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1) 과전법체제의 확립
  • (3) 사전의 개혁과 과전법의 성립

(3) 사전의 개혁과 과전법의 성립

창왕 즉위년(1388) 7월에 조준의 1차 상소를 비롯한 여러 개혁론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제시된 직후, 사전개혁에 관한 중신회의가 도당에서 개회되었다. 정치권력은 이미 개혁파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지만, 이 회의에서는 시중 이색을 비롯하여 여러 권문세족 출신 중신들이 개혁을 반대하고, 개혁파 정도전·윤소중 등이 찬성하였으며, 정몽주는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다. 다시 백관회의를 열어 논의한 결과 참석자 53명 가운데 개혁에 찬성하는 자는 18·9명이요, 나머지 다수는 모두 반대하였는데 그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가「巨室子弟」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를 비롯한 개혁파 사류는 끝내 사전개혁을 추진해 나갔다.0016)≪高麗史≫권 118, 列傳 29, 趙浚.

그들이 이 때 거실자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해 간 사전개혁의 구체적 절차는 동·서북면을 제외한 남부 6도의 양전과 또한 이 해부터 전국의 공사전조를 모두 公收하는 두 가지 큰 일을 동시에 실현해 가는 것이었다. 먼저 양전의 경우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E-1. 신우 14년 8월 창왕이 6도관찰사로 하여금 각기 副使와 判官을 동원하여 토지를 고쳐 양전토록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2. (같은 해 8월) 각도 안렴사를 고쳐 都觀察黜陟使로 하였다. 양광도는 정당문학 成石璘, 경상도는 전평양윤 張夏, 전라도는 전밀직부사 崔有慶, 교주강릉도는 전밀직상의 金士衡, 서해도는 밀직제학 趙云仡로서 모두 대간의 추천을 받아 임용하였는데, 각기 부사와 판관을 동원하여 토지를 고쳐 양전토록 하였다(≪高麗史≫권 137, 列傳 50, 辛禑).

이 사료는 사전 개혁을 대대적으로 발의한 창왕 즉위년(1388) 8월부터 6도의 양전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양전을 단행하기 앞서 각 도의 안렴사를 보다 품계가 높고 권한이 강력한 도관찰출척사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실상 이 때 안렴사제도를 바꾸어 兩府의 대신으로 임명하는 도관찰출척사 제도로 대신한 것은 고려 지방행정제도의 일대 변천을 의미하는 바, 그것은 이제 각 도 내의 군·관·민 모두를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대권을 가진 상급 행정기관의 새로운 설치에 해당하였다는 것이다.0017)邊太燮,<高麗按察使考>(≪歷史學報≫40, 1968;≪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181∼194쪽).

각 도의 장관을 파격적으로 격상시켜 전에 없던 큰 권한을 부여하는 지방행정제도의 개편이 사전개혁을 위한 양전에 즈음하여 단행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세력가의 조업전이라든가 사전에 대해서도 무차별한 양전을 결행하고 무차별한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대권의 위임과 직접 관련된 제도의 개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의 전민변정사업이 權奸들의 훼방으로 중도 무산되었던 종래의 경험에 비추어, 개혁파 사류는 사전을 개혁하기 위한 기본적 전제로서 6도의 양전부터 단행하였다. 이 때 착수한 양전은 창왕 2년(1389)에 일단 완료되는데, 그것이 장차 과전법시행의 바탕이 되는 기사양전이었다.0018)己巳年(1389)은 창왕 원년임과 동시에 공양왕 원년이다. 기사양전이란 말은 “기사년에 양전치 못한 바닷가나 섬의 田地”(≪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科田法)라거나 “기사년간에 경기 및 5도전을 모두 양전하여 作丁하였다”(≪太宗實錄≫권 4, 태종 7년 7월 기해)라 하여 당시에 이미 술어화되어 있었다.

