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1. 관학
  • 1) 성균관
  • (5) 성균관의 경제적 기반

(5) 성균관의 경제적 기반

 성균관의 경제적 기반은 성균관 학전의 稅收와 성균관 노비의 身貢에 있었으며, 釋奠祭物과 酒米는 국가에서 별도로 지원하였다.

 성균관의 學田은 국초의 1,035결에다가 세종 13년에 준 965결을 합치면 2,000결이었다. 거기에다가 세종 29년에 내려준 학전 약간과 성종 15년(1484)의 400결, 중종 6년(1511)의 100결 등 2,500여 결에 이르렀고 그 후에도 가끔 학전을 더 지급하였다. 학전의 1년 세수입은 세조 4년에 600석이라 하였는데 성균관 유생 200인을 기르기 위하여는 960석이 든다고 하였다. 그러니 360석이 모자라 학생수를 줄이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성종 15년(1484)에 400결을 더 준 것은 이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416) 李成茂, 위의 글, 263쪽.

 그리고 성균관의 油炭·鋪陣·席子·地衣 등은 성균관 외거노비의 신공으로 충당하였다. 성균관 노비는 관내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되는데 관내노비는 관내의 잡역과 문묘제향, 유생의 조석공급 등을 맡았고 외거노비의 신공은 앞에 말한 용도로 쓰였다. 성균관 노비는 소위 고려시대에 안향이 시납한 300구와 세종 원년(1419)에 더 지급한 100구 및 그 이후에 늘어난 약간의 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 노비는 종종 시녀나 他司노비·공신노비로 전속되거나 다른 역에 종사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 차례의 금령이 내려졌으나 제대로 실현된 것 같지는 않다. 성균관의 학전이나 노비가 자주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게 된 것도 성균관 교육을 부실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417) 李成茂, 위의 글, 264쪽.

 성균관의 전곡출납은 양현고에서 맡았다. 양현고는 고려 예종 14년(1119) 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418)≪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그러나 출납되는 전곡은 호조에서 수령하였다. 국초에는 학당의 경비를 전적으로 양현고에서 맡아 왔으나 세종 17년부터는 豊儲倉에 그 업무를 이관하였다. 그런데 세조 10년(1465)에는 계속되는 흉년으로 양현고를 일시 풍저창에 합속시키고 성균관 녹관 중에서 참상 1인과 참외 2인을 풍저창에 파견하여 전곡을 출납케 하였다. 그러나 양현고가 풍저창에 귀속된 뒤로 여러 가지 불편이 생겨 성종 14년 12월에 양현고를 복설하였다. 양현고에서는 유생들의 飯米·助饌·氷·油炭·紙筆墨·香·席子 등 일체를 공급하였다.419) 李成茂, 앞의 글, 26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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