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4. 과거의 종류
  • 4) 잡과

4) 잡과

 조선시대의 잡과에는 譯科·醫科·陰陽科·律科 등 네 종류가 있었다. 태조 원년(1392) 8월의 入官補吏法에는 국가관리를 뽑는 관문으로 文(門)蔭·문과·무과·이과·역과·의과·음양과 등 7과가 있었는데 이 중 잡과로는 이과·역과·의과·음양과의 4과가 있었다.610)≪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신해. 율과가 빠지고 서리를 뽑는 이과가 있었던 셈이다.

 고려시대의 잡업으로는 醫卜·地理·律·畵·算·三禮·三傳·何論이 있 었다. 이 중 율·서·산이 취재시험으로 바뀌고 경전시험인 3례·3전·하론이 빠진 것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신설된 吏科는 문·무과와 구별되는 파급서리인 성중관원(뒤에 녹사)를 뽑는 잡과 시험이었다.611) 鄭道傳의≪朝鮮經國典≫入官條에 7과를 설명하는 가운데 “謂薄書期會金穀營造之事 供給應對之節 不可以不習 置吏學”이라 한 것으로 보아 吏科은 吏員選拔試驗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과는 7과가 설치된 태조 원년(1392) 8월에 바로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실록에 의하면 이과는 취재로 뽑아오다가 세종 8년(1426) 4월에 처음 잡과에 편입되어 다른 잡과의 예에 따라 식년마다 가례·율·서·산·≪元六典≫·≪續大典≫·≪訓民正音≫등 시험을 보여 70인을 뽑아 성중관에 빈 자리가 생기면 임용하도록 되어 있었다.612)≪世宗實錄≫권 32, 세종 8년 4월 갑신. 그러나 이과에 관한 법규가 육전에 기록되지 않아 세종 13년 9월에 가서야 실시하게 되었다.613)≪世宗實錄≫권 53, 세종 13년 9월 계미. 그리하여 이과 1등에는 架閣庫丞同正, 2등에는 副丞同正, 3등에는 錄事同正을 주었으나 뒤에 가각고가 헛이름에 불과하다고 하여 백패를 주었다.614)≪世祖實錄≫권 46, 세조 14년 6월 병진. 이와 같이 이과는 조선 초기의 약 40여년 동안 실시되어 오다가 다시 吏員取才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당시에 이과가 실시됨으로 해서 율·서는 여기에 포함되었다가 이과가 없어진 다음에 율만의 율과로 독립되고 산은 算員取才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算學取才案이 계속 남아 마치 산과와 같은 인상을 주게 된 것도 이러한 때문이었다.

 이과와는 별도로 吏文科도 일시 시행되었다. 즉 태종 7년(1407) 3월에는 이문을 문과시험의 선택과목으로 하거나 문과 종장에 「吏文之士」를 같이 시험보여 문과 급제자에 포함시키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615)≪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3월 무인. 그러나 세종 5년(1423) 12월에 승문원이 생기자 이문과는 없어지고 문과에 이문을 아울러 시험보여 승문원에 보내게 되었다.616)≪世宗實錄≫권 22, 세종 5년 12월 을축. 이와 같이 이문과는 설치된 지 불과 6년만에 없어지고 승문원이 이문교육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문과와 함께 譯科도 조선왕조의 외교정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역관 충원을 목적으로 국초부터 실시되었다. 역과 중에는 漢語·蒙語·女眞語·倭語의 4과가 있었는데 한어가 가장 중시되었다. 대명외교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어과는 국초부터 실시되었으나 몽어과는 세종 원년 4월에,617)≪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4월 경인. 왜어과는 세종 23년 7월 이전에,618)≪世宗實錄≫권 93, 세종 23년 7월 정미. 여진어과는 문종 원년(1451) 4월에619)≪文宗實錄≫권 7, 문공 원년 4월 을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성종 13년(1482) 무렵 한때 문과에 한어를 함께 시험보여 그 합격자를 문과 출신자와 같은 자격으로 서용코자 하였으나 문신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620)≪成宗實錄≫권 139, 성종 13년 3월 을축·계사. 그러나 이것을 통하여 조선사회에서 한역관의 지위가 양반만은 못하였지만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역과를 담당하던 관청은 司譯院이었다. 사역원의 연원은 泰封의 史臺에 소급되며, 고려 층렬왕 2년(1276)에 通文館이 생겨 외국어에 관한 사무를 맡았고, 뒤에 사역원이 생겨 역관의 교육과 역과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공양왕 3년(1391)에 漢語都監을 한문도감으로 바꾸었다고 한 것을 보면 고려말에 한어도감이 있었다가 이 때에 한문도감으로 바꾼 것 같다.621) 李洪烈,<雜科試取에 對한 一考>(≪白山學報≫3, 1967), 334쪽.

