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 사학
  • 2) 서당

2) 서당

 여말 선초의 서재는 16세기 이후 士林의 성장과 향촌사회의 발달로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림의 근거지로서 서원이 발달하고 군현제의 정비로 향촌사회의 조직화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서재는 道學과 과거준비를 목표로 하는 서원에 재편되는가 하면 賤庶를 가리지 않고 교육하는 향촌의 소규모 초학 교육기관으로 분립하게 되었다. 서원에 부속된 書院書堂과 향촌의 독자적인 유학교육기관인 鄕村書堂의 성립의 그것이다. 서재가 신분적인 차별에 근거하여 양분화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유교 교화정책이 향촌으로 확산되어 가면서 교화의 대상이 대폭 늘어난 것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산조 이후 급격히 쇠퇴해 가는 관학의 교육기능을 사학이 대신하게 된 것도 서당 발달의 다른 하나의 이유였다. 이에 과거에는 서재·서원·서당으로 불리던 서재의 명칭도 사당으로 일원화되어 갔다. 서원이라는 명칭은 이제 학업만을 목적으로 하는 단순한 사적인 유교 교육기관만이 아닌 도학을 추구하고 선현을 봉사하는 祠宇의 기능까지를 정하는 존재로서 재정립되었고 여기에 서당을 부설한 데 지나지 않았으며 향촌의 서당은 지배층만을 교육대상으로 하는 서재와는 달리 향촌의 하층민까지도 교육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재는 서당이라는 명칭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서원은 자제를 교육하는 서재와 先師·先賢을 봉사하는 사은의 기능을 합쳐 놓은 것이었다. 서원이 서재(또는 서당)나 사우를 바탕으로 생겨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504) 柳洪烈,<朝鮮에 있어서의 書院의 成立>(≪韓國社會思想史論攷≫, 1980), 39쪽. 16세기에 이르러 사림들에 의하여 조선의 주자학이 발달하게 됨에 따라 도학을 추숭하고 선현·선사를 봉사하는 그들의 새로운 근거지가 필요하였다. 양반 사림들은 향촌사회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서원을 발생케 한 것이었다. 서원은 이들의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 양반 사림의 집합체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16세기 이후의 서원은 과거의 서재적 성격의 서원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따라서 周世鵬이 중종 38년(1543)에 처음으로 세운 白雲洞書院 이전에 세워졌다는 道川書院·川谷書院·道洞書院·百源書院·慕巖書院도 실상은 그 이후에 중창된 것이었다.505) 柳洪烈, 위의 책, 98쪽. 물론 16세기 이후에 세운 서원도 주자의 白鹿洞書院의 예에 따라 건립된 것 이었다.

 서원에는 서당이 별설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서원은 양반 자제들이 수학하는 초학 교육기관이었고 도학과 학업이 목표였다. 양반 사림들은 그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서원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지원받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사액서원은 그러한 증표였다. 사액서원은 국가로부터 扁額과 아울러 토지·노비를 하사받았다. 마치 고려시대의 사원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고 조건시대에는 유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기게 되었을 뿐이었다. 사림은 국가의 正脈이요, 운영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집합체인 서원이 그러한 특권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정치는 사림의 여론정치였으므로 서원의 발언권은 대단하였다. 서원서당은 여론정치를 담당할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한 기초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왕조의 서원의 수는 594개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의 사액서원만도 264개에 이르렀다.

 17세기 이후에는 향촌서당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면 面里制度가 정비되어 보다 소규모의 초학 교육기판이 필요하게 되었다. 향교가 군현단위로 하나씩 있었는데 비하여 향촌서당은 면·리를 단위로 여러 개가 있었다. 이미 명종 원년(1546) 6월에 제정된 「學校事目」에서 향촌의 천서를 불문하고 들어갈 수 있는 향촌서당의 설치를 장려한 이후로 향촌서당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506) 渡部學,≪近世朝鮮敎育史硏究≫(雄山閣, 1968), 171쪽. 향촌서당에서는 士庶童蒙을 대상으로≪童蒙先習≫·≪類合≫·≪小學≫등을 먼저 가르치고 점차 4서를 가르쳤다. 향촌 서당은 면·동·리의 향교 입학을 준비하는 校下學校로 운영된 것도 있고 그와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것도 있었다. 洞書堂·同姓書堂(門中書堂)·個人私塾 등이 그것이었다. 양반이 자기집에 교사를 초빙하여 일족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고 리·동에서 공동으로 숙사를 마련하고 교사를 초빙하여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으며, 교사가 자기집에 숙사를 정하고 직업적으로 생도를 모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한 사람의 교사가 여러 서당을 순회하면서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507) 渡部學, 위의 책, 187쪽. 교사를 초빙해 오는 경우에는 일정한 대우를 해 주어야 했고 서당을 경영하기 위하여 洞契·學契·宗契 등을 모으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관학보다도 사학인 서당이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에서는 모든 경비를 국고에서 지급하는 관학보다는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사학에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도 문치주의 국가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교육시키는 풍토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교육이 유명무실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교육열이 민족성이 될 만큼 교육이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향교에까지 동몽훈도를 두어 서당식 초학교육을 시키고 있었으니 한국교육은 사학의 전통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李成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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