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4. 과거의 종류
  • 3) 무과

3) 무과

 고려시대에는 예종 4년(1109)부터 인종 11년(1133)까지 24년간을 제외하고는 武科가 실시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의 崇文偃武 정책으로 무관을 양성하는 무학이나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가 설치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에 무관은 行伍에서 무재가 있는 사람을 뽑아 쓰는데 그치고 있었다. 지방의 반독립적인 무적 성격이 강한 향리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적인 문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광종조에 과거제도를 실시할 때, 문과에 해당하는 제술업·명경업과 잡과에 해당하는 잡업만 실시하고 무업을 실시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반관료제를 운영하려면 문·무과가 균형있게 실시되는 것이 바람직하였다. 양반관료 체제에서는 문반과 아울러 무반이 짝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미 고려 말인 공민왕 원년(1352)에 李穡이 무과를 실 시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민왕 20년 12월에 문·무의 균형을 꾀하여 유학인 성균관·향교와 아울러 무학을 설치하였고, 공민왕 21년에 10학을 설치할 때 무학을 軍候所에 두기로 하였으며, 다음해인 공양왕 2년(1390)에는 都評議使司의 건의에 따라 무과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조가 멸망함에 따라 무과는 실시되지 못하였다.572) 沈勝求, 앞의 글, 6∼7쪽.

 그리하여 무과의 실시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문과와 아울러 무과도 訓鍊觀 주관으로 33인을 뽑도록 명하였다.573)≪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이는 공양왕 2년에 정해진 무과의 실시 규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훈련관은 송의 무학을 본뜬 것으로 고려 말의 군후소를 합병하여 무과를 주관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태조가 즉위한지 한 달 뒤인 태조 원년(1392) 8월에는 入官補吏法을 만들어 정도전이 제창한 문과·무과·이과·문음을 관리를 뽑는 네 가지 길로 확정하였다. 그런데 태조 2년에는 文·武科放榜儀를 제정하고 태조 3년 12월에는 무과시험에 太一算을 포함시켰으며, 태조 6년 5월에는 무과 출신자를 문과의 예에 따라 서용하도록 하였다.574) 沈勝求, 앞의 글, 9∼10쪽.

 그러나 새 왕조가 개창되었다고 해서 고려의 구체제를 즉시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태조 2년 3월에 실시된 과거시험에서는 제도적으로 혁파되었던 국자감시를 그대로 실시하였다. 이에 조선시대의 무과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태종 2년(1402) 정월에 가서였다.575)≪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정월 을축. 이 무과법은≪經國大典≫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태종조의 무과 실시는 정종 2년(1400) 4월에 있었던 사병혁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 말에는 병제가 해이되어 각 節制使들이 멋대로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있었다. 잦은 외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임시방편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이렇게 뽑힌 군사들은 그들을 뽑은 무장들의 사병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병은 새로이 건국된 조선왕조의 군사권을 강화하는데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이에 태조조의 정도전은 義興三軍府를 설치하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국가에 귀일시키려고 하였으며, 정도전이 실각한 뒤에 새로이 집권한 李芳遠(태종)은 정종 2년 4월에 사병을 혁파하였다. 반면에 중앙군과 시위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別侍衛·內禁衛·內侍衛·甲士 등 특수군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무관과 군사를 양성·선발할 필요가 있었다. 무학과 무과를 설치·실시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고려 말부터 설치되어 온 무학이 태조 2년에는 兵學·律學·字學·譯學·醫學·算學 등의 8학에 포함되어 무과에 응시하려면 훈련관에서 무학교육을 받은 다음 무과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무학이 유학인 성균관·4학·향교처럼 따로 설치된 교육기관으로 독립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무학에 입학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과에 응시할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무과교육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6년 11월에 증설된 10학576) 儒學·武學·吏學·譯學·陰陽風水學·醫學·字學·律學·算學·樂學.에서는 유학만은 현임 7품 이하가 입학하게 하고 무학을 비롯한 나머지 9학은 현임·전임 4품 이하가 四仲朔에 시험을 통하여 입학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우수한 사람은 취재시험을 통하여 임용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무학은 하급관리들의 취재 교육기관으로 전락하였다. 결국 무과는 무학교육을 전제조건으로 하지 않고도 응시할 수 있게 되었고 무학취재가 더 중요한 목적으로 된 셈이다.577) 沈勝求, 앞의 글. 15쪽.