 이와 같은 고려시대의 중첩된 역학·역과 담당 관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역원으로 일원화되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역과 중에 한어과·몽어과·왜어과·여진어과가 차례로 생기게 되었다.622) 李洪烈, 위의 글, 334∼335쪽.

 한편, 지방의 역학은 지방 요충지에 설치되었다. 세종 10년에는 이미 있었던 평양 譯學院의 예에 따라 義州에 한학이 생기고, 동왕 12년에는 乃而 浦·富山浦·鹽浦에 왜학을, 동왕 15년에는 黃州에 한학을, 예종 원년(1469)에는 熊川·東萊에 왜학을 각각 설치하였다.≪경국대전≫에는 웅천·동래의 왜학이 폐지되었고, 義州·昌城·理山·碧潼·渭原·滿浦·北靑에 여진학이 신설되었으며, 정조 때에 만든≪대전통편≫에는 薺浦·鹽浦의 왜학이 없어진 대신 巨濟에 왜학을, 濟州에 한학과 왜학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종 때에 만든≪六典條例≫에는 제주의 한학·왜학과 의주와 여진학이 없어진 대신 宣川에 몽학, 海州·甕津·咸興에 한학, 全羅左·右水營과 統制營에 한학과 왜학을 각각 신설하였다. 이러한 지방 역학원에서는 鄕通事를 양성하여 중앙의 사역원에 파견근무시켰으며 중요한 역관은 사역원에서 양성·선발하였다.623) 李洪烈, 위의 글, 336쪽.

 의학교육이나 의학시취를 담당한 관청은 典醫監이었다. 고려시대에는 太醫監(목종대)·惠民署(예종대)가 있었으나, 고려 말에는 典醫寺·惠民庫局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조의 즉위 초에 전의감·혜민국을 두었고, 태조 6년(1397)에는 따로 濟生院을 두어 三醫司라 불렀다. 이 중 전의감에서 의학교육과 의과시취를 담당하였으며 혜민국에서는 약재 수집과 민생의료를, 재생원에서는 약재 수집·의녀교육·미아수양 등의 일을 맡았다. 그러나 제생원은 세조 6년(1460)에 혜민국과 일시 합쳤다가 곧 부활되었다. 전의감에서 뽑은 의과 출신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하였으므로 세종조부터는 3의사에 의생방을 따로 두어 의학교육을 시켰다. 이것이 의학설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624) 李洪烈, 위의 글, 330∼332쪽.

