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Ⅳ. 군사조직
  • 5. 군비의 확충
  • 1) 화기의 발달과 성능
  • (1) 화기 제조의 발달

(1) 화기 제조의 발달

 고려 말의 공민왕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던 화약은 공민왕 말기에 이르면 화약병가의 제조는 물론, 焰縮·硫黃 등의 원료를 공급받아 화약을 제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崔茂宣에 의하여 火㷁都監이 설치되었다.33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火㷁都監. 이 화통도감의 설치로 화약을 원료로 하는 大將軍砲·二將軍砲 등 거의 20종에 달하는 화기가 제조되어 여말 왜구를 격퇴하는 데 동원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가 사실상 집권층에 뛰어들었던 창왕 원년(1389)에 趙浚의 상소에 의하여 화통도감이 폐지되었다.334)≪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 이는 한마디로 당시 정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던 이성계 일파로서는 고도의 성능을 가진 화기의 발달은 언제 갑자기 자파세력을 뒤엎을지 모르는 결정적 요소로서 경계와 억제의 대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335) 許善道,≪韓國火器發達史≫상 (陸軍士官學校 軍事博物館, 1969). 따라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한 뒤에도 화기제조 정책에는 소극적인 면을 보였다.

 그러나 비상수단에 의하여 왕권을 장악했던 태종대에 이르면 화기제조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하였다. 즉 태종 원년(1401) 윤3월에 최무선의 아들 崔海山을 등용하여 화기제조를 본격화하였다.336)≪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윤3월 경인. 최해산은 權近의 건의에 의하여 군기주부로 발탁되어 태종의 적극적인 뒷받침과 아버지 무선이 전해준 비법을 중심으로 연구에 전심하였다. 이러한 최해산 등의 노력으로 화약의 성능이 더욱 향상되고 연구의 진전에 따라 태종 4년에는 군기감별군이 편성되고 화통군이 증원되었다. 태종 7년에는 화약의 성능이 두 배로 증가하였고 火藥匠 33명이 군기감에서 화약의 제조를 계속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태종 9년 정월에는 화차가 李韜·崔海山 등에 의하여 제작되었는데 그것은 鐵翎箭 수십 개씩을 장탄한 銅㷁 등촐 수레에 싣고 달리면서 화약으로서 발사하는 것이었다.337)≪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0월 병진. 이렇게 화기와 화약제조가 활발해지자 그 해에 紫霞門 안에 무기고를 신축하고 이어 軍器別監·本監이 지어졌으며, 태종 17년에는 火藥監造廳이 낙성되었다. 이와 같이 화기의 발달은 태종 10년에서 15년에 이르는 사이에는 화기의 제조와 그 발사시험이 거의 매년 거듭되어 드디어 화포를 종래의 방어용 및 해전용 화기에서 성을 공격하는 것으로까지 발전시켰다.338) 許善道, 앞의 책. 그 사이에 군기감에서 제조된 화통은 1만 자루가 넘었으며 그것들은 100여 개소의 성과 160여 척의 병선에 배치되었다.339)≪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7월 신해.

 뿐만 아니라 태종 13년(1413) 경에는 크기가 다른 세 가지의 碗口 20門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돌로 만든 탄환을 발사하는 것으로 명나라 초에 만들어진 盞口砲를 본때서 만든 화포였다. 이 때에 만들어진 완구는 사정거리 150보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나중에 震天雷가 사용됨으로써 攻城用으로 제일 좋은 화기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태종대는 최해산의 중용, 藥匠에 대한 賞賜, 火漏試放의 성행 등 왕의 적극적인 권장과 그 뜻을 받들어 父傳의 비법을 향상시키기 위한 최해산의 적극적인 노력과 공로로 화기 발달에 의의가 큰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의 화기는 거대하고 육중하여 사용에 극히 불편하면서도 화약의 소비량이 컸고, 당시 명에서 성행하였던 一發多箭法은 끝내 터득하지 못하였다. 태종 당시에 사용된 화기의 구체적인 이름으로는 火㷁, 火車, 火砲, 碗口(大·中·小), 蒺藜砲, 地·玄字砲 등을 들 수 있다. 발사물로는 鐵翎箭과 아울러 탄환류(石彈子)의 출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사정거리는 2∼30보 내지 500보 정도이고 주조재료는 오로지 동·철이었던 것 같다.340) 許善道, 앞의 책.

 화포의 주조기술과 화약의 제조기술이 향상되면서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벗어나려는 독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세종이 즉위하면서는 염초생산의 확대와 화약성능의 비약적인 향상을 가져와 세종 5년(1423) 경부터는 염초생산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341)≪世宗實錄≫권 19, 세종 5년 정월 신묘. 특히 염초토는 염초 煮取에 가장 중요한 재료로서 화약제조에 필요한 유황과 목탄 등과 함께 3대 요소인 것이다.

