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3. 과거제의 정비와 운영

3. 과거제의 정비와 운영

 조선왕조가 성립되자 새로이 文·武散階制가 실시되고 문과와 아울러 무과도 실시되어 명실상부한 양반관료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태조는 즉위교서를 통해 첫째, 문·무 양과를 균형적으로 운영한다. 둘째, 고려 과거제의 유풍인 座主門生制와 國子監試를 없앤다. 셋째, 관학을 육성하여 과거제와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508)≪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고려시대에는 무과가 없었다.509) 李成茂,<韓國의 科擧制와 그 特性>(≪科擧≫, 一潮閣, 1981), 77·118쪽. 무과가 공양왕 2년(1390)에 설치되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실시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2년(1402)부터이다. 문과와 아울러 무과가 실시됨으로써 문무양반 체제의 제도적 관료 공급원을 마련하게 된 셈이다.

 감시는 고려시대의 국자감시요, 조선시대의 進士試이다.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진 유학자들은 詞章을 배격하고 經學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집권하게 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장시험인 진사시(國子監試)보다 경학시험인 生員試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태조 4년에 예조가 제정한 과거법에서는 진사시를 없애버렸다. 그 뒤 세종 20년(1438)에 일시 부활되었다가 6년 뒤인 세종 26년에 폐지, 단종 원년(1453)에 다시 복구될 때까지 조선 초기의 약 60년 동안 진사시는 실시되지 않았다.510) 宋俊浩,≪李朝 生員進士試 硏究≫(國會圖書館, 1970), 13∼14쪽. 일설에는 태조 이성계가 일찍이 고려의 생원시에 합격한 적이 있기 때문에 진사시보다 생원시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자학이 도입된 뒤 유학의 경향이 사장 중심에서 경학 중심으로 바뀌어 가게 된 추세가 보다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문과시험에는 初場講經이 실시되었다. 제1차 시험에서 경서를 시험보였으므로 여기에 합격이 안되면 2차 시험에는 가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좌주문생제도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집요한 반대로 말미암아 태종 13년(1413)에는 貢擧制와 좌주문생제가 제도적으로 철폐되었으며, 그 이전에 실시된 문·무과 급제자와 생원·진사의 명단을 작성하여 좌주문생의 폐해를 일소하고 과거의 공정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후로는 몇몇 형식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좌주문생제는 자취를 감추었다.511) 李成茂,<鮮初의 成均館硏究>(≪歷史學報≫35·36, 1967), 235쪽.

 관학 부흥운동은 고려 말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하여 이미 추진되어 왔으나 그 본격적인 실시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기다려 이루어졌다. 관학은 이제 국가의 이데올로기인 주자학 보급의 근거지일 뿐 아니라 새 왕조에 맞는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요람으로 역할하게 되었다.

 다음은 학교제도와 과거제도와의 관계이다. 고려시대의 국자감(또는 성균관)은 대부분의 과거업무를 담당하여 왔다. 물론 예부가 과거의 주 담당기관이기는 했지만 실무는 거의 국자감이 맡았다. 그러므로 새로운 과거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있어서의 조선 초기의 과도적 과거 업무를 성균관이 담당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조선 초기에 과거 실무는 성균관 학관의 집합체인 成均正錄所와 成均長貳所에서 맡고 있었다. 성균정록소는 성균관 실무학관들로 구성되어 있는 權設機關으로서 성균관 안의 일반서무를 분담할 뿐 아니라 각종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심사를 담당하였다. 성균장이소의 뚜렷한 기능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성균관 고위학관들의 집무가 아닌가 한다.

 태종 17년(1417) 윤 5월에는 예조에서 성균관과 문과와의 관계를 명시한 규정인 新科擧法이 제정되었는데512)≪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윤 5월 기사. 여기서 생원은 「입학의 문」이요, 급제는 「入仕의 길」이라는 원칙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태종 17년 과거법에는 문과 응시자격 중에 성균관 유생일 것 이외에 다시 圓點 300을 딸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어온 제도였다. 원점이란 성균관 출석성적을 의미한다. 성균관 식당에 아침과 저녁의 두 끼를 참석하면 원점 하나로 계산해 주었다. 이 때에 받는 출석 표지를 食堂到記라 한다. 그러므로 원점 하나를 딴다는 것은 곧 성균관에서 하룻 동안 수학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원점 300을 따려면 300일간 성균관에서 수학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거의 일년이 되는 셈이다. 생원시 또는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누구나 성균관에 들어가 약 1년간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문과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균관 유생이 모자랄 때에는 4학에서 升補試에 합격한 사람으로 보충하게 되어 있었다. 승보시에는 15세 이상된 4학 유생으로 품행이 단정한 사람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성균관에서 생원·진사시를 준비하였다.

