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개요

고려 말 사전개혁운동은 공양왕 3년에 과전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고, 이 과전법은 조선시대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다. 과전법은 농장의 不輸租특권을 배제하여 모든 전지를 과세지로 재편성하며 소유권적 토지지배관계를 공인하게 하였고, 私田의 재분배는 私田畿內의 원칙에 따라 分給收租地가 축소되었으나 신진관료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으며, 농민의 所耕田에 대한 소유권을 보호하여 어느 정도 농민생활의 안정을 기하게 하였다.

과전법 이래 토지소유권이 공인되자 토지소유자는 자립성을 갖게 되어 농민이 직접 국가를 상대하게 되는 처지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수조권은 소유권을 기반으로 한 민유지 위에 설정된 복고적 법제로서 경기도 내에만 분급함을 원칙으로 축소되었다.

종래 조선 초기의 토지제도는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의 변천을 주된 제도적 골격으로 다루어 왔으나, 그것은 조선 초기 토지제도의 일부인 양반관료의 수조지 지배만을 다룬 것에 불과하였다. 양반관료의 수조지 지배인 과전은 사전억압시책으로 태종·세종년간의 私田 하3도 移給과 還給, 세조 12년의 직전법, 성종 원년의 직전세 官收官給制로 이어졌으며, 직전세의 관수관급제는 직전 내에서 田主의 토지지배관계가 불가능하게 된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직전제마저도 명종 때에 이르러 소멸되고 말았다.

토지소유관계는 일제시기 이래 이제 관학자와 유물사관론자에 의하여 토지국유제로 주장되어 정설로 인정되어 왔으나, 1960년대 이래 토지사유제가 주장되어 토지국유제는 하나의 표방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토지사유제임을 밝혀냈다. 토지사유제를 주장하는 근거는 공전·사전·민전의 개념에 대한 재검토와 민전의 실태에 대한 규명이었다. 공전·사전·민전의 개념에는 토지국유제론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수조관계로서의 개념이 담겨 있는 이외 소유관계로서의 개념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민전은 상속·매매·증여·전당할 수 있는 토지로서, 평민은 물론 양반·중인·천인 등 모든 계층의 민유지였다.

과전법 체제 아래 영농형태는 지주의 農莊형, 소농민의 自營형, 零細小農·無田농민의 並作형으로 분류된다. 농장 가운데 왕족의 농장은 거의 노비에 의해, 양반의 농장은 노비와 佃戶에 의해, 그리고 사족·향리의 농장은 거의 전호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세종 때 강원도의 한 통계에 의하면 약 15%의 지주에게 전체 면적의 43%가 점유되고 있었다. 자영형 소농민의 민전은 자가 노력과 노비·雇工·婢夫 등으로 경영되었다. 세종 때 토지소유농민은 7/10에 달하였으며, 농민의 토지소유 규모는 1, 2결에 불과하나 자영농의 토지소유 상황은 고려 말에 비하여 훨씬 호전되어 있었다.

영세농민이나 무전농민은 병작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과전법에서 병작을 금하고 있으나 조선 초기 이래 병작은 널리 보편화되어 갔다. 병작이 발달한 원인은 토지집적의 진전과 영세·무전농민의 끊임없는 증가,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유통경제의 발달, 농민의 小經營능력 보유와 철저한 양인 影占의 금지 등을 들 수 있다. 과전법으로 여말 권문세가의 대토지소유에 의한 권력형 농장이 사라진 이래 15세기에는 중소지주의 財理형 지주전호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16세기에는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고려 말까지 중국의 농서만이 간행, 보급되었으나 세종 때 비로소 우리의 농서인≪農事直說≫이 편찬, 보급되어 농업기술의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여말·선초에 休閑法이 극복되고 連作法이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였다. 조선 전기에 연해지역의 개발과 下濕地의 水田개발은 중국 江南農法의 도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수전농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조선 초기 이래 수전은 直播連作法이 정착되었으며 移秧法은 수리·생산기술면에서 아직 널리 행해지지 못하고 乾耕法이 조선의 기후 조건에 맞추어 독특한 耕種法으로서 개발되었다. 旱田농업은 15세기에 1년 1작식의 연작법이 지배적이었고, 16세기에는 비옥한 밭에서 1년 2작식 혹은 2년 3작식도 행하여졌다.