 한편 座主門生制를 혁파하면서 무과의 시관 명칭도 바뀌었다. 즉 태종 10 년(1410) 10월에는 무과의 監校官·同監校官을 폐지하고, 태종 14년에는 兵曹祝壽齋와 武科祝壽齋를 혁파하였으며, 종래 훈련관이 담당하던 무과업무를 병조가 주관하고 훈련관이 동참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조에는 무과 시험과목으로 무예만 시험보이던 것을 병서와 유교경전을 아울러 시험보였다. 將才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무예뿐 아니라 유교적인 경륜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전술보다는 전략이 우선이라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578) 沈勝求, 위의 글, 16∼17쪽.

 무과에도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한 번씩 실시되는 정기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시험인 별시가 있었다. 3년 1試의 원칙은 이미 고려 선종조에 정해졌으나 고려시대에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 후 태조 2년(1393) 3월에 3년 1시의 원칙이 다시 확인되어 태종 2년 무과부터 철저히 준수되어 왔다. 식년 무과에는 식년 문과처럼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시험이었다. 그러나 무과에는 문과의 생원·진사시와 같은 예비시험은 없었다. 무과 초시에는 훈련원579) 訓鍊觀이 뒤에 訓鍊院으로 바뀌었다.에서 실시되는 院試와 각 도별로 실시되는 향시가 있었다.580) 무과 초시의 정원은 훈련원 70인, 경장 30인, 충청.·전라 각 25인, 강원·황해·평안·함경 각 10인, 합계 190인이었다(≪經國大典≫권 4, 兵曹 武科).

 원시는 훈련원에서 錄名試取하였고, 향시는 각 도병마절도사가 차사원을 보내어 녹명시취하였다. 초시에서 뽑힌 190인을 다시 병조에서 실시하는 복시(회시)에 응시하여 28인을 뽑아 전시에서 왕의 친림 하에 등급을 정하여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을 정하였다. 그런데 무과의 경기 향시는 태종 2년부터 있어 왔으나 세종 8년(1426)정월에 폐지되고 그 정원은 원시에 편입되어 50인에서 70인으로 늘었다.581)≪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정월 기유. 식년 무과는 거의 식년 문과와 함께 실시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초시는 上式年(식년 전해인 寅·申·巳·亥年) 가을에, 복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실시되었다.

 무과의 경우도 문과와 마찬가지로 식년시 이외에 증광시·별시·알성시·정시·觀武才(춘당대시)·외방별시·중시·발영시·등준시·진현시 등의 별시가 있었다. 중광시는 시험방법이나 시취액수가 식년시와 같았고 대증광시에서는 초시·복시에 증광시의 두 배를 뽑았다. 증광시는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실시되었는데 증광 문과는 태종 원년에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증광 무과는 세종 원년(1419) 4월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증광시에는 문·무·잡과가 동시에 설행되었다. 대증광시는 경사가 겹칠 때에 설행되었다.582) 沈勝求, 앞의 글, 25쪽.

 문과 중시는 태종 7년에 처음 실시되었으나 무과 중시는 태종 10년에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태종 16년부터는 문·무과 중시가 함께 실시되었다. 중시는 丙年에 실시되는 것이 상례였고 당하관 이하의 문·무 관료들이 응시하였으며 합격한 사람에게는 승진의 혜택이 주어졌다. 중시를 실시할 때에는 별시도 함께 설행하였는데 이를 초시라 불렀으나 이것은 문·무과 초시와는 다른 것이었다. 무과 중시는 전시와 같은 방법으로 시취하였는데 문과 중시와 함께 10년만에 한 번씩 실시되었다. 그러나 초시 兩所에서 각 50인씩을 뽑는 것이 다르다.583) 沈勝求, 위의 글, 27∼28쪽.

