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1. 관학
  • 5) 향교
  • (2) 향교의 문묘

(2) 향교의 문묘

 향교에도 학사를 중심으로 한 교육기능과 문묘를 중심으로 하는 교화기능이 분화되어 있었다. 향교의 교육기능은 국가의 경비지원 의지가 약화되자 교생 낙강정군, 향교 교관의 질적 저하 등으로 인한 양반들의 외면 때문에 날로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묘를 중심으로 한 교화기능은 오히려 강화되어 갔다. 지방 양반들이 향교를 향촌교화의 중심기관의 하나로서 계속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왕명을 받아 부임하는 수령도 到任·遞任 때는 먼저 문묘에 배알하여야 하였으며 석전제의 현관이 되어야만 하였다. 과거 급제자들도 고향에 돌아와 家廟에 告由하기 전에 문묘에 먼저 배향하게 되어 있었다. 지방 양반들도 교생이 되는 것은 기피하면서도 靑衿錄을 만들어 그들만이 입록하고 향교제향을 독점하여 왔다. 지방 양반들은 留鄕所의 鄕案과 향교의 청금록을 통하여 향촌사회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온 것이다. 문묘에서 행해진 석전제·삭망분향제·위안제·환안제뿐 아니라 社稷祭·城隍祭·祈雨祭·勵祭·養老宴·鄕飮酒禮(10월)·鄕射禮(3월 3일, 9월 9일)·投壺禮 등이 향교에서 양반들의 주도 아래 아울러 행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470) 尹熙勉,≪朝鮮後期鄕校硏究≫(一潮閣, 1990), 199쪽.
姜大敏,<韓國의 鄕校硏究≫(慶星大出版部, 1593), 161쪽.

 향교 문묘에 봉안하는 선현의 범위는 군현의 격에 따라 달랐다.≪大典續錄≫에 의하면 개성부와 도의 계수관은 성균관 문묘와 배향인물이 같았으나, 주·부·군은 兩廡 제현을 봉사하지 않았고, 현은 宋儒 周敦頣·程顥·程頣·朱熹와 薛聰·崔致遠·安珦 만을 배향하였다. 그 후 숙종 40년(1714)에 張載·邵雍이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면서 개성부와 도의 계수관에 한하여 배향하던 것을 영조 22년(1746)에는 이들을 주·군·현에도 다 배향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향교는 초기에 비하여 교육기능보다 제례기능이 강화되었다. 이것은 주자학의 정착과 향교를 통한 지방 양반들의 대민교화의 필요성이 늘어난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민교화의 중심지는 문묘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따라서 조선 후기 향교의 존립 의미는 교육기능보다는 오히려 제례기능을 통한 향촌지배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471) 尹熙勉, 위의 책, 201∼202쪽.

 향교의 제례가 강화되자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가중되는 제수의 조달을 위하여 지방민을 착취하거나 執事校生의 수를 늘려 이들로부터 군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돈을 받는 사례가 늘어난 것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금록에 등재된 양반 유생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은 모두 제례에 참석할 수 있었으므로 재정적인 부담이 늘어나게 된 것도 다른 하나의 폐해였다. 더구나 空名帖의 남발, 納粟補官 등으로 新鄕의 수가 늘어나고 이들도 청금록에 들기를 원하고 제례의 校任이 되거나 참여하고자 하여 신·구향 간에 鄕戰이 유발되기도 하였다. 이에 향교는 모름지기 鄕權의 쟁탈지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472) 尹熙勉, 위의 책, 204∼208쪽. 향전은 신·구향 간의 대립뿐 아니라 당쟁의 성격을 띠고 행해지기도 하였다. 향교는 공론의 소재지로서 통문을 발하여 당론에 입각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이들의 여론 수렴은 儒會를 통하여 정했다. 유회에서는 교생의 입속·교임의 선출, 향교 건물의 관리, 향촌의 교화 등 향내 문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漸文義理·討逆·정부정책 비판 등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다루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통문·상소를 발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校保·除役村을 두거나, 집사 교생에 대한 뇌물수수, 제수를 빙자한 지방민의 착취 등 지방사회의 이권집단으로 탈바꿈해 가게 되었다. 따라서 향교는 지방 양반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교두보로서 이용되었다.473) 尹熙勉, 위의 책, 203∼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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