무릇 양전사업이란 단순히 토지 결부수의 조사만 끝내고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고려 후기 이후로 결부제란 것은 토지의 비옥도를 기준으로 상·중·하 3등의 전품을 책정하고, 그 각 등급의 각 전품에 따라 결부의 實積을 다르게 책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전지의 전품이 어느 등급으로 책정되는가에 따라 그 전지의 결부 실적에 변동이 일어나고, 그러한 변동의 연쇄에 따라 종래까지 어느 字丁 단위에 묶여져 파악되어 오던 그 전지의 소속 자정에 변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0019)量田에 따라 새로이 파악된 결부수에 대변동이 일어난 사례로는≪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5월 기사와 金泰永, 앞의 책, 220∼221쪽 설명 참조. 양전에 따라 소속 字丁에 변동이 일어난 사례로는≪世宗實錄≫권 74, 세종 18년 9월 갑오와 李景植, 앞의 책, 112∼113쪽 참조. 심지어 斗落 따위로 전지의 절대면적을 파악하는 관행이 굳어져 가고 있던 구한말에 와서도 光武量田에 따라 전지의 소속 字丁과 字番이 많이 변동하였다는 사실은 裵英淳,≪韓末·日帝初期의 土地調査와 地稅改定에 관한 연구≫(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7), 39·151쪽 참조. 그 같이 전지의 소속 자정에 변동이 초래되기 마련이므로 가령 어느 전지일지라도 그 소유권의 보전을 위해서나 혹은 국가 수세권의 확보를 위해서도 양전에서 소유권자를 확인하고 대조하는 일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기사양전은 특히 고려 말의 사전을 개혁하기 위하여 단행한 것이었던 만큼 그것이 소유관계를 비롯한 토지의 불법적 탈점에 따라 권세가의 사전이나 농장으로 일시 편입되어 있었던 많은 토지가 양전을 통한 소유권자 확인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소유자에게 반환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다른 변정사업에서와는 달리 이 때에 이르러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면서까지 전국적 양전을 단행한 의도가 거기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양전이 시작된 창왕 즉위년부터 전국의 공전은 물론 모든 사전에 대해서도 당분간 그 전조를 모두 公收한다는 원칙을 관철시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양전과 동시에 결행된 전국의 공사전조를 모두 공수한다는 이 조처야말로 사전개혁의 실제 내용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어떠한 조업전적 사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혁파의 대상인 불법적 존재였다면, 양전을 통해서는 그 정당한 소유권자가 확인되었을 것이며, 동시에 그 사전의 전조가 이 해부터 공수되기에 이른다면 그것의 사전으로서의 실체 혹은 내실은 전혀 분해되어 없어져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사전조의 공수과정은≪高麗史≫권 78, 食貨志 田制條에 잘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은 순차를 거쳐 단행되었다.

F-1. (신우 14년, 1388) 7월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였다.…‘지금 마침 양전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니, 규정에 따라 일정한 액수를 급전하기 이전에 3년을 한정하여 (모든 전지에 대하여) 임시로 공수토록 한다면 군국의 수용에 충당할 수가 있고 관리의 녹봉도 줄 수가 있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2. 전법판서 조인옥 등이 상소하였다.…‘事機를 놓치지 말고 금년부터 임시로 공사전조를 公收하여 軍食을 갖추게 된 연후에 朝宗의 分田之法을 회복해야 한다’(위와 같음).