 3의사 이외에 고려 목종 때는 전의감에 병설되어 있던 內藥局625) 그 전신은 목종 때 설치된 尙藥局.이 설치되어 왕실의 의료를 담당하였으나 고려 말에 奉醫署로 개칭되었다가 전의사에 통합되었고,626) 李洪烈, 앞의 글(1967), 332쪽. 세종 25년(1443)에는 內醫院으로 독립되었다. 그리하여 재생원이 폐지된 뒤에는 전의감·혜민국·내의원을 3의사라고 부르고 의학교육은 전의감과 혜민국이, 의과시취는 전의감이, 의녀교육은 혜민국이, 왕실의료는 내의원이 담당하였다. 지방 의학기관으로는 서경에 醫學院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예종 11년(1116)에는 分司大醫監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각 군현에는 의학박사를 두어 지방의학교육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각 군현에 의학이 두어져 審藥 1∼3인씩을 두었다. 그러나 지방 의학은 유명무실하여 의관 양성은 주로 중앙에서 전담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627) 李洪烈, 위의 글, 332∼333쪽.

 율학교육과 율과시취는 형조의 考律司에서 담당하였는데≪秋官志≫에는 율학청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역시 형조의 고율사 소속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태조 때부터 형조 밑에 율학을 두었으며, 세조 때에는 율학청을 따로 지어 고율사의 낭청이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종 16년에 율학을 司律院이라 바꾸었다가, 세조 12년(1466)에 다시 율학으로 환원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왕조 내내 율학이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628) 李洪烈, 위의 글, 336∼338쪽.

 지방 율학기관으로서는 고려 명종8년(1178)에 서경의 속관으로 法曹司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율학이 두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지방에도 율학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조선시대에는 각 군현마다 율학이 있었으며 檢律 1인씩이 있어 형률을 적응하고 율학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지방율학도 지방의학과 마찬가지로 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629) 李洪烈, 위의 글, 338∼339쪽.

 음양학과 음양과는 觀象監에서 주관하였다. 관상감의 전신으로 신라 때에는 漏刻典과 천문박사가 있었으며 고려 초에는 太卜監과 太史局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고려 말에 이르러 書雲觀으로 통합되어 풍수·음양학을 부설하였다. 서운관은 조선 태조 원년에 다시 설치되었으나 세조 12년(1467)에 관상감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연산군 때에 일시 司曆署로 격하되었으나 중종 초에 환원되어 고종 때까지 계속되었다. 태조 때에 6학의 하나로서 음양·풍수학이 설치되었으나, 세종 때에 음양학·천문학·풍수학으로 3분되었으며, 세조 때에는 풍수학을 지리학, 음양학을 命課學으로 개칭하였다.630) 李洪烈, 위의 글, 339∼342쪽.

 지방의 옴양학을 담당하는 관청으로는 고려 초에 서경의 刻漏院이 있었다가 예종 11년(1116)에 分司大史局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토관직으로 평양의 掌漏署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군현에는 그러한 기관이 없었다.631) 李洪烈, 위의 글, 342쪽.

 위의 역학·의학·율학·음양학의 4학은 정식으로 잡과가 실시되었던 분야였다. 이 중 역학·의학·율학의 3학은 중앙과 지방에 다 설치되어 있었으나 음양학은 지방에는 없었고 중앙에만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방 잡학은 유명무실하였다. 같은 잡학지만 算學·樂學·畵學·道學은 잡과가 실시되지 않고 취재시험만 있었으며 주관부서도 중앙에만 있었고 지방에는 없었다.

 산학은 호조에서 담당하였는데 산학교수·산학훈도를 두어 주관하게 하였다. 호조는 신라의 倉部, 고려의 民官에 해당하는 6부 중의 하나였다. 고려 때의 산학은 書學과 함께 잡업시험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잡과에서 제외되었다.

 악학은 掌樂院에서 담당하였는데 左坊에는 雅樂의 樂生(양인이 소속), 右坊에는 俗樂의 樂工(천인이 소속)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지도하는 樂師가 있었다. 장악원의 연원은 신라의 聲音署, 고려 초기의 典樂署로 소급되며, 고려 말에는 典樂署·雅樂署·慣習都監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조선 태조 2년(1393)에는 전악서에 武工局을 두어 武樂을 가르쳤으며, 태종 때에는 10학의 하나로 악학이 설치되었다. 세조 3년에는 악학과 관급도감을 악학도감으로, 아악서와 전악서를 장악서로 합병하였으며 일시 악과를 실시하였으나 예종 초에 중단되었다. 성종 원년(1470)에는 장악서를 장악원으로 개칭하였으며, 연산군 11년(1505)에는 이를 聯芳院으로 격하시켰다가 중종반정 후에 다시 장악원으로 바꾸었다.632) 李洪烈, 위의 글, 344∼345쪽.