 별시·알성시·장시·관시재·중시는 초시·전시 두 차례의 시험만 있었으며 그때그때 뽑는 수를 정하였다. 다만 알성시는 초시의 양소에서 50인을 뽑아 전시에서 국왕의 친림 아래 시취하는 것이 다르다. 알성시는 국왕이 성균관 문묘에 나아가 석전제를 지낸 다음 실시하는 특별시험이었다. 알성시는 태종 14년(1414) 7월에 처음으로 설행되었는데 이 때에는 문과만 실시되었다. 그 이유는 武聖廟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세종 13년(1431) 3월에는 훈련관 북쪽에 무성묘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문신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고 그 대신 알성시에 무과도 함께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16년 2월부터 무과도 알성시에 함께 보이기로 하였다. 알성 무과는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가 있었다.584) 沈勝求, 위의 글, 26∼27쪽.

 관무재는 2품 이상 문관과 무관 각 1인이 시관이 되어 한량·군관·조관에서 시취하였고 禁軍은 따로 병조판서가 시관이 되어 시취하였으며 전시는 춘당대에서 국왕의 친림 아래 2품 이상 문관 1인, 무관 2인이 참시관이 되어 시취하고 외방 관무재는 의정 1인이 命官(왕명을 띤 관원)이 되어 시취하였다. 관무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은 한량은 전시에 직부시키고, 출신은 수령이나 변장에 임명하였으며 군관은 가자하거나 상을 주었다.585) 曺佐鎬, 앞의 글, 180쪽.

 무과 중시는 정시와 같은 방법으로 시취하였는테 문과 중시와 함께 10년만에 한 번씩 실시되었다. 그러나 초시 양소에서 각 50인씩을 뽑는 것이 정시와 달랐다.

 중시와 비슷한 시험으로 발영시·등준시·진현시가 있었다. 발영시는 세조 12년 5월 단오절에, 등준시는 세조 12년 9월에 실시되었다. 발영시와 등준시에는 종친 및 재상 이하 모든 관료가 응시하였는데 합격자는 관직을 올려주었다. 이들 시험에는 초시와 전시 두 차례의 시험이 있었다. 진현시는 성종 13년(1482) 10월에 실시되었는데 문신 4인 무신 10인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시험은 세조·성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실시한 특별시험으로 한 번씩밖에 실시되지 않았다.586) 沈勝求, 앞의 글, 29쪽.

 외방 별과는 평안도·함경도·강화·제주에서 국왕의 特旨에 의하여 실시되는 무과 별시의 일종으로 중신이나 어사를 보내어 단 한번의 시험으로 급락을 결정하였다. 중신이 파견될 때는 空名牌를 보내어 합격자의 이름을 직접 써넣어 발표하게 하였고 어사를 파견할 때는 합격자를 무과 전시에 직부하게 하였다.587) 沈謄求, 위의 글, 26쪽.

 그리고 무과와는 조금 다르지만 지방의 한량과 군관·조관을 대상으로 무예를 시험보이는 都試와 觀武科가 있었다. 도시는 무관들의 무예를 꾸준히 연마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조선시대에만 있던 시험이었다. 이것은 문관의 문신월과법에 비견되는 시취제도였다. 도시는 매년 봄(4월경)·가물(8∼11월경) 두 차례 실시되었다. 다만 국상 등 국가의 큰 일이 있을 때는 거르기도 하였다. 京中都試의 시관은 병조의 주관하에 의정부·6조·도총부 당상관·훈련원 당상관 각 1인이 되었으며 시험일에는 의정부·6조 당상관이 모두 침관하게 되어 있었다. 外方都試의 시관은 처음에는 각 도의 감사와 都試制使가 맡았는데 세조 12년(1467)부터 감사와 병마절도사가 맡았다. 그러므로 경기·황해·강원도와 같이 감사가 병마절도사를 겸임하고 있는 곳에서는 감사 혼자 도시의 시관이 되었다. 도시는 한 차례의 시험밖에 없었다. 다만 외방 도시는 예비시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종대를 전후하여 중앙군이 외방 도시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시험절차는 경중 도시와 같아지게 되었다.588) 沈勝求, 위의 글, 29쪽.
沈勝求,<朝鮮初期 都試와 그 性格>(≪韓國學報≫60, 1990), 103∼104쪽.