3. (같은 해) 8월 창왕이 6도관찰사로 하여금 각기 부사와 판관을 동원하여 토지를 고쳐 양전토록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4. (같은 해) 8월 (창왕이) 敎하되 ‘사전의 전조를 일체로 모두 공수한다면 반드시 朝臣들의 식량이 어려워질 근심이 있으니, 우선 그 절반만을 공수하여 국용에 충당키로 한다’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사료 F-1과 2는 앞서 말한 대로 개혁파 사류가 정권을 잡고 문제의 사전개혁을 발의하면서 이 해부터 결행되는 양전과 함께 전국의 공·사전 모두에 대하여 공수하기를 주장하였다는 내용이다. 그 주장대로 F-3은 양전을 결행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양전의 결정과 동시에 개혁파의 주장대로 이 해부터 사전조에 대해서도 일체의 公收를 단행한다는 결정 또한 내려졌던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F-4의 교서내용을 보면, 그 같은 사전조의 전면적 공수 결정이 내려지자 아마도 거실자제들의 큰 반발이 일어났던 모양이어서, 사전조를 전면 공수하는 대신에 그 절반만을 공수하기로 한다는 내용으로 번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전조의 절반을 공수한다는 조처는 사료에 표현된 대로 ‘조신들의 식량이 어려워질 근심’을 그 주요한 요인으로 하고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사전조의 절반을 공수한다는 것은 그 나머지 절반에 대하여 당해 사전의 조업전적 토지지배관계를 새 정권이 오히려 확인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개혁파 사류는 다시 반격을 시도하고 나섰다.

F-5. 창왕 즉위년(1388) 9월 右常侍 許應 등이 상소하였다.…‘근간에 사헌부와 판도사·전법사가 번갈아 상소하여 선왕의 균전제도를 회복하도록 청하자 전하께서 이에 따라 윤허하시니, 사방에서 듣고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직 巨家世族의 겸병자들이 불편하다 하여 시끄러이 많은 말로 뭇 사람의 귀를 혼란시키자, 사대부로서 전지를 가진 자들이 한 때 이에 성세를 같이하더니, 이윽고 宗廟·社稷·道殿·神祠·功臣田과 登科田에 대해서는 공수하지 않기로 하자는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신 등은 여기에는 필시 폐법의 끄트머리를 일으켜 세우려고 唱導하는 자가 있는 것이라 여겼더니, 며칠 되지 않아 과연 (사전조를) 절반만 공수한다는 명이 내려졌습니다.…국가의 공전을 공도 없으면서 좌식하는 자에게 주어 가지게 한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뭇사람의 번거로이 떠드는 소리는 버려두고, 균전의 구제를 회복하여 군국의 수용이 모두 여유가 있고 사대부가 수전하지 않는 자가 없이 된다면 국가가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6. 창왕이 드디어 사전조 반수의 명령을 폐기하였다.0020)이 문단은 F-5 기사에 바로 이어져 있는 것이지만,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이와 같이 단락을 나누어 살피기로 한다.

사료 F-5에 보이는 대로 사헌부 등에서 발의한 균전제도 회복의 상소에 따라 창왕이 윤허하였다는 사실은 곧 이 해 7월의 F-1, 2 등의 주장을 창왕이 그대로 따라 F-3에 나온 대로 6도의 양전을 결행하면서 동시에 사전조에 대한 공수를 단행키로 결정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종래의 사전제도는 이미 폐법이 되어버린 것으로 사료의 문면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종래 조업전으로 보전되어 온 사전의 내용이 분해되어 그 실체가 없어져버리는 것이므로,「거가세족의 겸병자」들은 여타 사전소유 사대부들의 성원을 얻어 사전을 보전하기 위한 반격적 책동을 일으키고 나섰다. 이에 따라 우선 종묘전 이하 등과전에 대해서는 공수하지 않기로 한다는 조처가 있게 되었으며, 다음으로는 사전 일반에 대해서도 전조의 절반만을 公收한다는 명령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전의 전조 절반을 공수하는데 그쳐서는 개혁파가 추진하는 사전개혁이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가 되어온 사전은 국가의 공적 관리를 벗어나 조업전임을 내세우면서 수조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는데, 비록 절반 정도로나마 그 수조권을 그냥 보유하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곧 전주의 수조권적 토지지배관계를 다시 공인해 주는 결과로 되는 것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양전을 통하여 토지의 정당한 소유자를 점검 확인하는 일, 공전·사전 전체에 대하여 일체로 전조를 공수함으로써 조업전으로서의 사전의 田主權을 일단 해체시키고 모두를 국가 수조지로 확보하는 일, 그리고 양전이 끝난 후 새로운 급전법에 따라 응분의 유자격자에게 수조지를 새로이 절급하는 일,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실현하지 않고서는 문제의 사전은 결코 혁파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사류는 권문세족 등이 획책하는 사전의 전주권 보유운동을 다시 반격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국가의 공전을 공도 없으면서 좌식하는 자에게 주어 가지게 한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므로, 무엇보다도 군국의 수용을 여유있게 하고 국사에 복무하는 유자격의 사류가 응분의 토지를 절급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나갔던 것이다.