연작법의 보급은 施肥法의 발달과 직결되었다. 시비에는 客土·草木肥·糞種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분종이 시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었다. 15세기에는 粗放的 시비법인 분종법이었으나 16세기에는 糞田·廐肥도 발달하였다. 노동수단으로 2필의 소를 끌어 동력으로 한 우경이 발달하여 쟁기가 널리 보급되고, 손으로 사용하는 농구로 호미가 널리 보급되었다.

조선 전기의 상업은 농본주의 정책으로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상업은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으로 구분되고, 국내상업은 다시 도시상업과 지방상업으로 나눌 수 있다. 도시상업으로, 서울에 行廊상점인 市廛은 상설점포이었으며 개성과 평양 등 도시에도 상설점포가 개설되고 있었다. 서울의 시전은 개성의 것을 본따 태종 때에 대규모의 행랑을 조성한 후에 개설되었다. 서울의 시전이 가장 성한 곳은 雲從街, 鐘樓, 廣通橋 등이었다. 京市署는 시전을 관장하고 시전으로부터 行廊稅를 징수하였다. 시전은 宮中과 府中의 수요를 조달하는 반면 상품에 대한 독점판매의 특전을 차지한 어용상점이었다. 선조 말 내지 인조 때 쯤에 모든 시전 가운데 으뜸이 되는 전으로 발전한 六矣廛(육주비전)은 縇·綿紬·綿布·苧布·紙·魚物廛 등을 가리키며, 그들은 독점판매상점일 뿐 아니라 國役의 대가로 禁亂廛의 특전마저 부여되었다.

지방산업으로 場市는 15세기 후반에 전라도에서 발생하여 점차 3남지방으로 파급되고 이어 전국적으로 발달되었다. 장시의 발생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유통경제의 활성화 현상이었다. 즉 조선 초기에 휴한법이 극복되고 연작법이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장시가 발생하였다. 이에 당시 농업 선진지역이던 하3도에서 먼저 장시가 발생하여 발달한 것이다. 그리고 16세기에 접어들어 장시는 정부의 금압책이 이완되는 가운데 충청·경상도에 번지고 이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각 군현마다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장시 발달의 배경은 지주제의 발달, 중국과의 사무역 발달, 군역의 布納化, 농민층의 분화와 이에 따른 상인의 증가, 防納의 성행 등을 손꼽을 수 있다. 장시의 성립 초기에는 1개월에 2회 개설되는 15일장이었는데, 16세기에는 10일장과 5일장으로 발달하였다. 장시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대개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스스로 생산하고 제조한 소상품들이었다.

조선 초기에 정부는 米·布 등 물품화폐 기능의 한계를 통감하고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의 영향을 받아 楮貨·銅錢·箭幣 등을 유통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태종 원년부터 저화를 제조하여 유통케 하고, 세종 4년에 동전인 朝鮮通寶를 주조하여 저화와 함께 병용케 하였으며, 세조 8년에는 柳葉錢인 전폐를 주조하여 통용케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經國大典≫에는 布貨를 國幣로 규정하고 있는 바, 포화에는 麻布와 綿布가 있고, 그 중에서 마포가 正布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면포가 세종 때부터 유력한 유통수단의 기준이 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 화폐유통정책이 실패한 것은 상품교환경제가 미숙한 상태인 까닭도 있겠지만 면포의 화폐적 기능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

대외무역은 사대교린정책에 따라 朝貢과 回賜의 형식인 관무역과 使行에 의한 사무역이 행하여졌다. 대외무역의 대상국은 명·여진·일본·유구·남만 등이었다. 명과의 조공은 3년 1貢이 원칙이나 조선은 실리를 위해 자주 사행을 파견하였다. 명과의 조공에서 金銀歲貢이 과중한 부담이었으나 세종 때에 금은세공이 면제되어 양국 간의 교역에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졌다.

