는 중앙군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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