그 같은 개혁파의 압력에 따라 국가가 사전조를 절반만 수취하도록 추진해가던 획책을 권문세족들도 여기서 다시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료 F-4에서 ‘사전조의 절반만을 공수’하기로 한다는 명령을 내린 지 한달만에 창왕은 다시 그것을 번복하여 사전조 반수의 명령을 폐기(F-6)한다는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개혁파의 주장대로 공·사전 일체에 대한 전조를 전부 공수한다는 방침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0021)종래의 연구 가운데에는 사료 F-6을 ‘사전조를 전면 公收하려던 원래의 개혁안을 완전히 폐기한다’는 뜻으로 해석한 경우가 있다(李相佰,≪李相佰著作集≫, 乙酉文化社, 1978, 194쪽 및 李成茂,≪朝鮮初期 兩班硏究≫, 一潮閣, 1980, 297쪽의 주 131 참조). 그러나 이는 사전조 반수의 명령(F-4)을 폐기한 것이므로, 사전조 전부를 공수하기로 확정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권문세족이 사전을 보전하고자 하는 노력은 이로써 그치지 아니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법에 따라 새로이 급전하기 위해 양전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사전의 전조를 일체 공수한다는 것은 실상 일체의 조업전적 사전을 혁파하고자 하는 것이었던 만큼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그만큼 집요할 수밖에 없었다. 양전과 사전조의 전면 공수를 추진한 지 1년이 지난 뒤에도 그 같은 반발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의 글들에서 볼 수 있다.

G-1. 신창 원년(1389) 8월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였다. ‘…하늘이 국가를 도와 聖神한 임금을 탄생시켜 曠世의 적폐를 벗겨내니, (사전의) 복구와 혁파에 관한 이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世臣巨室은 오히려 폐풍을 답습하여, 本朝가 날로 어려워져 반드시 工·商으로 내닫게 될 것이라고 서로 충동하면서 浮言으로 뭇 사람의 귀를 현혹시킴으로써 사전을 복구하여 부귀를 보전해 가고자 합니다.…가만히 이르건대 경기의 토지로는 마땅히 사대부로서 왕실을 옹위하는 자들의 전지로 삼아 資生케 함으로써 그 생업을 후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혁거하여 供上과 祭祀의 수용에 충당하여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넉넉히 할 것이며, 겸병과 쟁송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 無彊히 아름다운 제도를 정할 일입니다’(≪高麗史≫권 78, 志 33, 食貨 1, 田制 祿科田).