여진과는, 여진의 조공에 조선이 회사하는 형식으로 여진이 조선에서 생필품을 교역해 갔다. 태종 때부터 국경지대인 경성·경흥에 무역소가 설치되어 鹽鐵 등을 교환해 갔다. 일본과는 對馬島 宗氏가 중개무역을 담당하였는데, 일본과의 무역도 일본의 조공에 조선이 회사하는 형식인 관무역으로 행하여 졌다. 세종 원년에 대마도정벌로 남해안이 평온해지자 조선은 3포개방으로 교역활동지역을 제한하며 계해약조를 맺어 歲遣船의 척수와 歲賜米豆를 제한하였다. 유구와의 교섭은 고려 말부터이며, 그들은 토산품과 베트남·샴 등 남방의 산물을 조공하고 회사품을 가져갔으며, 성종 2년에는 그들의 세견선을 공인하고 관직이 수여되었다. 남만은 샴과 자바를 자칭하며 그들에게도 토산품의 조공에 회사품이 주어지고 관직도 수여되었다.

수공업은 15세기에 관영수공업인 官匠制가 주도하였으나 16세기에는 민영수공업인 私匠制로 바뀌어 갔다. 관장제는 工匠이 관부에 예속되어 물품을 생산하여, 중앙관아에 경공장이, 지방관아에 외공장이 배속되었다.≪經國大典≫에 의하면 중앙에는 30개 관아에 2,800여 명의 경공장이 129종의 물품을, 지방에는 3,500여 명의 외공장이 27종의 물품을 생산하였다. 공장의 신분은 양인과 公賤으로 구성되며, 그들은 관아의 수요에 따라 각기 책임량을 제작하였다. 그들의 작업은 公役에 응하는 것이므로 무상이며, 공역 이외에 사적으로 생산한 물품에는 납세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민간수공업도 독립수공업자, 농민·승려·백정 등에 의하여 수공업품이 생산되었다. 독립수공업자는 관부의 匠籍에 등록되어 공역을 부담하지만 공역 이외에 생산된 물품에는 匠稅가 부과되었다. 농촌수공업은 농민의 부업으로 생산되었으며, 승려의 수공업으로는 製紙·製鞋·木工·製麵 등이, 백정의 수공업으로는 製革·柳器제조 등이 있었다.

철광업은 야철수공업의 성장과 함께 발달하였다. 고려 이래 繕工監과 軍器監에서 소요되는 철물은 각 도의 貢鐵로서 충당하는 斂鐵法이었다. 이 공철이 배정되면 수령이 징수하여 선공감·군기감이 납부하였다. 그러나 태조 7년에 염철법이 혁파되고 鐵場都會制로 바뀌었다. 철장도회제는 철장도회에서만 선공감·군기감에 공철을 납부하고, 철장도회가 설치되지 않은 곳에서는 민영으로 광산이 운영되었다. 그 곳에는 철물제조업자인 月課匠人이 사적으로 생산되었고, 정부는 그들을 외공장에 등록하여 匠稅를 부과하였다. 세조 때에 철장도회의 공철이 미곡으로 代納되었고, 성종 때에는 철강생산지에 한하여 각 읍 採納制를 시행한 바 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민간 야철수공업의 성장으로 각 읍 채납제도 무너지고 대납제가 보편화하게 되었다.

방직업에는 주로 絹織과 綿業이 있었다. 견직을 위해서 잠업진흥정책이 수립되었다. 조선 초기에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蠶室都會를 설치하여, 5등호제에 따라 뽕나무 수량을 의무화하는 양잠조건을 펴 생산이 배증되었으며, 관영수공업에 의한 견직물 생산이 주도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관영수공업은 독립수공업이나 농가 부업의 민간수공업으로 바뀌어 갔으며, 농가의 견직이 장시에서 거래되었다.