 고려시대에 內舍인 國子學·太學·四門學에서 上舍인 七齋로 올라가는 시험을 승보시라 했던 것을 조선시대에는 4부 학당에서 성균관으로 올라가는 시험을 승보시라 하였다. 조선시대 성균관에는 내사·상사의 구분이 없어지고 외사인 4학과 상사인 성균관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4학에서 성균관으로 올라가는 시험을 승보시라 하고 성균관 입학시험에 해당하는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게 되었다. 고려 말·조선 초기의 성균관 四書五經齋가 고려의 7재를 계승한 제도이기 때문에 경학을 배우는 4서 5경재에 입학하는 시험이라는 뜻에서 생원시(본래는 승보시)가 되고, 고려의 국자감시가 조선의 진사시로 계승된 셈이다.

 문과 응시자격에 생원·진사일 것과 성균관에서 원점 300을 딸 것을 요구하게 되자 양반 자제들은 무과에 응시하거나 武衛·各司 南行 등 다른 벼슬길을 찾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건국과정에서 생긴 많은 공신·훈신의 자제들에게 忠順衛·忠義衛·忠贊衛 등 무위와 행정실무직에 직접 종사하는 각 사 남행 등의 벼슬길이 열려 있었다.513) 李成茂, 앞의 글, 239∼244쪽. 또한 고급관료의 자제들에게 주는 蔭敍의 혜택도 고려시대보다는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종9품부터 정7품에 이르는 참하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 자제들의 과거시험에 대한 열망은 위에 든 몇 가지의 벼슬길로 만족시킬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극히 제한된 숫자만을 뽑는 式年 문·무과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는 이러한 양반들의 요구를 무마하기 위하여 식년시 이외에 자주 別試를 실시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별시가 자주 실시되었던 것은 그들을 모두 등용하려는 뜻이 아니라 양반층을 회유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별시에는 增廣試·庭試·謁聖試·春塘臺試·外方別試·黃柑試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이러한 별시에서는 식년시와 같이 응시자격에 생원·진사일것과 성균관 원점 300을 채울 것을 그리 엄격하게 따지지 않았다. 이는 양반 회유책으로 실시되는 시험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관학이 점차 쇠퇴해 가자 성균관에서 수학하는 유생이 적어 원점 300이 차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때로는 일정한 기준일을 정하여 그 때까지 성균관에 기숙하고 있는 유생에게만 별시의 응시자격을 주기도 하고 원점을 줄여주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별시의 원점 요구가 서서히 무너져가서 나중에는 원점을 전혀 묻지 않는 상태로까지 몰고 갔다. 조선 후기의 특히 영조 이후에는 원점뿐 아니라 생원·진사일 것조차 문제삼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幼學이 문과 응시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문과 응시자격에 있어서 생원·진사나 성균관 원점이 요구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태로 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별시의 횟수가 식년시의 횟수보다 훨씬 많았다. 조선시대 전체로 문·무과를 합해 741회에 14,620명 뽑은 가운데 식년시가 163회에 6,063명, 별시가 581회에 8,557명이었다.514) 宋俊浩, 앞의 책, 19쪽.

 또한 생원·진사로서 정식으로 문과에 응시한 사람과 유학으로서 응시한 사람의 비율을 보면 다음<표 1>과 같다.

기간\구분 문과급제자 생원·진사(%) 유 학(%)
태조∼성종 1,796 1,526(85.0) 270(15.0)
연산군∼선조 25년 2,350 1,777(75.6) 573(24.4)
선조 25년∼경종 3,833 2,538(66.2) 1,295(33.8)
영조∼정조 2,901 929(32.0) 1,972(68.0)
순조∼고종 31년 3,740 668(17.9) 3,072(82.1)
14,620 7,438(50.9) 7,182(49.1)