2. 공양왕 원년(1389) 12월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였다. ‘상평·의창의 법은 구황의 長策이니…국가를 운용하는 자가 마땅히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지난해에는 한여름에 군사를 일으켰고 거기다 왜구까지 더하였으므로, 耕種에 시기를 놓치고 수확에 節候를 잃었습니다. 금년은 또 수재를 입어 동남지역 군현들이 쓸쓸히 赤立의 상태에 있으니, 구황의 계책을 생각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가 이미 사전을 혁파하였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축적이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군현마다 상평창을 설치하도록 하되, 풍년·흉년에 그것을 거두어 들이고 나누어주는 법은 한결같이 근일 도평의사사에서 아뢴 대로 할 일입니다. 듣건대 양광도는 이미 상평창을 설치했다고 하니, 마땅히 각 도에서도 이에 따라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먼저 사료 G-1을 보면, 우상시 허응 등 개혁파들이 적극적으로 사전조를 전면 공수키로 확정하고 난 뒤로도 세신거실들의 사전 보전 책동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본조의 成法에 따라 운용되어 온 사전은 그만큼 오랜 내력을 가진 것이었으며, 그 전주들 또한 정치·사회적 실권을 오래 운용해온 권문세족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루 아침에 혁파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전의 개혁은 명분이 있는 국가적 사업이었으며 또한 개혁파들은 현실적으로 실권을 쥐고 있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사전의 개혁은 개혁파 사류로서는 정치적 결단을 통한 승패를 가름짓는 대사업이었기 때문에 결코 후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같은 사정은 “얼마 안있어 세신거실들이 浮動해 말하여 (사전을) 복구하려고 하자, 조준이 다시 상소하여 이를 논하고 諫官 吳思忠·李舒·李立尊 등 또한 (사전을) 복구해서는 안된다고 상소하여 굳게 주장하자 (이성계가) 이에 따랐다”0022)≪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에 보이는 이 구절이 반드시 창왕 원년 8월의 기사(사료 G-1)와 직접 관계되는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전 개혁과정의 정황으로 보아 이른바 조준의 2차상소(G-2)와 열전의 이 대목은 맞물려 있다. 또 2차상소인 까닭에 열전에서는 “浚又上疏論之”로 표현한 듯하고, 열전의 “世臣巨室 浮動言 欲復之”라는 구절이 사료 G-1에서는 “世臣巨室 … 相與胥動浮言 … 欲復私田” 등으로 부연 서술되어 있는 듯하다.고 하는 당시의 관련 기록에서도 살필 수 있다. 개혁파와 臺諫들은 동시에 상소운동을 벌여 여론을 환기시켜 가면서 권문세족의 사전 복구책동을 반박하고 나섰던 것이다.0023)앞서 새로운 量田을 단행하기 위하여 각 도의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로 고쳐 파견할 때에도 臺諫의 추천을 받아 임용하였다는 사실(E-2)이 참조된다. 그리고 그들은 경기지역에는 供上·軍需 등의 국용 및 朝官들의 수조지 이외에는 사전을 전혀 설정치 않는다는 구체적인 개혁안까지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해갔다.