 태조대의 도시에는 전국의 군민이 다 응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종조의 도시에는 삼군갑사·별시위·성중애마·한량인·각품양첩자 등 다양한 계층이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주목적은 중앙군을 대상으로 하여 훌륭한 감사를 보충하기 위하여 실시된 것이었다. 경중 도시의 경우는 적어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외방 도시에는 侍衛牌·營鎭軍·守城軍·騎船軍·閑良 등 일반 병종의 군사들도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이는 세종조 말의 중앙군의 지방군화로 군역이 일원화되는 데에 따른 결과였다. 다만 수령·우후·만호와 그 자제들은 그 도의 외방 도시에 응시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시험에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각종 특혜가 주어지는 내금위의 군사는 도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조 6년(1460) 5월부터는 내금위와 무과 급제자·겸사복·종3품 이하의 동·서반 관료들까지 자원에 따라 도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들에게는 1등의 예로 선발하는 특전까지 주었다. 무재가 뛰어난 무관을 뽑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들에게는 무예시험을 면제해 주고 講書시험을 보여 별도로 상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세조조의 도시는 세종조의 도시와 달리 무반의 加資·給到를 위한 시험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에 강서시험을 첨가한 것도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였다.589) 沈勝求, 위의 글(1990), 106쪽.

 도시의 선발 인원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태조 4년(1395)에는 문과와 같은 33인이었다. 무과가 실시되기 이전인 태조대의 도시는 무과적 성격을 띠고 실시되었던 때문이다. 그 후 세종 25년(1443)에는 도시의 정원을 1등 7인, 2등 23인, 3등 40인, 합계 70인으로 정하였으며, 세조 6년에는 무과 급제자와 무관들까지 도시에 참여하게 하여 정원을 1등 7인, 2등 33 인, 3등 60인, 합계 100인으로 늘렸다. 이것은 무예로써 뽑는 정원이고 따로 병서를 시험보여 20인을 뽑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예와 병서의 성적을 종합하여 성적순으로 뽑았으므로 두 가지 시험의 구별은 무의미하게 되었고,≪경국대전≫에는 정원조차 밝히지 않았다.590) 沈勝求, 위의 글, 101·115∼121쪽.

 도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관품을 一資씩 올려주거나 갑사·별시위에 입속시키거나 급사·급도의 특진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 도시합격자에게는 서울의 도시합격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급사·급도의 혜택을 주었다. 이와 같이 도시는 무관·군사들의 무재를 시험하여 승진의 기회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과 급제자와 내금위 군사는 반드시 도시에 응시하게 하여 승진의 특전을 보장해 주였다. 무과가 무재를 갖춘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인 데 비하여 도시는 무과 급제자를 포함한 무관·군사들의 무예 단련을 위한 재훈련과정으로서 우수한 사람을 승진시키는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시는 신분의 차이없이 광범하게 응시할 수 있었고 한 번의 시험으로 성적을 평가하는 단시험제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도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는 무과 전시에 직부시키는 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591) 沈勝求, 위의 글, 121∼123쪽.

