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 사학
  • 1) 서재

1) 서재

 고려 말에는 사원·精舍와 아울러 개인농장에 개설된 서재에서 사학교육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말에 중국으로부터 강남농법이 도입되어 농업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지방에 많은 농장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농장에는 서재가 설치되어 사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497) 柳洪烈,<麗末鮮初の私學>(≪靑丘學叢≫24, 1936), 92∼95쪽. 더구나 고려 말에는 홍건적·왜구의 침입과 무신들의 정권쟁탈로 문사들이 지방의 농장으로 은둔하는 경우가 많아 서재의 발달을 촉진하게 되었다. 고려말 문신·유사들의 號에 隱字가 많이 들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498) 牧隱(李穡)·圃隱(鄭夢周)·陶隱(李崇仁)·冶隱(吉再) 등이 그러한 예이다(위와 같음). 이들 중에는 주자학을 신봉하고 이를 교육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吉再·安軸과 같은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서재는 亭·榭·軒·菴·室 등으로 명명되기도 하였다.499) 위와 같음. 서재는 가숙의 다른 형태로서 발달한 사학이었다.500)≪東文選≫권 76, 復齋記.

 이러한 서재는 조선 초기에도 널리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초에는 억불숭유책의 일환으로 군현마다 향교를 설치하도록 하고 서재의 師儒와 유생을 강제로 향교의 유학교수관이나 교도로 임명하였다.501)≪增補文獻備考≫권 202, 學校考 1, 太學 1 공양왕 원년 大司憲 趙浚 上疏. 이것은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본인의 뜻과는 달리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고 생업을 버려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 7년(1407) 3월 권근은 권학사목을 만들어 사학 서재의 사유들을 강제로 다른 군현의 교수로 데려가지 않도록 하고 오히려 서재교육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502)≪太宗實錄≫태종 7년 3월 무인. 서재교육도 유교 진흥에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학도 관학과 아울러 보완적으로 유교 교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조에서 사사로이 서재를 세워 생도를 교육하는 것을 권장하고 여기에 공로가 있는 사람은 포상하였다.503)≪世宗實錄≫권 2, 세종 즉위년 11월 기유. 조선 초기의 서재는 서원·사당 등으로 불리웠으나 동명이칭에 지나지 않는다. 서재 이외에 독립된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가숙도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가족이나 가문의 자제들을 집에서 초학교육을 시켜 서재나 사학 12도·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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