한편 사료 G-2에서 ‘국가가 이미 사전을 혁파하였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축적이 궁핍하게 되었으니, 이제 常平倉을 세워 구황의 방편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한 내용이 주목된다. 전년도에 사전의 혁파를 위한 양전과 사전조의 공수를 결행한다는 방침을 세워 추진했다는 사실은 사료상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그것의 구체적 진전사실에 관련된 기록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1년이 지난 뒤의 이 상소(G-2)를 보면 사전은 이미 혁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사이에 무엇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곧 전년(창왕 즉위년) 8월에 6도의 양전을 시작하고(E-2) 이어서 우여곡절 끝에 그 9월에는 사전조를 공수키로 확정하였는데(F-6), 그 1년이 지난 이 해(1389) 12월 당시로서는 양전과 공전조 공수라고 하는 두 가지 일이 계획대로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전이 이제 혁파된 상태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리고 사전이 혁파된 후 각 곳 민간의 축적이 모두 궁핍해져 있었다는 사실 또한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이 해에는 흉년이 들었으므로 축적이 모자라기도 하였겠지만, 한편으로는 사전의 전조를 모두 공수하였기 때문에 私穀의 여유가 없어져 더욱 축적이 궁핍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고려시대에는 양반 등 호강자의 私穀이 다시 長利 따위를 통하여 토지를 겸병하는 재원으로 활용되었으며,0024)명종 18년 3월 制를 내리되 “각 곳의 부강한 兩班은 빈약한 백성들이 賖貸를 갚지 않는다 하여 古來의 丁田을 劫奪하니 이 때문에 산업을 잃고 더욱 가난해 진다”고 하였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공민왕 5년 6월 敎에 “富戶는 稱貸取息하되 利中生利하여 빈민은 아침에 저녁 일을 도모할 수도 없어 子女를 典賣하니 심히 애처롭다”고 하였다(위와 같음). 또한 그 사곡에 의존함으로써 오히려 가난한 농민들의 연명과 생업의 재생산활동이 가능한 것으로 구조화되어 있었다.0025)(공민왕) 11년 밀직제학 白文寶가 箚子를 올려 “빈민은 해마다 數畝를 경작하는데 租稅가 절반이나 되는 까닭에 그 해를 넘기지 못하여 양식이 궁핍해지니, 명년 농사철에는 富戶의 곡식을 빌려서 種子와 農食을 마련한다. 지금 관리들은 民患을 걱정치 않고 富民이 함부로 貸穀하여 利息 취하는 일을 금지하는데, 이후로는 부민들이 貸穀을 넉넉히 하되 예에 따라 子母停息케 하도록 권하기로 하자”고 하였다(위와 같음). 고려 때 뿐 아니라 전근대에서 이른바 私債로 불리우는 장리는 농민 일반의 재생산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제약조건이자 보충수단으로 항구화하고 있었다. “빈민이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사채가 있기 때문이다. 세종도 일찍이 혁파해 버리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사채는 혁파해서는 안되는 것이다”(≪成宗實錄≫권 104, 성종 10년 5월 임신). 그런데 이제 전년도부터의 사전조 공수에 따라 그 같은 호강자의 사곡에 여유가 있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민간의 축적이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사전조까지 공수한 결과 官穀에는 다소의 여유가 생기게 되었으므로, 농민의 재생산활동을 보충하는 관곡 대여제도로서 상평창의 설치를 건의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0026)실상 이 때 설치된 것은 常平倉이 아니라 義倉이었다(≪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및 권 117, 列傳 30, 成石璘). 의창이 조선 일대의 환곡제도로 계승된 것은 물론이지만, 농업생산력이 일정 발전단계에 이르러서야 소농민들의 재생산 보족장치가 長利 따위 개인의 사적 보호장치보다도 환곡과 같은 국가의 공적 보호제도 중심으로 전환한다는 사실 또한 유의할 만한 사실이다.

양전과 사전조의 공수를 통한 사전의 개혁에 착수한 지 1년만에 그 사업은 착실하게 수행되어 갔다. 그것은 사전 복구론자들의 방해책동을 배격하면서 경기지역 토지의 새로운 지배관계의 설정 논의(G-1)에서도 읽을 수 있고, 사전에 대한 국가의 公收를 실현함으로써 사전을 사실상 혁파함은 물론 그로써 확보한 公穀을 활용하여 국가가 직접 소농민의 재생산과정을 보호한다는 제도의 수립 논의(G-2)에서도 확인된다.

개혁파는 창왕 원년(1389) 9월 현재로 이른바 양반전을 받을 자격을 확실히 가진 관인들을 종실, 문반, 무반, 그리고 前銜 각 품의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 각기 宗簿司, 典理司, 軍簿司, 그리고 개성부에서 그 자격 여부를 심사 선택하도록 하였다.0027)≪高麗史≫권 137, 列傳 50, 辛禑.

