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1. 관학
  • 5) 향교
  • (1) 향교의 설치와 교육

(1) 향교의 설치와 교육

 鄕校의 연원은 삼국시대로 소급되는데 신라에는 淸州 등지에 지방학교가 있었다고 한다.455) 金光泆,<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韓國史硏究≫7, 1972), 130쪽. 그리고 고려가 건국되면서 태조 13년(930)에 西京에 학교를 설치하였으며 성종 8년(989)에 12목을 비롯한 여러 주·부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한 바 있었다.456)≪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 초기부터 지방 학교인 향교가 형식적이나마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의 지배 사상이 불교였는 데다가 군현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크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예종·인종대에 문운이 일어나면서 특히 인종대부터는 향교기록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는 하였으나 무신정권이 들어서자 그나마 부진해졌다. 그 후 공민왕대의 문교부흥운동과 군현제 정비의 추진으로 향교 설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곧이어 몰아닥친 내우외환으로 1군 1향교가 이룩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457) 朴贊洙,≪高麗時代 敎育制度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1), 143∼197쪽. 그러므로 1군 1향교의 설치는 인구와 토지비례에 의한 군현제가 갖춰진 조선 초기까지 기다려야만 되었다.

 태조는 그의 즉위교서에서 이미 외방 향교의 설치를 강조한 바 있었으며458)≪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무신. 태종은 「修明學校」를 守令七事459) 守令七事는 存心仁恕·行己廉謹·奉行條會·勸課農業·修明學校·賦役均平·決訟明允이었다(≪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2월 을사).의 하나로 넣어 그 성과 여부에 따라 수령의 포폄 기준으로 삼았다. 조선 초기에는 중앙에서 수령과 교수관을 파견하여 이들에게 향교의 설치와 향교 교육을 진흥시킬 책임을 지웠다. 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호를 비롯한 유지들도 향교 설치에 공헌하였다. 다시 말하면 향교의 설치는 수령·교관·지방유지 3자의 협력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군현에 향교가 일시에 다 설치된 것이 아니라 지방의 여건에 따라 빨리 설치된 곳도 있고 늦게 설치된 곳도 있었다. 처음에는 학사를 지을 경비가 없어 불사를 빌려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국가에서는 불교사찰을 혁파하는 대신 향교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혁파된 사찰의 토지와 노비의 일부를 향교에 지급하기도 하였다. 태종 13년(1413)에 향교에 일제히 지급한 토지와 노비 등은 혁파된 사찰의 토지와 노비였다. 이와 같이 「수명학교」를 수령 7사의 하나로 넣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향교 설치를 독려한 것은 국가의 지배사상을 불교에서 유교로 바꾸는 정책의 일환이었다.460) 李成茂,<朝鮮初期의 鄕校>(≪漢坡李相玉博士回甲紀念論文集≫, 1970), 235∼239쪽.

 향교 교육은 명륜당에서 실시되었다. 향교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과 선현을 봉안하는 東·西廡로 구분되는 문묘와 향교 생도의 講學所인 명륜당과 그들이 기숙하는 동·서재로 구성되는 학사가 있었으며 그 이외에 제사를 관장하는 典祀廳 등이 있었다. 향교 생도들은 중앙 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공자와 선현을 모신 곳에서 유교예절과 유교경전을 익혔다.