 그런데 식년 무과에서는 28인의 정원을 대체로 지켰으나 별시 무과의 경우는 항상 식년 무과의 시취액수보다 많이 뽑았다. 특히 세조는 북정에 따른 야인의 회유책 또는 서북 지방민을 위한 인심수습책의 하나로서 별시 무과를 자주 설시하여 많은 인원을 뽑았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萬科設行의 시작에 불과하였다.592) 萬科란 무과시취를 천인·만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원을 뽑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숙종 2년(1676) 3월에는 八道庭試에서 18,251인을 뽑은 바 있었으며, 인조 5년(1627) 2월 山城庭試에서 5,464인, 광해군 10년(1618) 7월 庭試에서 3,200인, 동왕 12년 7월 庭試에서 3,000인, 동왕 13년 9월 庭試에서 4,301인을 뽑은 바 있다. 茶山 丁若鏞도 “有取數百者 謂之千科有取數千者 謂之萬科 此又何法也”(丁若鏞,≪經世遺表≫권 43, 夏官修制 武科)라 하여 무과에서 수백 인을 뽑는 것을 千科, 수천 인을 뽑는 것을 萬科라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남으로 왜, 북으로 여진의 세력이 성장하여 남북으로 조선을 괴롭혔다. 이에 조선에서도 이러한 南倭·北胡에 대하여 적절한 대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593) 鄭道傳의 北邊 개척(태조조), 李從茂의 對馬島 정벌(세종조), 金宗瑞의 六鎭 개척(세종조), 申叔舟의 北征(세조조)·三浦倭亂 진압(중종조)·乙卯倭邊 진압(명종조) 등이 그것이었다(李洪烈,<萬科設行의 政策史的 推移),≪史學硏究≫18, 1964, 216쪽). 이러한 군사행동에는 많은 군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외침을 대비하는 데 있어서 각 진에 배치되어 있는 留防兵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더구나 국가재정의 궁핍으로 유방병의 병력수를 채울 수 없었던 데다가 이들에 대한 생활보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변장들의 침탈로 도망병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만과를 자주 설행하여 군사를 보충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을묘사변 이후에도 외환은 그치지 않았다. 선조대에 尼湯介亂을 비롯하여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 등이 잇따라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전공을 세운 사람은 그 정도에 따라 무과에 등과시키기로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인의 목 하나를 베어오면 공·사천을 막론하고 무과에 등과시켜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과 급제자는 수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飢民의 머리를 베어 왜인의 머리라고 신고하여 급제한 자도 생기고 천인들이 행운을 얻는 자가 많아 무과는 드디어 일반화가 되었다.594) 李睟光,≪芝峰類說≫권 4, 官職部 科目.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에는 무과출신을 기간요원으로 하고 양민과 노비를 혼성한 束伍軍이 출현하게 되었다.595) 李洪烈, 앞의 글, 225쪽.

 이러한 현상은 광해군조의 만주출병, 효종조부터 숙종조에 이르는 북벌계획으로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해군 10년(1618) 7월에 병조는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급한 나머지 증광 무과의 초시에 입격한 사람을 전시에 직부하는 조치까지 내렸다.596)≪光海君日記≫(太白山本) 권 130, 광해군 10년 7월 갑인. 이러하여 아들 여섯이 다 무과에 급제하는 기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만과는 계속 성행하여 무과는 천한 과거로서 천인들로 차 있었으며 무과 출신자라고 다 변방에 入防하는 것이 아니어서 서울에는 등용되지 못한 자들이 가득하여 불평자들로 들끓게 되었다. 한편 한번 북변에 부방한 문과 출신자들은 병역 면제의 특혜를 받게 되어 오히려 정상 병력의 감소를 초래하게 되었다. 쌀값도, 오르고 뇌물을 주어 관직을 구하는 행위(奔競)가 성행하게 되었다. 정치인들은 이들을 당쟁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병력과 전결이 그 이전보다 약 3분의 1이 줄어들어 국가재정이 극도로 피폐하여졌다. 이에 국가에서는 그 변통책으로서 賣官賣爵·庶孽許通·奴婢放良·通行帖發給·納粟補官·校生免講 등 비상수단을 동원하였다. 이와 아울러 무과 급제자들에게 쌀이나, 화폐의 대용으로 쓰이던 면포를 받고 북변 근무를 면제해 주는 조처를 취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북변지방에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청나라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명분으로 이러한 조처를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만과 출신의 除防 納米量은 1인당 5섬으로 정하여졌다.597) 산간지방은 綿布로 대납. 이것은 식년 무과 출신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무과 출신자들에 대해서는 납미뿐 아니라 군포·군량·전마를 징수하기도 하여 국가의 옹색한 재정을 타개하고자 하였다.598) 李洪烈, 앞의 글, 326∼238쪽. 그리하여≪속대전≫에 납미자, 60세 이상된 자, 부모가 80세가 된 자를 제외한 무과 출신자는 모두 서북 변경의 군아 赴防해야 한다고 규정하게 되었다.599)≪續大典≫권 4, 兵典 留防. 그런데 양반 자제에 대한 부방을 의무화하고 있는 것은 유의해 볼 만하다. 변방 방위를 위하여 양반의 무과 출신자들은 의무적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하고, 기타 양·천의 무과 출신자들에게는 납미하게 하여 국가재정을 보완해 보자는 의도였다.