 畵學은 圖畵署에서 주관하였다. 도화서에는 교수 1인이 있어서 생도를 가르쳤다. 도화서의 연원은 신라의 彩典633) 뒤에 典彩署로 바뀌었음.으로 소급되며 고려시대에도 개경과 서경에 圖畫院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도 도화원이 계속 있어 오다가 세조 12년(1467) 관제개혁 때에 도화서로 명칭을 바꾼 듯하다. 화학은 조선 초기의 10학에 끼어 있지 않았으나≪경국대전≫에는 10학 중에 포함되어 있다.634) 李洪烈, 앞의 글(1967), 345∼348쪽.

 道學은 유교의 도학이 아니라 도교와 관련된 잡학을 의미하는데 昭格署에서 이를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大淸觀이 도학을 담당하였으나 조선 태조 원년 11월에 昭格殿으로 바꾸었다. 대청관은 그 후에도 계속 있어 오다가 세종 때에 혁파된 것으로 보이며, 소격전은 세조 12년 정월에 소격서로 개칭되었다. 소격서는 연산군 때에는 일시 혁파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조광조 등 사림들의 주장으로 중종 13년(1518)에 없앴다가, 乙卯士禍로 조광조 등이 실각하자 중종 17년 12월에 다시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러한 잡학 관서는 고종 31년(1894)의 갑오개혁으로 없어지거나 크게 개편되었다. 전의감·사역원·관상감·도화서는 없어지고 내의원은 典醫司(뒤 에 태의원)로 개칭되었으며 장악원은 궁내부 산하에 편입되고, 외국어 번역은 外務衛門(뒤에 외부)의 번역국에서 담당하였다. 지리학과 의학은 內務衙門(뒤에 내부)에 지리국과 위생국을 두어 관장하게 하였으며, 學務衙門(뒤에 학부) 내에 관상소·외국어학교를 신설하는 한편 산학은 度支衙門(뒤에 탁지분) 내에 회계국, 율학은 法務衙門(뒤에 법부)에 법관양성소를 설치하여 업무를 주관하게 하였다.635) 李洪烈, 위의 글, 960쪽.

 잡과는 식년시와 중광시·대증광시에서만 시취되었고 다른 별시는 없었다.≪경국대전≫에 나타나 있는 잡과 초시·복시의 시취 정원은 다음<표 6>과 같다. 식년시와 증광시의 시취 정원은 조선시대 내내 같았으나 대증광시만은≪속대전≫에 역과 27인, 의과 11안, 음양과(雲科) 21인, 율과 11인으로 되어 있다.

구 분 초 시 복 시


漢 學
蒙 學
倭 學
女 眞 學
45
4
4
4
13
2
2
2
의 과 18 9


天 文 學
地 理 學
命 課 學
10
4
4
5
2
2
율 과 18 9
121 46

<표 6>잡과 초시·복시 정액표

*≪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잡과에는 전시가 없고 초시와 복시만 있었는데 초시는 해당 관청에서, 복 시도 역시 해당 관청에서, 그 관청의 提調와 예조 당상이 실시하였다. 향시가 있는 것은 한어과뿐으로 역과 초시인 향시는 역학원이 있는 평안·황해도에서 관찰사가 실시하였다.636) 위와 같음. 시험과목은 전문서·경서·≪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여 성적은 통 2분, 약 1분, 조 반분으로 계산하여 분수가 많은 자를 선발하였다.637) 위와 같음. 그리하여 합격자에게는 처음에 홍패를 주다가638)≪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11월 을묘. 뒤에는 백패를 주었다. 그러나 문과의 홍패와 생원·진사시의 백패에는 과거 보를 찍어 주었는데 비하여 잡과 백패에는 禮曹印만 찍어 주었다.

