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4. 과거의 종류
  • 2) 생원·진사시

2) 생원·진사시

 조선의 개국 초에는 고려시대 귀족들이 사장을 중시하던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진사시인 국자감시를 혁파하고 생원시만 실시하였다. 즉 태조 원년(1392) 7월에 내린 즉위교서에서 진사시에 해당하는 국자감시는 혁파되었다. 이는 주자학을 신봉하는 개혁파사대부들이 감시가 고려시대 과거제도의 폐풍을 자아낸 장본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감시 자체보다도 좌주문생제에 얽힌 貢擧制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감시는 고려 귀족들의 붕당·학벌·족벌을 유지·강화하는 도구로서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민왕 18년(1369) 7월부터 신진 사대부들에 의하여 실행되기 시작한 과거 3층법의 뿌리를 깊이 내리기 위해서는 고려 구귀족의 온상인 감시의 혁파가 필요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왕조가 서자마자 고려의 국자감시에 해당하는 진사시는 혁파되고 말았다. 진사시를 없애는 대신 성균관 입학시험으로서 생원시를 설치하였다.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시대 문풍을 좌우한 사장 중심의 유학을 배격하고 주자학에서 중시하는 경학 중심의 유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사장 시험인 진사시를 아예 없애고 경학시험인 생원시를 강화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일대를 거쳐 설행되어 오던 진사시를 하루 아침아 없애기는 어려웠다. 좌주문생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생들의 관념에 있어서도 그러하였고 건국 초기에 지나치게 급격한 개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진사시를 혁파하기로 한 다음해인 태조 2년에는 감서(진사시)를 실시하여 朴安信 등 99인을 뽑았다. 고려시대와 국자감시도 대체로 99인을 뽑았었다.554) 李成茂, 앞의 책(1976), 109쪽.

 태종 4년(1404)에 예조에서 제정한 과거 법에서 진사시는 다시 없어졌다. 그리하여 그 뒤에는 생원시만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진사시 폐지에 대한 반대여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사시 혁파는 태조조의 정책 입안을 오로지 하고 있던 鄭道傳의 주장에 의하여 실시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도전이 제거된 태종조에는 경학 일변도의 정책보다 사장도 아울러 공부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점점 높아졌다. 더구나 정도전을 대신하여 文翰을 잡은 권근은 고려 말 사장파의 거두로서 과거시험에 기초과목인 경학도 중요하지만 응용과목인 시·부를 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권근은 경학만을 공부하고 시·부를 모르면 실제 관직생활을 영위하는 데 실용적이 못된다고 하였다. 예컨대 외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그 사신이 문신인 경우 그와 시·부로 수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555) 李成茂, 위의 책 109∼110쪽.

 이러한 주장은 끈질기게 계속되어 문과시험에 초장은 강경을 하고, 중장에 시·부, 종장에 策問을 쓰게 하였다. 고려시대의 제술업과 명경업을 문과시험에 통합한 것이다. 그리고 진사시의 복구를 요청하는 사람이 많아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가 복구되었다. 그러나 역시 진사시가 경학 위주와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6년 만인 세종 26년에 다시 혁파되다가 단종 원년(1453)에 복구되었다. 그 이후 진사시는 과거제도가 철폐되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조선 초기의 약 60년간만 진사시가 실시되지 못한 셈이다.556) 宋俊浩, 앞의 책(1970), 13∼14쪽. 그러므로 조선 초기는 적어도 생원시가 진사시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설에는 태조가 일찍이 생원시에 합격한 바가 있어서 진사시보다 생원시를 중요시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경학 우선주의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조선 초기와는 달리 조선 후기에는 생원시와 진사시가 비중이 같았으나 조선 말기에는 오히려 생원시보다 진사시가 더 중시되었다.557) 李成茂, 앞의 책(1976), 110쪽.

 한 연구 결과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 중기 이후의 생원과 진사의 선발인원, 지역별 진출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순조∼철종 년간의 경우는 다르다. 예컨대 고종 28년(1891)에 생원 238명에 진사 559명, 고종 31년에는 생원 278명에 진사 1,055명을 뽑았다. 생원보다 진사가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유생들이 생원보다는 진사가 되기를 원하는 쪽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말의 黃玹인 지은≪梅泉野錄≫에 보면 당시에 늙은 유생들을 생원이라 불렀으므로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일반 老儒와 구별하기 위하여 오히려 진사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원·진사시까지도 진사시라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한말에 있어서는 진사시를 더 격이 높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58) 安俊浩, 앞의 책, 29∼30쪽.