 만과의 설행은 변방 방어의 긴요성이 줄어든 조선 후기에도 계속되었으며 식년 무과의 시취인원도 늘어만 갔다. 국방상의 이유에서라기 보다는 재정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시취 명목은 국가경사나 권무를 빙자하였다. 현종 초년에는 따로 勸武廳을 두고 권무과를 실시하기도 하였다.600) 李洪烈, 앞의 글, 239쪽. 무과 출신자는 그 자신은 물론 그 아들·사위·동생·조카까지 충순위에 소속되는 有廳軍官으로 명명되어 포 1필(전은 2냥)씩을 납부해야만 하였다.601) 丁若鏞,≪牧民心書≫권 28, 兵典 勸武. 국가재정 보전책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이 만과는 처음에는 국방상의 이유로, 뒤에는 재정상의 이유로 자주 설행되어 많은 무과 출신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들 급제자 중에는 양반 자제뿐 아니라 천인 자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병력의 저질화와 신분제의 혼효를 초래하게 되었다. 만과의 현상은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고종 31년(1894)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별시에서 수백·수천 인의 급제자를 배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식년 무과에서도 정원인 28인을 넘고 특히 숙종조 이후에는 수백 인씩 뽑았다. 그리고 무과는 거의 매년 실시되었고 한 해에 몇 번씩 실시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결국 무과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사회혼란을 초래하기는 하였으나 국가의 궁핍한 재정을 보완하고 하층민들의 신분 상승을 돕는 계기로도 이용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28년(1600)에는 각 도에 중앙의 훈련원에 비견되는 무학을 설치하고 武學事目을 만들어 군사 양성을 집중적으로 하도록 하였다.602) 李俊九,<朝鮮後期의 「武學」攷>(≪大丘史學≫23, 1983), 6∼7쪽. 그리고 武學案에 등재된 사람을 무학이라는 직역을 부여하게 되었다. 무학이라는 직역은 선조 39년의≪出陰帳籍≫에서부터 보인다.603) 李俊九,<武學과 그 地位變動>(≪朝鮮後期 身分職役變動硏究≫, 一潮閣, 1993), 68쪽. 무학은 마병으로 편제되었으며 때로는 포병·수군으로도 편제되었다.604) 李俊九, 위의 글(1993), 70쪽. 또한 인조 22년(1644)의 各道校生考講事目에서는 낙강자를 우선 무학시재를 거쳐 여기에서 떨어진 자를 軍保에 편입하도록 하였다.605)≪備邊司謄錄≫37책, 숙종 9년 12월 12일.

 무학은 본래 忠順衛·忠壯衛·業武·業儒와 함께 규정 외의 면역자였다. 그러나 현종 5년(1664) 이후에는 이들은 모두 종신토록 면포 2필씩만을 부담하는 의무만 지게 되었다.606) 李俊九, 앞의 글(1993), 71∼72쪽. 무학에는 양반자제들이 많이 속해 있었다. 그러나 숙종 31년(1705) 이전에 이미 무학이 무학군으로 作隊되면서 여기에 입속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학의 지위도 낮아지게 되었다.607) 李俊九, 위의 글, 75쪽. 따라서 양반 자제 이외에 중인·서얼들도 입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학은 반상의 중간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608) 李俊九, 위의 글, 78쪽. 무학은 또한 도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무학은 일반 양인들의 신분 상승의 기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양인들도 노비를 소유하고 雇工을 둘 만한 경제적 여유를 가진 富戶들이었다고 추정된다.609) 李俊九, 위의 글, 85·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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