 잡과에 응시하는 사람은 대체로 기술관이나 잡학생도들이었다. 양반 자제들이 잡과에 응시하는 것을 기피하였기 때문이다. 기술관에 취재되기 위해서는 우선 잡학 생도가 되어야만 하였다. 잡학 생도가 되기 위해서는 전·현직 고위 기술관의 추천을 받아야만 하였다. 잡학 교육은 중앙에서는 해당 관청에서, 지방에서는 해당 지방의 군현에서 각각 실시하였다.

 잡학 생도의 총원 6,736인은 성균관·4학 및 향교의 유학생도 총원 15, 550인에 비하면 절반이 안되는 43.32%에 지나지 않는다.639) 성균관 유생 200인, 4학 유생 400인, 향교 생도 14,900인, 합계 15,500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조선시대의 교육정책이 유학 중심이었고 잡학 교육은 부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잡학 교육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잡학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잡학교육은 끊임없이 장려되었다. 다만, 유교교양을 바탕으로 하는 양반 지배체제 하에서 양반 유학자들이 잡학을 관념적으로 천시하여 중인들이 종사하는 전공분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부류들이 잡학 생도가 되었는가. 조선 초기만해도 양가 자체뿐 아니라 양반 자제들도 잡학에 입속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640)≪世宗實錄≫권 45, 세종 11년 9월 기유.
≪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정월 을해.
그러나 고려 말 사대부세력의 성장과 더불어 기술직에 대한 차별의식이 심해지고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잡학과 기술직에 대한 관념적·법제적 차별로 나타나게 되었다.641) 李成茂,<朝鮮初期의 技術官과 그 地位>(≪惠庵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 202쪽.

 따라서 양반 자제들은 잡학 생도가 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 결과 잡학 생도를 충원하는 방법은 달리 마련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안이 마련되었다. 하나는 상급 지배신분충인 양반에서 떨어져 나온 부류들을 잡학 생도 또는 기술관으로 편입시키는 방법이었다. 즉, 문·무 2품 이상의 첩자손들을 잡학 생도 또는 기술관에 입속시켰다. 다른 하나는 향리나 일반 양인에서 잡학 생도를 충원하는 방법이었다. 양반 자제들이 잡학 생도가 되는 것을 꺼리자 校生, 鄕吏 3정 1자, 地方醫·律 생도의 선상을 꾀하게 되었다.

 교생은 본래 양반 자제도 입속하게 되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안동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額內生은 오히려 비양반 자제들로 채워져 있었다.642) 李成茂,<朝鮮初期의 鄕校>(≪漢波李相玉博士回甲紀念論文集≫, 1970). 이들은 자기들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잡학 생도가 되었다. 잡학 생도·기술직 취재·잡과 등을 통하여 이들은 免役의 특전을 받을 뿐 아니라 신분을 양인에서 중인, 중인에서 양반으로 상승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생·향리라 해서 누구나 세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잡학 생도가 되려면 교생 중에 노비를 소유한 자이거나, 똑똑한 자라야만 하였으며 향리 자제도 3정 1자에 한하였다. 이는 잡학 생도로 세공되는 자들이 교생 중에 부유한 자나 향리의 3정 1자에 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경제적 능력이나 실력면에서 하급 신분층인 중인이 되기에 충분한 자들이었다.643) 李成茂, 앞의 글(1971), 204∼205쪽.

 이와 같이 잡학 생도가 되는 것은 상급 지배신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나 하급 신분에서 올라온 사람으로 구성되었으나 조선 초기에는 전자가 많았고 조선 후기에는 후자가 많았다. 물론 이 두 가지 길 이외에 投化人이 역 하 생도로 편입된 예도 있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644)≪世宗實錄≫권 30, 세종 7년 10월 신사.