이제 사전의 혁파는 물론이요, 새로운 토지 절급에 관한 법안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무자격자일지라도 조업전임을 증빙하는 문권을 가지고 국가 법제의 보호를 받으면서 1,000결, 100결씩이나 되는 대규모 사전의 전조를 취식하던 사전은 이미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개혁파는 마침내 이 해 11월에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하기에 이르렀다.0028)昌王은 舊臣들의 의사에 끌려 개혁파의 주장을 잘 따르지 않았으므로 우유부단한 성격의 공양왕을 옹립하여 괴뢰로 삼았다는 견해가 있다(≪李相佰著作集≫제2권, 92쪽). 공양왕을 옹립한 직후 조준 등은 전제개혁에 관한 이른바 3차 상소를 올렸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0029)≪高麗史≫권 78, 志 33, 食貨 1, 田制 祿科田.

첫째, 거경관인의 사전은 경기지역에 한해서만 절급한다는 원clr을 다시 확인하여 강조하는 한편, 여타 지역의 토지는 대개 국가수조지로 확보하되 다만 거기에도 각지의 유력한 군사들에게 절급할 군전의 설정은 허용한다는 원칙을 표명하였다.「사전 경기의 원칙」이 강조되었던 것은, 전통적으로 고려의 사전이 주로 외방에 설치되었고 이를 매개로 하여 간활한 호강들이 토지 겸병을 자행하여 왔으므로, 새로운 수조지로서의 사전을 절급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소유권과 수조권을 겸유한 종래와 마찬가지의 사전으로 확보되며 겸병의 근거지로 활용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혹 거기에 다시 조업전적 사전으로 복구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군전의 경우는 대부분 외방 거주자인 군사들에게는 그것을 당연히 자기 거주지에다 절급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합리적인 토지제도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군전은 직역전이라기 보다는 외방에 거주하는 품관 따위 유력한 군사요원들의 우대를 위해 설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전년도 이래 추진해 온 소위 기사양전이 이 때에 이르러 일단 완료되었으며, 그 결과 확보한 6道의 結總이 50만 결 가량인데, 이를 국가 재정의 용도별로 분속시키는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즉 供上을 위해서는 3만 결을 4庫에, 국용을 위해서는 10만 결을 우창 즉 豊儲倉에 분속시키고,0030)사료 G-2에서는 우창 즉 풍저창에 분속시킨 10만 결을 공상용으로 표기하였다. 풍저창은 “국가는 풍저창을 설치하고 무릇 祭祀·賓客·田役·喪荒의 용도가 다 여기에서 나오니, 이를 일러서 國用이라 한다”(≪朝鮮經國典≫賦典 國用)는 것과 같이 국용을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국용은 국왕이 직접 혹은 국왕의 명으로 거행하는 제사·손님 접대·수렵, 그리고 구황 따위의 용도를 말한다(≪周禮≫天官冢宰 小宰 참조). 전근대 유교적 지배이념에서 국용과 공상의 구분이 애매한 대표적 사례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백관의 녹봉을 위해 10만 결을 좌창 즉 廣興倉에 귀속케 하였으며, 또 중앙 거주 관인층에게는 경기의 토지 10만 결을 절급하기로, 그리고 나머지 17만 결은 軍人·津尺·院主·驛·寺院田과 향리의 외역전 및 지방관의 廩給·衙祿田으로 절급한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제1차 상소에서 특히 강조되었던 토지국유의 이념이 3차 상소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거기서는 국가기관의 운용을 담당한 당직자에게 절급하는 직전의 형태라든가, 혹은 국가의 직역자에 대한 직역전 위주의 토지절급이 우선시되고 있었다. 가령 국가 직역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군역의 경우 담당자의 ‘才藝를 시험하여 주는데 20세에 수전하고 60세에 반납한다’0031)≪高麗史≫권 118, 列傳 31, 趙浚.고 설정한 것이 그 같은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이 3차 상소에서는 군전을 외방에 설치한다는 원칙만을 표방하였을 뿐, 그것을 철저히 직역전으로 절급한다는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군전은 과전법체제하에서 군역과는 무관하게 외방 각지의 유력자인 閑良官吏層을 신분적으로 우대하는 성격을 띤 것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0032)이 사실은 당해 항목에서 설명하기로 하겠다.