 조선시대의 생원·진사시는 향시와 복시(會試)로 구분되는데 향시는 각 지방에서, 복시는 예조에서 실시되었다. 향시에서 뽑힌 후보자는 회시에 응시하여 생원·진사 각 100명씩 200명을 뽑았다. 생원·진사시에는 국왕이 친히 참석하는 전시가 없었다. 전시는 문·무과에만 있었다. 생원·진사시의 초시에는 한성시와 향시가 있었는데 한성시에서 200인, 각 도의 향시에서 500인을 선발하여559) 경기 60, 경상 100, 충청 90, 전라 90, 강원 45, 황해 35, 평안 45, 함경 35. 예조가 실시하는 복시에서 생원·진사 각 100인씩을 합격시키게 되어 있었다.

 다만 철종·고종년간에는 생원·진사 합격자수가 각각 100인이 훨씬 넘은 숫자를 뽑기도 하였다. 과거제가 문란해지고 신분제가 흐트러지면서 과거 증설에 대한 요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생원·진사시 초시와 복시에는 초장과 종장 두 차례의 시험이 있었는데 초장에는 진사시를, 종장에는 생원시를 실시하였다. 즉 첫날 진사시를 실시하고 다음날 생원시를 실시하였다.560) 曺佐鎬, 앞의 글, 126쪽. 이 때문에 생원·진사시 양시에 한꺼번에 합격할 수도 있었다. 양시는 雙中·俱中이라고도 하였다.561) 崔珍玉, 앞의 글, 12쪽. 李石亨·裵孟厚·金絿·李珥 등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진사시에서는 시와 부를 각각 한 문제씩 출제하였으나 후기에 와서는 양자택일을 하였고, 생원시에서는≪경국대전≫에 五經義 1편562)≪大典通編≫에는≪春秋≫를 빼고 四經義.과 四書疑 1편을 부과하였는데 5경의는≪詩經≫·≪署經≫·≪周易≫·≪禮記≫·≪春秋≫에서 각각 한 문제씩 출제하다가 뒤에 와서는 5경 중 어느 하나만을 택하여 출제하였으며 4서의는≪論語≫·≪孟子≫·≪大學≫·≪中庸≫중 어느 하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통틀어 한 문제를 내어 하나의 긴 논문을 쓰게 하였다. 그러나 인조 11년(1633)부터는 5경의도 4서의와 마찬가지로 통틀어 한 문제만 내게 되었다.563) 曺佐鎬, 앞의 글, 124쪽.

 생원·진사시는 子·卯·牛·酉年에 실시하는 식년시와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증광시가 있었다. 식년시와 증광시는 생원·진사시뿐 아니 라 문·무·잡과가 다 같이 실시되었으나 별시·정시·춘당대시는 문무과에, 알성시·황감시·통독·절일제·전강 등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별시는 문과에만, 4학의 合製는 생원·진사시에만, 都試·觀武科 등은 무과에만 있었다. 경사가 겹칠 때에 실시되는 大婚廣試에서는 문·무과에 한하여 증원해서 뽑았고 생원·진사시나 잡과는 증광시에서도 식년시의 정원대로 뽑았다. 조선시대의 생원·진사시는 식년시가 163회, 증광시가 67회, 합계 230회 설행되었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 증광시는 7.5년에 한 번 설행된 셈이다. 식년시는 전란이나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에 설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4회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임진·정유왜란이 있었던 선조 27년(1594)과 선조 30년, 과거부정이 있었던 광해군 13년(1621), 병자호란이 있었던 인조 14년(1636) 등이 그러한 해였다. 식년에 실시하지 못하여 다음에로 퇴행된 것도 아홉 차례나 있었다. 증광시는 새로운 왕이 즉위하였을 때에 실시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태종 원년(1401)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종계무변·토역 등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에 자주 실시되었다. 증광시는 식년시와 같은 해에 실시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같은 해에 실시되기도 하였으며 오히려 식년시를 다음해로 이루어 실시할 때도 있었다.564) 崔珍玉, 앞의 글, 18쪽.