 그러나 잡학 생도가 되려면 고위 기술직을 지낸 세 사람의 천거를 받아야만 하였다. 적어도 조선 후기에는 그러하였다. 이것은 기술직이 세전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천거한 사람은 천거된 사람의 보증인으로서 일이 잘못되면 연대책임을 져야만 하게 되어 있었다.645) 金玄穆,≪朝鮮後期 譯學生徒 薦擧에 관한 硏究≫(仁荷大 博士學修論文, 1994).

 잡학 생도는 소정의 교육을 마친 다음 기술관 취재시험이나 잡과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기술관 취재는 四孟朔取才가646) 1·4·7·10월의 1일. 원칙이었다. 4맹삭 취재가 처음 실시된 것은 태종 16년(1416) 3월 초이고, 그 이전에는 4중삭 취재·4계삭 취재가647) 3·6·9·12월의 1일. 시행되었다. 시험관은 해당 관청의 제조와 예조 당상관이 되었으며 시험과목은 전공서·경서·≪경국대전≫등이었다. 취재시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잡학 생도, 잡과를 합격한 다음 해당 관청에 임시로 배속되어 있는 權知, 전·현직기술관 등이었다. 취재 성적은 잡과와 마찬가지로 분수로 계산하는 데 10분 이상을 1등, 6분 이상을 2등, 3분 이상을 3등으로 하여 1·2등은 서용하고 3등은 서용하지 않았다. 都目政事(인사행정)에는 취재성적이 우선이었으나 전공에 따라 근무일수·업무실적·수업일수가 고려되기도 하였다.648) 李成茂, 앞의 글(1971), 216∼217쪽.

 기술관 취재에 합격한 사람은 체아직을 받았다. 그러면 조선 초기에 있어 녹관 체아직과 수직 대상자와의 비례는 어느 정도였는가. 사역원의 예를 들어 보자. 사역원 녹관은 모두 29자리였는데 그 가운데 체아직이 아닌 교수와 훈도 10자리를 뺀다면 체아직은 15자리였다. 그런데 이 15자리의 체아직을 받을 수직 대상자들은 역학 생도 80인, 別齋學官 13인, 전직 역관 약간 명, 역과 출신의 권지 19인을 합치면 백 수십 인이 넘었다. 이 숫자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을 것이다. 이들은 불과 15자리의 체아직을 놓고 경쟁해야만 하였다. 물론 지방의 훈도로 가는 길이 있었다지만 그 수는 10인 이하였고 지방의 역학 생도 156인649) 한학 90인, 여진학 40인, 왜학 26인.까지를 합친다면 수직 대상자수는 더욱 늘어난다.

 한학이 11.9:1, 몽학이 9:1, 왜학이 27:1, 여진학이 3:1이다. 이는 조선 초기의 현상이고 시대가 내려갈수록 경쟁율은 더욱 높아갔다. 이렇게 어려운 경쟁을 뚫고 기술관이 된 사람들도 체아직의 경우는 5개월마다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다시 취재시칩을 보아 재임여부가 결정되었다.

 잡학 생도 이외에 잡학을 공부하는 양반 출신의 習讀官이 있었다. 습독관에는 문신·생원·진사 등 양반들이 입속하였는데 관직이 있는 자를 講肄官, 관직이 없는 자를 학생이라 하였다.650)≪世宗實錄≫권 63, 세종 16년 정월 갑진. 양반 자제들이 잡학에 종사하는 것을 꺼려 잡학이 침체되자 양반들로 하여금 직접 기술학을 습득케 한 것이다. 예컨대 한학의 경우 중국사신이 왔을 때 화제가 經史에 미치면 역관들이 통역을 감당치 못하여 실수를 저지르는 수가 많았다. 역관들이 한어만 알고 경사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 일에 밝고 정사에 밝은 문신들이 한어까지 능통하면 이상적이었다. 습득관 제도는 이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습독관은 음자제·4관651) 藝文館·成均館·承文院·校書館.·참외관·성균관 유생·4학 유생 등 문신이나 장차 문신이 될 양반 자제들이 입속하게 되어 있었다.652) 李成茂, 앞의 글(1971), 205∼206쪽.