 염초제조는 전국 각 도에 할당하는 常貢으로 되었지마는 염초의 공납으로 화약제조의 비법이 보급되면 왜인에게 전습될까 우려하여 국가에서 철저히 규제하기로 하였다. 염초제조의 활성화는 그만큼 화기기술의 개량발달을 가져왔다. 화포 개량의 노력은 새로운 발명을 가져오게 했다. 세종 초기부터 완구의 개략, 화통 이름의 변경, 發火의 출현, 信砲의 사용, 소화포의 출현 및 鐵彈子의 사용 등이 나타난다.342)≪世宗實錄≫권 27, 세종 7년 정월 계사.

 그리하여 세종 12년 6월에는 火砲放射軍 즉 포병을 전국적으로 배치하였고, 그 제도는 더욱 발전하여 세종 16년 정월에는 화포 준비인과 발사인을 구별하여 목표물에 따라 화포의 방향각을 조절할 줄 아는 훈련된 병사가 배치되어 포병과 같은 새로운 병종이 창설되었다.343)≪世宗實錄≫권 46, 세종 11년 11뭘 경신·권 47, 세종 12년 6월 임진·권 59, 세종 15년 정월 경오. 그와 함께 지상 전투에서는 수성에만 쓰이던 화포를 말에 싣고 포병은 말을 타고 행진하다가 공격지점에 오면 말에서 내려 화포를 발사함으로써 공격용 화기로서의 사용이 시도되었다. 또 전국 해안에 포대를 증축하여 화포를 비치하게 함으로써 해안포로서의 사용도 이루어졌다.

 세종 14년부터 이듬해까지 태종 이래의 숙원이었던 한 발에 화살을 많이 쏠 수 있는 일발다전법인 火砲箭이 발명되었다. 이 화포전은 雙箭火砲라 하여 1차 야인정벌에 쓰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발다전법은 掃火矢라 하여 일본에 전해지기도 했다.344) 有馬成甫,≪火砲の起源とその傳統≫(吉川弘文館, 東京, 1962), 293쪽.

 세종 23년(1441) 10월에는 火鞘가 발명되었다. 그것은 길이 4∼5척의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서 그 속에 金鏃小走火를 넣고 헝겊으로 만든 도화선을 써서 불을 붙여 두었다가 던지는 일종의 수류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발전적 기운에도 불구하고 화포 제조기술은 결코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였다.

 세종은 그것의 기술향상을 위한 가능한 모든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종 26년 가을에는 冶所, 즉 화포주조소를 행궁 옆에 짓게 하고 자신의 직접 지휘 아래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는 시험제작을 거쳐 새로운 규격의 화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발사시험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한 발에 여러 화살을 쏘아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天字 화포는 화약을 많이 쓰지 않더라도 1,000보나 나갈 정도가 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화포를 전면적으로 다시 주조하는 일에 착수하였으며 종래의 화포는 모두 폐기되고 개량된 새 형식의 화포가 만들어졌다. 세종 30년 9월에 편찬 간행된≪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조작법과 화약사용법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정확한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345) 許善道, 앞의 책.
≪世宗實錄≫권 121, 세종 30년 9월 병신.

 ≪총통등록≫의 간행은 조선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종래 중국식 화기의 모방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조선 특유의 형식과 규격을 갖춘 독자적 발전단계에 들어섰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귀중한 업적인≪총통등록≫은 국가의 기밀 유지를 위한 조치들이 대대로 강구되는 사이에 전해지지 않고, 성종 5년(1474)에 편찬된≪國朝五禮儀序例≫의<兵器圖說>에서 그 내용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이≪총통등록≫은 세조 12년(1466) 11월에는 한글판≪총통등록≫에 나와 일반 병졸들도 능히 숙달하게 되기도 했다.346)≪世宗實錄≫권 133, 五禮 軍禮序例兵器.

 세종은 화기의 독자적 제조 개발에 힘썼을 뿐 아니라 염초자취와 방사군의 강화를 위하여 司石豹局을 궁중에 설치하고 화약생산의 증가와 그 비밀보장을 꾀하였고 한편으로 銃筒衛를 설치하여 방사군의 대량 확보와 그 질적 향상을 위하여 총통군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세종의 화포에 대한 노력은 문종에 의하여 계승 추진되었다. 문종 원년(1451) 정월에 화차전을 쏘았고 2월에는 화차의 제조를 완성하였다.347)≪文宗實錄≫권 1, 문종 원년 정월·2월. 이 제도는 태종 때의 화차와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제도는 車子(수레) 위에 架子를 만들어 싣고 그 안에 中神機箭 100개 혹은 4箭銃筒 50개를 꽃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차례로 발사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로켓과 같은 구조였다.348) 許善道,<麗末鮮初 火器傳來와 發達(하)>(≪歷史學報≫26, 1965). 화차 창제에 성공한 문종은 우선 경중에 50량, 의주 등 양계 4읍에 각 20량씩 모두 130량을 제조 비치토록 하여 이후 제조와 보급에 크게 주력하였다. 또 將軍火砲 및 銃筒線穴의 확대 등도 모색하는 동시에 일반 군기를 고치고 보충하는 데에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문종 이후에는 화기에 대한 연구나 이용이 정체된 느낌을 주고 있고, 중종과 명종대에는 天·地·玄·黃의 중화기와 선조 초에 소형화기인 勝字銃筒의 제조가 있었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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