면업은, 여말에 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면 종자를 가져와 재배되기 시작하였으며, 목면의 전래에 따라 조선 초기 의료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종래의 주된 의료는 마포였으나 태종대에 목면이 서민 의료에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세종·세조 때에는 아래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목면으로 옷을 입게 되었다. 한편 세종 때 이래 목면은 일본으로의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일본의 목면 재배는 조선보다 1세기 이상이나 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에 목면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화폐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代役價나 노비 身貢 등이 모두 면포로 납부되었다.

제지업은, 종이의 용도가 많아 발달하였고 관영수공업이 위주이나 민영수공업도 있었다.≪經國大典≫에 의하면 경공장과 외공장의 전체 인원 중 紙匠인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1위로 가장 많았다. 서울에는 造紙署가 있었고, 지방에는 각 읍마다 官楮田에서 官備貢物로 국가의 수요를 조달하였는데 주로 하3도와 강원도에 배정되었다. 제지 공정은 手灑法이었으며, 제지에는 그 길이, 너비, 두께 등에 각기 규격이 있었다. 종이를 잘 만드는 곳은 조지서와 전주, 남원을 꼽았는데,≪林下筆耕≫에는 ‘湖南楮 天下第一’이라고 하였다.

造船은, 민간 조선업이 없지 않았으나 관부의 조선관리가 위주였으며, 典艦司에서 造船을 관장하였다. 원래 韓船은 平底船型으로서 鐵釘이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못을 갈아치우는 改槊은 큰 보수작업이었다. 세조 때에 새로운 兵漕船을 개발하여 전시에는 병선으로, 평시에는 조운선으로 사용하였다.≪經國大典≫에 보이는 大·中·小猛船은 병조선을 그 크기에 따라 일컫는 것이다. 명종 때에 板屋船이란 군선을 개발하였는 데 格軍은 판옥 내에, 戰士는 上甲板에 배치했던 구조의 군선이었다. 조선 초부터 제조되어 왔고 임진왜란 때에 위력을 보인 거북선은 平屋船에 두터운 널빤지(蓋板)를 복개한 군선이다.

염업은 모든 해안에 鹽盆을 두어 소금을 생산하였다. 고려시대에 비하여 염분 수가 배로 증가되고, 황해·평안·함경도 해안에까지 염분이 널리 설치되었다. 조선의 소금은 陸鹽이 없고 海鹽 위주이며, 제염방식은 海水直煮法에서 無堤鹽田式으로, 다시 有堤鹽田式으로 발달해 갔으며, 이 시기에는 아직 세 가지 제염방식이 함께 행하여졌다. 소금의 생산은 鹽干이 신역으로 官鹽을 제조하는 것이 원칙이나 염분의 私占, 염간의 도망 등으로 그 폐단이 적지 않았다.

수산업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어획물의 종류가 풍부하였고 연안어업이 개발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어획물에는 어류·패류·갑각류·수산동물·해조류 등이 있다. 漁法으로는 어망·漁梁·釣漁 등이 있는 바, 어망이 널리 사용되었고, 어량은 서해안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조어에는 외줄낚시와 주낙이 있었다. 수산양식업으로 양어가 있었으며, 해조류 양식 중 김양식이 조선 전기에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수산제조품으로는 乾製品이나 젓갈류가 있었다. 어장은 원래 私占을 금하고 司宰監에 속하게 하였으나 어장의 사점이 일반화되어 갔다.