 조선시대 생원·진사의 총수는 생원 24,221인, 진사 23,776인, 합계 47,997인이었다.565) 宋俊浩는≪李朝 生員進士試 硏究≫에서 생원 24,096인, 진사 23,652인, 합계 47,748이라 하였으나 이 통계에 빠진 고종 28년(1891) 식년시의 생원 125인, 진사 124인을 합치면 총 47,997인이 된다. 이 중 현재 방목이 남아 있는 것만을 보면 생원 19,675인,·진사 20,974인, 합계 40,649인이다.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생원 또는 진사의 자격증인 白牌를 주었다.566)≪經國大典≫권 3, 禮典 白牌式.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을 及第·出身이라 한 데 비하여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入格이라 하였다. 그러나 잡과 합격자의 백패와는 달리 생원·진사시합격자의 백패에는 국왕의 御寶 중의 하나인 과거보를 찍어 주었다. 다시 말하면 생원·진사의 백패는 국왕이 내려주는 합격증이었다.

 그러면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자격이 부여되었을까. 우선 생원과 진사는 성균관 상재생으로 들어가 일정한 기간 동안 공부한 다음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생원(및 진사)은 입학의 문이요, 급제(문·문과)는 입사의 길이다”라고 한 것처럼 생원·진사는 입사가 목적이 아니라 성균관에 입학하여 문과시험을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생원·진사시는 문과의 예비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부에서는 생원·진사시를 문과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식년시나 증광시에서 배출되는 생원·진사 200인이 곧바로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문과에 전혀 응시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생원·진사는 원칙적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원점 300을 따야 문과에 응시할 수 있다고 되어 있을 뿐이었다. 약 300일 동안 성균관 교육에 출석하면 문과 응시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567) 曺佐鎬, 앞의 글, 117쪽. 그러나 문과에 응시한다고 해서 바로 급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러 번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자면 오랫동안 백패를 안고 무직의 사류로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무직의 사류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으며 또 국가에서 이러한 무직의 사류를 양산하기 위하여 생원·진사시를 설행하고 있었던 것인가. 결국 이러한 문제는 학교제와 과거제가 일원화되지 않고 별개로 운영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중국의 명·청시대처럼 학교시험을 단계적으로 거쳐 최종적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학교제와 과거제가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게 된 것은 양반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양반들이 구태여 일반 양인도 입학할 수 있는 향교나 4학에 들어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부하여 문과에 응시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양반들도 원칙적으로는 향교나 4학을 거쳐 생원·진사시를 합격한 다음 성균관에 들어가 다시 문과를 준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양반의 특권이 보장될 수 없었다. 그들은 별도로 私學을 만들어 특권적으로 과거준비 교육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官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따로 사학을 장려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자면 반드시 관학에 들어가지 않아도 생원·진사시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생원·진사시가 향교·4학과는 별도로 설행되었던 것도 이러한 양반들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전근대시대 교육이 관학보다 사학전통이 강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관학 중에서도 일반 양인이 많이 들어가는 향교보다는 서울의 양반 자제들이 많이 들어가는 4학에 특전이 더 주어져 있었고 생원·진사가 아니면서도 성균관 下齋(寄齋)에 들어가 생원·진사시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승보시도 4학에 편중해서 운영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생균관 유생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균관에 들어가는 유생수가 날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학이 허소하다는 한탄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문과 응시에 필요한 원점 300을 채운 자격자가 늘 모자라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문과 응시에 필요한 원점을 줄여 주거나 아주 면제해 주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식년시보다 자주 설행되던 각종 별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단 한번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알성시·황감시·정시 등에서는 당시에 재학하고 있는 성균관 유생을 시험대상으로 하거나 아예 재학과 관계없이 시험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성균관 유생수도 늘 200인을 채울 수 없어 한때 75인으로 줄였다가≪속대전≫에 126인으로 정하여 그 중 106인을 생원·진사로 채우도록 하였다. 서울의 세력있는 집안의 자제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시설이 나빠서 성균관에서 수학하기를 꺼려 성균관에는 시골출신 유생 30∼40명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과거시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또 국가에서도 이를 수용하곤 하였다. 또 부모가 나이가 많거나 병들었을 경우에, 원점을 면제해 주게 되어 있어서 이를 이용하여 교모하게 원점없이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문과 응시자에는 생원·진사로서 원점 300을 채웠거나 미달한 자, 전혀 원점을 따지 않은 생원·진사, 생원·진사시를 합격하지 않은 幼學들이 있었다. 그런데 영조조 이전에는 생원·진사(원점이 있고 없고를 관계없이)가 70% 이상 문과에 급제하였거나 영조조 이후에는 오히려 유학이 70% 이상 문과에 급제하였다.