 습독관은 잡학 절반에 걸쳐 두어진 듯하나≪경국대전≫에는 한학 30인, 이문 20인, 천문학 10인만 나타나 있다.653)≪經國大典≫권 1, 吏典 京官職. 이들 습독관은 관직이 없는 경우에는 상근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관직이 있는 경우는 매월 10∼15일씩 해당 관청에서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학의 경우는 매월 1일과 16일을 제외하고는 관직이 있는 자라도 한어를 강습하도록 하였다.654) 李成茂, 앞의 글(1971), 206쪽. 이들 습독관에게는 교육을 받은 다음에 많은 특전이 부여되었다. 丘史(수행 노비)를 넉넉히 주고, 군직 체아직을 주며, 성적이 우수한 자는 좋은 관직에 임명하고, 생원·진사에게는 교육일수를 성균관 원점으로 간주해 주었다.

 습독관수와 군직 체아직의 비율은 대체로 약 3:1이다. 이것은 기술관과 체아직의 비율 10:1과 비교하면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습독관은 문신이었으므로 잡직인 기술관보다 우월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잡학에 정통한 습독관은 肄習官이라 하여 해당 기술직에 종사하기도 하였고 임기를 마치면 동반 현직이나 수령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양반 습독관에게 잡학을 훈련시킨 것은 양반관료들이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655) 李成茂, 위의 글, 221∼222쪽.

 잡과에는 잡학 생도와 7품 이하의 전·현직 기술관들이 응시하였다. 습독관은 양반이었으므로 잡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잡과는 꼭 필요한 인원만 뽑았기 때문에 정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잡과가 처음 실시된 것은 태종 2년(1402)이다. 그러나 태종 2년부터 연산군 4년(1498) 이전까지는 몇몇 單回榜目을 제외하고는 잡과 방목이 남아 있지 않다.

 의과를 제외하고는 16세∼20세 사이의 입격율이 가장 높았으며, 의과는 21세∼25세 사이의 입격자가 가장 많았다. 잡과는 경험이 필요한 의과를 제외하고는 조기교육을 시켰던 것 같다. 특히 역과의 경우는 외국어이므로 조기교육이 필요하였던 것 같다. 산학은 입격자의 거의가 20세 미만이었다.656) 崔珍玉,<朝鮮時代 雜果設行과 入格者 分析>(≪朝鮮時代 雜果合格者 總覽≫,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21쪽.

 잡과 입격자를 낸 439개 姓貫 중 200인 이상을 낸 가문이 4개, 150∼199인을 낸 가문이 8개, 100∼149인을 낸 가문이 4개, 90∼99인을 낸 가문이 4개이었다.657) 잡과 입격자를 가장 많이 낸 잡과 명문은 다음과 같다.
1) 全州李氏(452명)
2) 慶州崔氏(372명)
3) 南陽洪氏(268명)
4) 川寧玄氏(207명)
5) 慶州金氏(196명)
6) 淸州韓氏(183명)
7) 密陽卞氏(175명)
8) 泰安李氏(174명)
9) 密陽朴氏(166명)
10) 井邑李氏(164명)
11) 金海金氏(154명)
12) 慶州李氏(153명)
13) 牛峯李氏(113명)
14) 朱溪崔氏(104명)
15) 新平韓氏(103명)
16) 順興安氏(102명)
즉 100인 이상의 입격자를 낸 유명한 성관은 16개로 전체 입격자의 40%인 3,089인이었다. 이것으로 기술관의 세전성이 증명된다.

<李成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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