<표 1>

 급제한 전체 인원을<표 1>에서 보면 생원·진사와 유학이 비슷한 수이나 시기별로 보면 많은 차이가 있다. 영조조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은 생원·진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나 그 이후는 유학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영조 조 이후로 문과 응시에 생원·진사일 것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되도록이면 학교제도와 과거제도를 밀착시켜 보려고 애썼다. 향교와 4학에서 양성한 인재를 생원·진사시로 뽑아 성균관에 입학하도록 하여 원점 300을 따게 한 다음 문과에 응시시키는 제도는 비록 명·청에서처럼 학교시험 자체가 과거시험의 예비시험으로 된 것과는 다르지만 두 제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보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학교제도와 과거제도가 일원화될 수 없었던 까닭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조선사회가 양반이 지배하는 양반관료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양반들이 구태여 평민들과 어울려 향교에서 공부하려 하지 않고 사학이나 자기집에서 특권적으로 공부하려 했기 때문이다. 또 양반 중에서도 문벌양반이 학당과 성균관 교육 및 과거시험에 있어서 사실상의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시도 실제로 서울 양반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시험이 가까워서야 갑자기 발표되는 시험기일을 일반인들이 쉽게 알 수도 없거니와 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합격하는데 불리하였다. 한편 국가에서도 지배층인 양반의 요구에 못이겨 원칙대로 학교제도와 과거제도를 운영해 나갈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과거라 하면 문과가 그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문과에 대한 규정은 까다롭고 또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무과나 잡과에 대한 규정은 그리 까다롭지도 않을 뿐 아니라 비교적 양반이 아닌 신분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던 편이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대체로 세종조에 정비된다. 성균관이 담당하였던 조선 초기의 과도적 과거업무는 태종 13년(1413)에 좌주문생제를 제도적으로 철폐한 다음 예조로 이관되었다. 즉 문과와 생원·진사시를 모두 예조가 주관하되, 생원·진사시는 성균관과, 문과는 藝文·春秋館과 함께 시험을 보이게 하였다. 예조가 주관하는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세종조에 크게 정비된다.≪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제도는 대부분 세종 때에 제도화되었다.515) 李成茂,≪韓國의 科擧制度≫(春秋文庫 19, 韓國日報社, 1967), 80쪽.

 다음은 과거와 관직과의 관계이다. 과거는 본래 일정한 시험을 통하여 관인을 뽑는 登龍門이었다. 과거 중에 문·무과는 고급관료를 뽑는 시험이고, 잡과는 하급관료를 뽑는 시험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는 初入仕路로서 중요한 관문이었다. 그러나 초입사로는 과거 이외에 門蔭과 薦擧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문음·과거 외에 遺逸·南班雜路·成衆愛馬 등이 있었으나516)≪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序文. 조선시대에 들어와 남반과 성중애마가 吏職으로 떨어져 나가게 되자 천거의 성격이 강한 유일(隱逸이라고도 함)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있어서 문음과 과거는 초입사로로서 쌍벽을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보다 문음의 폭이 넓고 과거가 비교적 덜 발달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5품 이상 관리의 아들에게 주어지던 蔭職이 조선시대에는 3품 이상 관리의 아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517) 李成茂,<朝鮮初期의 蔭敍制와 科擧制>(≪韓國史學≫1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140쪽. 또한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없었던 무과가 문과와 나란히 실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숙한 상태로 있었던 고려시대의 과거제를 철저한 시험제도에 입각하여 정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양반관료제의 발달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한편 인사제도는 과거제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에는 초입사의 의미가 강하였던 과거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초입사에 못지않게 超資·超職의 의미가 컸던 것이다. 과거 급제자는 벼슬길을 터주는 것은 물론 과거시험의 성적과 이미 가지고 있던 관품의 높고 낮음에 따라 초자·초직의 특혜가 덧붙여 주어졌다. 문·무과뿐만 아니라 잡과도 마찬가지였다. 이 초자·초직의 특전은 조선시대 과거의 특징을 드러내 주는 법제였다. 循資法·考課法과 같은 까다로운 진급규정을 무시하고 파격적으로 고급관료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조선시대 과거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양반관료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종9품에서 정3품 당하관까지 올라가려면 약 41년이 걸린다. 양반의 경우 만약 20세에 처음 벼슬을 시작하면 거의 60세가 가까워서야 정3품 당하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기술관의 경우 호조의 算士와 형조의 明律의 예를 들면 역시 종9품에서 그들의 한품인 정3품 당하관까지 도달하려면 약 44년이 걸린다. 기술적 참하관이 한 품계를 올라가는데 필요한 근무일수는 514일이었기 때문이다. 書吏의 경우는 2,600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순조롭게 올라가는 경우이고 그 동안 근무성적이 나쁘다든가 사고가 있을 경우는 실제로 얼마만한 세월이 걸릴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518) 李成茂,≪朝鮮初期 兩班硏究≫(一潮閣, 1980), 159쪽.

 더구나 양반관직이 아닌 관직에는 소위 遞兒職이라는 것이 있어서 6개월마다 교체되고, 물러나온 사람은 1년간은 쉬었다가 다시 공개경쟁을 통하여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난관을 겪게 되어 있었다. 숫자상으로 양반과 비양반의 근무일수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으나 실제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어느 정도의 초자·초직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 규정은 다음<표 2>·<표 3>과 같다.519)≪經國大典≫권 1, 吏典 諸科.
≪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정월 기미.

