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1. 관학
  • 4) 잡학
  • (2) 잡학 교육

(2) 잡학 교육

 잡학 교육은 중앙에서는 해당 관아에서, 지방에서는 지방관부에서 실시되었다. 잡학생도의 총원은 경·외 유학생도의 총원인 15,550인의 43.32%가 되는 6,736인이었다.447)≪經國大典≫권 1, 吏典 外官職條에 府 4, 大都護府 4, 牧 20, 都護府 44, 郡 82, 縣 75를 기준으로 생도수를 산출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시대의 교육은 유학교육이 중심이었고 잡학 교육은 부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술직448) 雜職이라고도 하였으나 賤隷들이 담당하는 流外職인 잡직과는 구별된다.이 국가운영에 꼭 필요하였기 때문에 잡학교육을 도외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시대의 지배층이 유교교양을 바탕으로 하는 유자들이었기 때문에 기술학을 잡학으로 대우하여 천시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면 어떠한 부류들이 잡학 생도가 되었는가. 이것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신라 말에는 일부 6두품 귀족들이 잡학에 종사하였고 고려시대 에는 양반 자제들도 잡학을 배웠다. 그러나 고려 말 조선 초기부터 잡학은 천시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초기만해도 양반 자제들도 잡학에 입속하였다. 그러나 잡학은 점차 천시되기 시작하였다.

 그 까닭은 첫째로, 유교의 기예에 대한 관념적인 차별의식 때문이었다. 유교에서는 「君子不器」라 하여 유자는 세부적인 전문기예에 종사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董越의≪朝鮮賦≫에서도 “兩班子弟 止許讀書 不習技藝”라 하여 조선의 양반유자들이 기예를 천시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로, 조선 초기 지배신분의 양분화로 생긴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에는 지배신분이 양분화하여 상급 지배신분층인 양반은 정책입안에 종사하고, 하급 지배 신분층인 중인은 행정실무나 각종 기술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기술관에 대한 처우가 격하되었다. 기술관에게는 체아직을 주고 체아직에는 職田조차 주지 않았던 것 등이 그것이다. 셋째로, 기술직에 종사하면 門地가 낮아져 양반가문과 통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기술관은 기술직을 세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양반 자제들은 기술직을 기피하였다. 따라서 양반 자제들은 잡학에 들어가는 것을 기피하였다.449) 李成茂, 앞의 글, 202∼203쪽.

 양반 자제들이 잡학에 들어가는 것을 기피하자 양반의 庶孽이나 양반에는 미치지 못하고 양인 중에 넉넉한 자들이 여기에 입속하게 되었다. 문·무관 2품 이상의 첩자손들이 잡학에 들어가 기술관이 될 수 있었으며,450)≪經國大典≫권 1, 吏典 限品敍用. 모자라는 경우에는 교생, 향리의 3정 1자, 지방의 역·의·율생도 중에서 선상하도록 하였다.

 校生은 본래 양반 자제들도 입속하게 되어 있었으나 15세기 후반부터는 이미 양인 자제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많이 입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安東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額內生은 양인 자제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들은 자기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하여 잡학 생도로 歲貢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잡학생도에는 중인이 입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생이나 향리 자제라고 해서 누구나 잡학생도로 세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넉넉하고 똑똑한 교생이나 세력있는 향리 자제만이 여기에 세공될 수 있었던 것이다.451) 李成茂, 앞의 글, 204∼205쪽.

 잡학에는 문신·생원·진사 등 양반이 입속하는 習讀官이 있었다. 습독관은 유직자를 「講肄官」, 무직자를 「학생」이라 불렀다. 양반 자제들이 잡학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 침체하게 되자 이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이 제도를 둔 것이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습독관의 수는 漢學 30인, 醫學 30인, 吏文 20인, 天文學 10인이었으나 다른 분야에도 있었던 것 같다. 무직자는 매일 상근하였고 유직자는 매월 10∼15일만 해당관청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습독관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丘史를 넉넉히 주고, 군직체아를 주며, 성적이 우수한 자는 현관에 임명하고 생원·진사에게는 習讀仕日을 성균관 원점으로 간주해 주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잡학에 대한 천시 관념 때문에 양반 자제들이 습독관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임명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모면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습독관제도가 잡학진흥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하였다.452) 李成茂, 위의 글, 205∼206쪽.

 잡학생도들은 중앙의 소관 아문이나 지방관부에서 전문서와≪경국대전≫등을 교육받았으며 일강·월강 성적은 연말에 종합하여 취재의 자료로 삼았다. 지방의 잡학 생도는 한두 명씩 중앙관아에 뽑혀 올라와 교육을 받고 내려가는 제도가 있었으며 의·역·악 3학 생도는 명에 유학을 보내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遣子弟入學」은 명이 정보가 유출된다하여 반대하였기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453) 李成茂, 위의 글,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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