 생원·진사시가 실시된 229회에 47,748인을 뽑았으나 조선왕조 502년간 (1392∼1894) 연평균 95인씩을 뽑은 셈이다.568) 崔珍玉의 통계에는 186회에 생원 19,675인, 진사 20,974인, 합계 40,649인을 뽑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현존하는 司馬榜目(小科榜目)에·나타나는 것만을 정리한 숫자이다. 이 47,748인 중 문과에는 7,438인만 급제하였으니 나머지 40,310인의 생원·진사는 무직의 사류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생원·진사 중 약 6.4% 만이 문과에 합격하고 93.6%는 생원·진사의 자격증만 가진 채 늙어간 셈이다.

 이 4만여 명이나 되는 생원·진사 중에는 蔭仕나 取才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한 자들과 관직과 관계없이 그대로 늙어간 두 부류들이 있었을 것이다. 문과에 급제한 생원·진사들은 물론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고위관직을 역임하였을 것이다. 즉, 생원·진사중 문과급제자들은 정랑·지평·교리·좌랑·정언·감찰·전적·박사·저작·검열·학유 등 이른바 名宦을 지냈는데 비하여 생원 진사 중 蔭官으로 관직에 나아간 사람들은 참봉·현령·현 감·찰방·교도 등 하위 외직에 임명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문과에 급제한 생원·진사는 50% 이상이 정3품 이상으로 승진하였는 데 비하여 음관으로 진출한 생원·진사는 9%만이 정3품 이상으로 승진하였다. 반대로 종4품 이하의 관직에는 문관이 27.4%, 음관이 80.7%가 속해 있었다. 또한 문관의 終職은 70%가 정품직이었는 데 비하여 음관의 종직은 5.5%만이 정품직이고 나머지는 종품직이었다. 이것은 대체로 名宦이 정품직이었고 참봉·현령·찰방 등 외직이 종품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569) 宋俊浩, 앞의 책, 48∼49쪽.

 한편 조선 초기에는 1회의 생원·진사시 입격자 200인 중 30%인 66인이 문과에 진출한다는 전제 아래 54명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88%가 목적(문과 급제)을 달성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14명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니 24%가 목적을 달성한 셈이고, 고종시대에는 12%만이 목적을 달성하였다. 즉 조선 초기에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생원·진사시를 본 사람이 많았는데 비하여 조선 후기 이후에는 문과에 뜻이 없거나 문과를 단념하지 않을 수 없어 생원·진사의 자격만을 따기 위해 생원·진사시를 본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570) 宋俊浩, 위의 책, 40∼41쪽.

 그러나 음관의 경우 생원·진사가 되자마자 관직을 받은 자는 극히 소수이며 그 중의 반 이상이 10년을 기다리거나, 심한 경우에는 20년을 기다려 관직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관직이라 해도 五衛將이니 참봉이니 교도니 하는 미관말직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문과에 급제한 생원·진사도 5년 이내 에 급제한 사람은 34%에 불과하며, 10년이 넘어서 급제한 사람이 33%이고, 30년이 넘어서 급제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중에는 물론 음관으로 진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직의 사류로 남아 있는 경우도 많았다. 무직의 사류로 남아 있는 사람 중에는 가문의 배경이 약한 지방 출신이 더 많았다. 서류 출신은 33%가 무직의 사류였는데 지방 출신은 70∼80%가 무직의 사류였다.571) 宋俊浩, 위의 책, 49∼52쪽.

 이러한 무직의 사류들은 지방사회에서 司馬所 등 지방 양반들의 자치기구를 만들어 향촌지배에 앞장 섰다. 향교의 靑衿錄을 장악하고 서원의 유사를 맡는 것도 이들의 할 일이었다. 따라서 생원·진사는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증이었을 뿐 아니라 지방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확실한 양반의 자격증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문과 몇 장, 생원·진사 몇 장을 냈느냐에 따라 가문의 성쇠가 좌우되었다. 이들은 생원·진사의 자격을 내세워 지방민의 교화, 하층민의 지배를 강화할 뿐 아니라 인물의 진퇴, 조세수납, 군역책정, 수리시설의 관리·이용, 혼인관계 등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들은 또한 지방토호로서 지방수령과 결탁하여 각종 이권과 권한을 독차지하였으며 지방양반으로서 지방통치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양의 Gentry와 같은 지위와 권한·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지방사회의 지배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하더라도 생원·진사가 되고자 애쓴 것이며 조선 후기로 올수록 생원·진사를 양산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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