등급\과별 문 과 무 과
인 원 품계(관직) 인 원 품 계
壯 元 1 종 6품직    
甲 科 2 정 7품직 3 종 7품계
乙 科 7 종 8품계 5 종 8품계
丙 科 23 정 9품계 20 종 9품계

<표 2>문·무과 급제자 超資·超職表

등 급 역 과 기 타 잡 과
1 등 종 7품계 종 8품계
2 등 종 8품계 정 9품계
3 등 종 9품계 종 9품계

<표 3>잡과 급제자 超資表

 이≪경국대전≫의 문·무과 加資法은 세종 26년(1444)에 제정된 문·무과 散官法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문과 장원은 참하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참상관인 종6품직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다른 관료들이 거쳐야 하는 약 7년여의 승진기간을 면제받게 되는 것이다. 문과의 장원과 갑과 급제자에게는 정7품 실직을 주었으며 나머지는 성적에 따라 관품만 주었다. 7품에서 6품으로 올라가는 것을 出六(陞六)이라 하여 넘기 어려운 분계선으로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행정직은 7품 이하인 참하관에 머물러 있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계선을 문과 장원은 단숨에 넘어버리는 것이다.

 무과와 잡과도 합격자에게 품계를 올려주는 특전을 부여하였지만 문과보다는 못하였다. 문과의 갑과 급제자에게는 품계만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고품계에 해당하는 실직을 주게 되어 있었다. 또한 문과 급제자에게는 正品을 주었다. 종품은 정품보다 격이 떨어지는 관품이었다.

 그런데 현직 관리의 경우는 더욱 큰 혜택을 받았다. 예로서 문과 급제자의 초자규정을 보면 다음<표 4>와 같다.520)≪經國大典≫권 1, 吏典 諸科.

등 급 인 원 품 계
장 원 1 4계를 더해 준다.
갑 과 2 3계를 더해 준다.
을 과 7 2계를 더해 준다.
병 과 23 1계를 더해 준다.

<표 4>

 갑과의 경우는 현직에 있으면서 합격한 사람에게 1계가 높은 관직을 주었다. 또 문·무과 합격자로서 품계를 올려받아 정3품 당하관의 멱이 찬 사람은 무조건 당상관으로 올려주었다. 급제자가 아닌 경우에는 엄격한 인품평정과 가계심사를 거치거나 국왕의 특별명령이 있어야만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무과는 당상관 이상의 고급관료를 뽑기 위한 시험이라 할 수 있다. 급제자는 이미 고급관료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문과 응시자격을 당하관 이하의 관료로 국한하고 있는 것도 문과가 당상관 이상으로 승진할 자격을 주는 시험이라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10년에 한 번씩 보이던 重試도 당하관 이하만을 응시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당상관으로의 승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듯싶다. 그리고 기술직은 체아직으로 되어 있어 자주 교체되므로 승진하기 어려워 잡과에 합격하지 않고는 참하관에서 참상관으로 승진하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승진규정이 까다로웠던 조선시대에 있어서 과거시험은 그 승진을 촉진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현직관리에게 과거 응시자격을 주는 것과 그 합격자에게 더 큰 승진의 특전을 주었던 것은 조선 양반관료제의 하나의 특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반관료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고려시대부터 음서제도를 두어왔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과거가 음서보다 중요시되자 과거시험에까지 그들의 특권을 반영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 참하관 이하에게만 과거 응시자격을 주던 것을 조선시대는 당하관 이하로 확대시킨 것도 그 까닭이라 하겠다.521)≪高麗史≫권 105, 列傳 18, 許冠.
≪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그러므로 과거에서 문벌이 중요시되었다. 고급관료의 자제들이 과거에 있어서조차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고급관료를 조사해 보면 대부분 문벌 자제들이었다. 조선 후기에 급제자의 진출은 分館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분관은 급제자를 문과는 弘文館·承文院·成均館·校晝館 등 四館에, 무과는 訓鍊院·別侍衛에 분속시키는 제도였다. 조선 초기에는 급제자의 능력에 따라 분관이 실시되던 것이 조선 후기에는 문벌이 작용하여 홍문관 분관이 제일 좋은 것으로 되었다. 분관은 당쟁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522) 李瀷,≪星湖僿說≫, 人事門 分館.

 과거는 관직을 차지하는 관문이었다. 양반들은 과거에 합격해야만 관직을차지할 수 있었고 관직을 차지하고 있어야 과거시험에서도 그 자손들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과거와 관직은 양반의 가문과 신분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고 이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그들의 숙명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나친 양반들의 과거와 관직경쟁은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또한 17·18세기 실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과거제가 철폐되는 1894년의 갑오개혁 때까지 과거는 계속되었다. 양반관료 체제가 무너지고 근대적인 사회의식의 사회체제로 이행하기 이전까지는 간단히 과거제도를 없앨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과거제도에 대한 개혁안조차도 양반체제에 변혁이 오지 않는 한 아무런 실효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거제가 별다른 개선없이 5백년 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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