 향교 생도들에게 가르치는 교과서들로서는 4서 5경 이외에≪소학≫·≪효경≫·≪성리대전≫및≪삼강행실≫등 초등교과서와≪근사록≫·≪가례≫등 유학서,≪통감≫·≪송원절요≫등 사서,≪文選≫·≪楚辭≫·≪柳文≫·≪韓文≫·≪고문진보≫등 문학서가 쓰였으며 莊子·老子 등 제자백가서는 금서로 되어 있었다.461)≪慶北鄕校資料集成≫1, 慶州學令(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1992), 26∼30쪽.
李成茂, 위의 글, 239쪽 참조.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소학≫·≪가례≫·4서 5경이 주된 교과서였다. 소학은 이미 權近의 勸學事目에서 관학 일반의 필독서로서 권장된 바 있었다.462)≪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3월 무인. 소학은 經史子集 중에서 유교사회의 도덕규범이 될 만한 어구들만 골라 놓은 입문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학은 성균관 입학시험, 생원시의 先修科目으로 되어 있었다.463) 위와 같음. 소학의 정신은 學令의 기초로 반영되어 있었던 것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향교의 교과과정은 학령에 준하였다. 다만 향교의 학령은 성균관의 학령을 약간 손질하여 실정에 맞게 운영되고 있었다. 향교의 교육평가도 강경과 제술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제술에 역점을 두었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강경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강경은 매일 실시되는 일강이 있었는데 비하여 제술은 수령이 직접 한달에 望前·望後에 한 번씩 두 번 실시되는 月課가 있었을 뿐이었으며 우등자는 월말에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戶役(잡역)을 덜어주고 교육의 성과 여부에 따라 교관을 인사할 때에 참고하였다.464)≪經國大典≫권 3, 禮典 獎勸. 그리고 매년 6월 都會에는 강경·제술시험을 보여 우등자를 생원·진사시 복시(회시)에 직접 응시할 수 있게 하는 특전을 주었다.465) 위와 같음. 이 때에 문관출신 교수, 閑官 중 3인이 시관이 되었으며 경상·전라·충청도는 각 5인, 나머지 도는 각 3인씩을 뽑았다. 또한 생도 중에 품행이 단정하고 학문이 해박하며 시무에 통달한 한 두 사람을 관찰사를 통하여 천거하여 임용하기도 하였다.466)≪慶北鄕校資料集成≫1, 慶州學令.

 한편, 일강·월과의 성적이 좋지 않은 자는 역·의·율생이나 書吏로 세공되었다. 유학을 연마시키기 어려운 자들을 잡학생도로 편입시킨 것이다. 특히 왜학생도의 경우는 바다를 건너 멀리 왜국에 왕래하여야 하기 때문에 지원자가 없어 정원 30인 중 연해의 향교생도 중에서 세공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조 8년(1462) 4월에 제정된 倭學勸勵條件에서는 경상도 연해와 여러 고을 향교에서 연소한 교생 20인을 올려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3년마다 교생 중 나이 많고 재주없는 자는 서리로 세공하기도 하였다.467) 李成茂, 앞의 글, 247쪽. 교생이 기술관이 되거나 서리가 되는 것은 양반에게는 신분이 하락되는 반면에 양인에게는 신분이 상승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반은 교생이 되는 것을 기피하는 대신 양인은 교생이 되는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생은 점차 양인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향교 교육은 날이 갈수록 부실하게 되어 갔다. 이에 향교는 지방의 유학교육 기관이라기 보다 군역을 피하거나 기술관·서리 등 중인이 되기를 원하는 양인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건국 초기에 활발했던 향교 교육은 크게 부진하게 된 셈이다.

 군역을 면제받으러 몰려드는 양인 교생들을 줄이고 군액을 늘려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세조대에는 校生落講定軍法을 마련하여 강경시험에 떨어진 교생은 무조건 군역에 충당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군 교생의 정원을 정하여 부·대도호부·목은 50인, 도호부는 40인, 군은 30인, 현은 15인으로 하고 그 이외의 교생은 군역에 충당되었다. 교생의 연령은 40세 미만으로 정하고 이들 중에도 재주가 없는 자는 충군하도록 하였다. 연령 제한은 그 후 더욱 강화되어 15∼20세로 한정하기도 하였다.468) 李成茂, 위의 글, 248쪽. 그러나 낙강정군의 충격이 큰 데다가 교생들의 불평이 늘어가자 성종 2년(1471) 6월에는 각 향교의 정원을 늘여 부·대도호부는 90인, 도호부는 70인, 군은 50인, 현은 30인으로 하여≪경국대전≫에 법제화 되었다. 단 16세 이하의 童蒙은 군역과 관계가 없으므로 정원에 포함되지 않았다.469) 李成茂, 위의 글, 249∼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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