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3. 진관체제의 확립과 지방군제
  • 1) 진관체제의 성립

1) 진관체제의 성립

 鎭管體制의 성립은 동·서북면의 軍翼道체제가 전국화하면서 성립되었다. 종래까지는 연해안 지역에만 鎭을 설치한 방어조직은 내지 주현의 방어가 소홀한 난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세조 원년(1455) 내륙지방에 거진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분속시키는 조처가 취해졌다.285)≪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9월 계미. 그리하여 전국의 각도를 다시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는 중·좌·우의 3익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가령 경기도의 예를 들어보면 광주·양주·부평 등 3개의 巨鎭과 교동·강화·개성부의 3개 獨鎭으로 이루어지며 거진의 경우 부근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편입시켜 하나의 군사단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286) 위와 같음.

 이 때의 군익도체제가 전국화하면서 몇 가지 규정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첫째, 각 익의 지휘관은 수령이 겸대하는데 중익 수령의 경우 某道某鎭中翼兵馬節制使, 좌·우익 수령의 경우는 某道某鎭左右翼兵馬團練使·副使·判官으로 지칭한다는 것이다.

 둘째, 甲士·別侍衛·銃筒衛·近仗·攝六十·防牌·別軍·侍衛諸營諸鎭諸浦軍士를 비롯한 모든 군사는 익에 속하며 번상·습진·취재도 중익을 중심으로 각 익에서 관할하고 군적은 중익과 도절제사·병조에 비치한다.

 셋째, 군령계통은 도절제사→중익절제사→제익의 계통을 이룬다.

 결국 국방에 대처하는 군사단위로서의 군익도의 지위를 뚜렷하게 하는 조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개편의 이유는 남방지역에 대한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지방군화된 중앙군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었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을 북방의 군익체제에서 도입했던 것이다.

 이같은 지방군제의 개편은 전국의 모든 지역을 군사조직에 포함하여 군사지대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전국의 지방 군사조직이 비로소 일원화되어 남방의 여러 지역과 북방의 요해처를 동일체계 속에 포함시키게 된 것이다.

 세조 원년(1455)의 획기적인 대개혁에 의하여 전국화되었던 군익도체제는 세조 3년 10월에 진관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 주요한 지역을 중심으로 중·좌·우익의 편성을 갖던 종래의 체제는 주요한 지역을 거진으로 하여 나머지 주변지역의 제진이 그 휘하에 소속되도록 한 것이었다.287)≪世祖實錄≫권 9, 세조 3년 10월 경술. 가령 경기도의 예에서 보면 종래 3개 도와 3개 독진으로 편성되었던 것을 수원·광 주·양주·강화·개성 등 5개의 진으로 나누어 그 주위의 고을들을 합속시키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앞서의 3개 도로 나누었던 도 대신 진이 란 명칭이 나타나는 점이다. 도에는 여러 의미가 있고 고려 이래 지방군의 파악단위로 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것이며 북방의 군익체제 정비에 따라 역시 도를 단위로 삼았던 것인데 이 때에 비로소 진으로 바뀐 것이다. 행정 구역상의 도와 혼동되는 복잡성을 피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종래 지방군 사상의 요해지였던 진의 계열과 연결시켜서 요새지 군사기지로서의 거점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종래 중·좌·우익의 체제가 지양되고 거진을 중심으로 제진이 이에 속하도록 한 것은 제진 각자에게 독자성을 부여하고 일원적 군사체제를 더욱 분명히 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지휘계통에 있어서도 군익도체제 하에서는 中翼兵馬節制使에 명령권이 있다고 규정했지만 중익에 속한 단위지역이 여럿 있는 경우도 많아 혼란이 있었으므로 거진을 따로 떼내어 다른 제진과의 상하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의 개혁은 종래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존치되었던 독진제를 지양하고 전지역을 망라하는 진관체제로 변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진관체제의 운용과 기능은 세조 4년에 재조정되었다.288)≪世祖實錄≫권 11, 세조 4년 2월 을묘. 중익의 기능이 거진으로 옮아갔으며 수령이 겸대하는 각 진의 병마 명칭에서도 중익 또는 좌·우익이란 부분이 없어지고 갑사 등 모든 군사가 거주지에서 군적에 등록되고 그에 대한 방대한 관할권이 거진에 귀속되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진관체제로의 개편은 전국을 군사지대화하는 조직체로 묶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아직도 지방에는 시위패(군) 혹은 영진군·정군 등의 다원화된 군사의 명칭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하여 세조 5년 북방의 정군과 남방의 시위패 등을 正兵으로 합칭하고289)≪世祖實錄≫권 18, 세조 5년 11월 기묘. 세조 10년 영진군을 정병에 합속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290)≪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9월 경오.

 종래 남방 여러 도의 경우 각 관별로 시위군이 抄定되어 중앙에 번상하고, 또 영진군에 초정되어 각 도의 병영이나 연해지역의 진에 부방하던 체제와는 달리 각 관의 정병은 평시에 거주하는 지역의 방위력을 이루다가 번차에 따라 상경하였고, 요해지에도 상주하는 留防正兵 수를 배당했던 것이다. 영진 내의 부방이 요해지에의 유방으로 되었을 뿐이지만 시위패와 영진군을 함께 정병으로 파악하게 된 것은, 전국의 각 지역을 진관편성으로 묶어서 균일한 국방체제를 이룩한 것에 상응하는 국방병력의 일원화 조치였다.291) 閔賢九, 앞의 책, 247∼251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