국가재정의 수입원은 租稅·力役·貢物 등이었다. 그리고 세조 때에 일종의 세출일람표라 할 수 있는 橫看의 제도가 마련되고 세입일람표라 할 수 있는 貢案이 재조정된 것은, 국가재정제도에 있어서 일대 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조세의 수취는 건국 초에 과전법의 조세규정에 의하였으나 세종 때에 새로운 전세제도인 貢法으로 개혁되었다. 과전법의 조세규정은 1/10 수조율과 損實踏驗法 등이 중요 내용이었다. 공법은 손실답험의 폐단과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른 전세제도의 개혁으로 田分6등법, 年分9등법, 1/20稅, 常耕의 正田과 時耕에 한하여 수세하는 續田과의 구분, 災傷田 10결 連伏에 의한 감면규정 그리고 田結制의 재조정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손실답험법이 休閑法에 알맞는 조세규정이라면 공법은 連作法에 적합한 조세규정이었으나 공법의 전분6등법은 隨等異尺指尺이 기준이었으나 공법의 전분6등법은 隨等異尺周尺으로 그 기준을 삼았다.

역역은 徭役과 國役으로 구분되었다. 요역은 국가에서 필요에 따라 개별 민호의 노동력을 무상으로서 정기·부정기적으로 징발하는 제도이다. 요역의 기준은 태조 원년의 計丁法에 의한 3등호제이었는데 정종 원년에 人丁과 田地의 기준을 함께 한 計丁計田折衷法으로 개정되고, 세종 17년에 計田法에 의한 5등호제로 재개정되었다.≪經國大典≫에 요역은 出丁기준이 ‘田八結 出一夫’로 되어 있고, 동원 기간은 1년에 6일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 그 기준은 지켜지지 않았다.

국역은 항구적인 역이며 身役 혹은 職役이라 할 수 있고, 그 신분에 따라 良役과 賤役의 구별이 있었다. 따라서 역의 내용도 軍役, 혹은 吏校, 혹은 干尺, 혹은 노비身貢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국역 부담의 주 대상은 양인층이었고, 이들이 부담하는 국역의 부담은 군역이었다. 군역 부담자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양인층의 대표적 兵種은 正兵과 水軍이었다.

국역 부담에 있어서 당번의 의무를 지는 자는 戶首라 하고, 호수가 당번 의무를 수행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를 뒷바라지하는 자를 奉足이라 했다. 국역 부담의 단위인 戶는 대개 3丁 1戶로 삼는 것이 통례이었다. 세조 때에 봉족제는 保法으로 개편되었는 바, 보법에서는 봉족을 保人이라 부르며 2丁을 1保로 삼고, 이제까지의 戶 기준 대신에 丁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經國大典≫에 보인의 호수에 대한 재정적 부담인 保布는 매월 면포 1필로 규제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貢物은 민호가 토산의 현물을 공납하는 것으로서, 각 주현에 배정되면 다시 민호에 배정되었다. 공물은 민호에게 현물로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나, 혹은 민정을 동원하여 조달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현물의 대가로 미·포 등을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민호에 나누어 배정되지 않고 관아에서 직접 마련하여 납부하는 官備貢物도 있었다. 그리고 매년 바치는 常貢 이외에 필요에 따라 징수하는 別貢이 있었다. 공물의 分定은 실제 지방관의 임의에 맡겨지고 향리가 그 실무를 맡았으며, 공물의 종류도 잡다한 까닭에 그 분정에 있어 공평하기가 어려웠다.

공물의 수납과정에서 防納과 點退는 큰 폐단이었다. 방납은 공물청납업자가 공물납부자의 물품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를 납공자로부터 배 이상으로 징수하는 일을 말하며, 점퇴는 공물납부자의 물품을 검사할 때에 규격미달의 구실로 그 물품을 도로 퇴하는 것을 말한다. 방납은 관료·양반·승려 등 공물청납업자가 모리를 일삼던 일이며, 점퇴는 공물 수납의 실무자인 吏胥의 농간이었다. 이러한 공물 수납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후일 貢物의 田稅化인 大同法이 실시된 것이다.

공물 이외 토산의 현물을 공납하는 進上이 있었다. 공물은 납세의 일종으로 각 주현 단위로 매년 1차 상납하는 것이나, 진상은 본래 납세의 의무라기 보다 국왕에 대한 外臣의 禮獻으로 궁중에 쓰일 물품을 각 도 단위로 감사와 병사·수사가 월 1차 상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상도 공물과 같이 의무적인 것이어서, 각 도 단위라 하지만 역시 주현에 나누어 배정되어 민호의 부담이 되는 점에서 공물과 다름이 없었다.

