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4. 군령·군정기관의 정비
  • 2) 군정기관의 정비
  • (1) 건국 초기의 군정기관

(1) 건국 초기의 군정기관

 조선이 건국되면서 관제개혁을 단행하였을 당시에 있어서의 군정기관으로서 병조가 담당하는 것은 武選·兵籍·郵驛이라고 규정하고 있다.317)≪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그러나 건국 초기에는 고려 이래의 都評議使司의 권한이 컸고 문무관의 인사권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尙瑞司에 있었으며 이는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태조 2년(1393)에 최고의 군령기관으로 만들어진 의흥삼군부가 군정을 포함하는 군무 전반에 걸쳐 방대한 기능을 갖는 중추적 관서로 되자 상대적으로 병조의 군정상의 지위는 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태조로부터 태종 초에 이르기까지 병조가 관여하고 있었던 군정사항은 다음의 몇 가지에 불과하였다.

 첫째, 무관의 인사관계에 병조는 소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즉 태조 4년에 10사의 장군과 5員·10將에 대한 자격심사나 충당에 의흥삼군부와 함께 참여하도록 조치되고 있는 것이다.318)≪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2월 병인. 그러나 의흥삼군부와 함께 간여하는 경우 주도권은 병조가 아니라 의흥삼군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사실상의 인사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조와 더불어 고려 초의 「政案之法」을 시행하도록 요청한 일도 있었지마는 상서사에 의한 인사행정이 행해진 상황에 변혁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둘째, 병조는 무과를 주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건국 직후에 공포된 「入官補吏之法」에서 무과는 병조가 관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무과 출신과는 訓練觀에 보내어 병서 및 무예를 시험하고 3등으로 구분하여 서용하도록 되어 있으나 무과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그리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319)≪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5월 임자.

 병조가 이와 같이 군정상 주요한 위치에 서지 못했던 점은 사병이 혁파되지 않아서 그 지휘계통이 사적 영속관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는 사실과도 깊은 관계를 갖는다.

 병조의 관장사항 가운데 하나인 군적 관리도 각 장수가 소관 군사의 군적을 장악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건국 초기의 병조의 군정기능은 거의 유명 무실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군사정책은 거의 모두가 의흥삼군부에 의하여 계획되고 집행되었다. 태조 2년 5월 의흥삼군부가 설치되고 곧 정도전이 판사로 취임한 이후, 10위의 개칭과 3군 분속 등 대개혁을 제시한 태조 3년 2월 상소를 비롯한 많은 개혁안이 의흥삼군부 또는 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의 명의로 제기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건의사항은 채택되고 있다.320)≪太祖實錄≫권 5, 태조 3년 2월 을해. 그러므로 당시의 의흥삼군부는 최고의 군령기관인 동시에 최고의 군사정책기관의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흥삼군부는 무관 양성을 위한 교육업무도 관장하였다. 태조 6년 정월에 설치된 의흥삼군부 舍人所는 고대의 제도를 본받아 의관 자제들의 무예를 교습시킨다는 곳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활동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건국 초의 侍衛牌는 사적 영속관계에 놓여 있었고 그 군적은 절제사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부분적인 파악은 역시 의총삼군부의 소관이었던 것 같다.

 국방정책을 마련하는 최고의 기관이었고 군적의 관리에 관여하며 무관 양성을 위한 교육을 주관하도록 되어 있었던 의흥삼군부는 강력한 군정상의 최고기관이었고, 문서상의 군정기능을 가지고 있던 병조는 사병혁파 이전까지는 그 기능이 거의 허구에 가까웠던 것이다. 군정기관이 정비되지 않은 건국 초기에는 군정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관서로서 병조·의흥삼군부 이외에 도 중추원과 훈련관·군자시 등이 있었다.

 중추원은 고려시대의 것을 제도상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주로 군기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군사관계는 의흥삼군부의 존재 때문에 허구화되고 왕명출납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무예훈련과 兵書·戰陣의 교습을 책임지도록 되어 있는 훈련관은 상당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태조 3년 정월에는 中軍軍候所를 흡수하여 훈련과 교습을 주관하는 기관으로서의 위치를 확실히 하였다.321)≪太祖實錄≫권 5, 태조 3년 정월 임자. 특히 전법훈련이 강화됨에 따라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훈련관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무과의 주관이다. 태조 4년 4월에 최초의 무과 都試를 통해 33명을 선발하였는데 이는 훈련관에서 맡았던 것으로 여겨진다.322)≪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권 7, 태조 4년 4월 신묘. 훈련관은 使(정3품)를 장관으로 하고 관원 약간명을 갖고 있었는데 겸관들로서 채워졌던 것 같다.

 이 밖에 병기를 취급하는 군기감이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또 군자감은 軍旅糧餉을 맡은 군수지원 관서였다.323)≪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이들 두 기관은 判事(정3품)를 장관으로 하고 있었다. 또 사복시도 있어서 輿馬·廐牧을 맡았던 것인데 이것도 역시 군정부문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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