국가재정은 그 수입면에서 중앙 각사나 지방 관아에 분급된 토지의 收租로서, 혹은 노역으로, 혹은 전세와 공물에 의지하기도 하는 등 다양하였다. 또 국가재정과 궁중재정의 구분이 확연하지도 않았으며, 세입·지출이 오늘날의 재정제도와 같이 수립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세입일람표인 貢案은 이미 고려 이래로 있어 왔으며, 세조 때에 이르러 세출일람표인 橫看이 제정되고 공안도 조정되었다.≪經國大典≫에 공안과 횡간의 제도가 제정되어 있으나, 그것이 어느 정도로 국가재정의 총규모를 통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종전에는 세입을 보아 세출을 정하던 것을 이제 세출을 계산하여 세입을 정하게 된 것이므로 국가재정의 새로운 개혁이었다.

교통기관으로 驛과 院이 있었다. 역에는 驛子를 배치하여 공문의 전달, 공무여행, 관물수송 등에 역마를 제공하였다.≪經國大典≫에 의하면, 전국 41개 驛道에 537개 역이 설치되어 察訪·驛丞이 관장하며, 역마 이용자에게 중앙에서는 尙瑞院이, 지방에서는 감사와 병사·수사가 마필 수가 새겨진 馬牌를 발급하였다. 원은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 관에서 설치한 여관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310개소의 원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공무여행자의 숙식은 대개 客舍나 민간업자에 의해 대행되었으며, 후기에 원은 없어지고 원터에 주점·주막이 발달하였다.

漕運은 水運과 海運으로 각 지 漕倉에 수납된 세곡을 서울로 수송하는 것이었다.≪경국대전≫에는 9개 조창제로서 각각 조창의 收稅구역이 배정되어 있었으나 평양·함경 양도의 세곡은 조운하지 않고 고장에 그대로 두었다. 조운은 주로 관선에 의해 행해졌으나 명종 때 이래 사선의 賃船制가 행해졌다.

烽燧는 중요한 통신기관으로 산봉우리의 봉수대를 연결하여 변경의 긴급한 상황을 서울 남산(木覓山)에 전달하는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전국의 주요 봉수망은 5개 간선으로 되어 있고 5炬法으로 변경의 상황이 중앙에 보고 되었으며, 대체로 변경의 상황이 12시간이면 서울에 전달될 수 있었다.

역과는 달리 임진왜란 직후부터 공문을 급히 보내기 위하여 擺撥制가 개설되었다. 파발에는 騎撥과 步撥이 있고, 그들이 교대하는 곳을 站이라 했다. 파발망은 3개의 간선망으로 되어 있었다.

馬政은 중앙의 경우 병조 아래 司僕寺가 관장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監牧官으로 하여금 각 목장의 群頭와 牧子를 시켜 관할하게 하였다. 목장 중에는 馬목장이 9할로 많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馬목장의 수는 87개소이며, 목장 소관의 馬匹數는 약 4만필에 달하고 제주도 목장 소속의 것이 2/3였다. 말의 수요는 주로 역마의 조달을 비롯하여 對明 수출에 충당되었다.

度量衡은 세종 때에 통일, 정비되어 周尺·營造尺·布帛尺·黃鐘尺 등이 제정되었다. 당시 제정된 주척은 量田尺으로 활용되어 전분 6등법에 의한 양전척의 기준이 되었다. 세종 때에 量器체제도 개혁하여 營造尺을 제정하고 그 표준 量器尺도 영조척으로 바꾸었다. 영조척이 건설용척으로 제정되고 포백척도 새로 통일되었으며 황종척도 국악의 표준척으로 만들어졌다. 용적을 재는 量制도 개혁되었으며 중량도 黃鐘律管에 채운 물 무게를 기준으로 삼아 제정되었다.

<李載龒>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