조준의 1차 상소와 3차 상소 사이의 시간적 차이는 불과 1년 반 정도인데 그 사이에 어떠한 연유가 있어서 토지국유의 이념이 그렇게 퇴색되었던 것인가. 이는 개혁파의 새로운 집권에 따라 한때 고조되었던 개혁의 열기가 어디까지나 소유권 위주라고 하는 토지 지배관계의 현실적 관행에 부딪쳐 점차 원래의 이념으로부터 변질된 결과로 이해된다.

그런데 비록 토지국유의 이념을 관철시킬 수는 없었지만, 세신거실들의 유언과 선동을 통한 집요한 책동에도 불구하고 개혁파는 사전경기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전제개혁의 골격을 다듬어가고 있었다. 바로 다음 달인 공양왕 2년(1390) 정월에는 각 품 관인에 대하여 田籍을 나누어 주기에 이르렀다.0033)≪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종래의 공사 전적을 모두 수도의 시가에 모아서 불태우고 말았다.003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공양왕 2년 9월. 이 때 불태워 없앤 전적은 물론 기사양전을 통하여 정당한 소유관계를 확인받아 새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구래의 공·사 전적이었다. 그것을 모두 불태움으로써 개혁파는 지난날의 토지지배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대신,0035)“僞辛逆亂之徒와 喪田失職之輩가 (공양왕의) 좌우에 늘어붙어서 流言으로 浸潤케 하여 殿下(이성계)를 가리켜 權勢가 重하다 하고 臣 등이 朋黨을 한다고 무함하였다”는 뒷날 조준의 상소(≪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2월 임술)를 보면 이 때 舊來의 私田을 빼앗기고 職役을 잃은 권문세족의 동향이 짐작된다. 기사양전에서 정당한 소유권을 가진 것으로 확인된 토지에 대해서만 그 소유권을 인정하며, 또한 이번의 전제개혁 과정에서 새로 절급하는 토지에 대해서만 그 수조권 혹은 면조권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0036)따라서 공양왕 2년(庚午, 1390) 이후 구래 私田租의 公收 조처도 폐지되었을 것이다. 이 전제개혁의 결과 정립된 과전법 조문에, “경오년(공양왕 2년, 1390) 이전의 공·사 전적은 모두 불태워 없앴으니, 감히 그것을 私藏하는 자는 국법을 훼손한 이로 논하고 재산은 적몰한다”003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科田法.는 규정을 둔 사실이 곧 그것을 말한다.

이로써 고려를 지탱하는 토지제도로 운용되어 온 사전은 여기서 일단 모두 혁파되었던 것이다.0038)고려의 私田은 개혁파 사류의 상소에 나타난 바와 같이 국가의 토지제도를 완전히 벗어난, 그야말로 모든 사회적 화란의 원흉이었다고만은 생각할 수 없다. 적어도 한 왕조의 기본적 토지제도로서 일정 기간동안 제도적으로 운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것의 실체는 좀더 다른 각도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결국 기사양전과 경오년 공·사 전적의 燒毁는 고려말 사전개혁의 획기를 이루는 일이었고, 이미 중앙의 관인들에게 관품에 따라 토지를 절급하고(G-3) 또 구래의 공·사 전적을 모두 불태워 지난날의 사전지배의 근거를 박탈한 다음, 개혁파 사류는 다시 외방의 토지를 각 기관에 분속시키고 각 職役人에게 절급하는 절차를 취하였다. 즉 외방의 토지를 가지고서 지방관 및 지방 각 기관의 직역자에 대한 수조지를 절급하는 한편, 국용 및 녹봉을 위한 국고수조지로 분속하였던 것이다.0039)≪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2년 11월 계묘. 그리고 다음 해인 공양왕 3년(1391) 5월에는 그 동안 추진해 온 전제개혁의 내용을 과전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하였다.004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이미 그 시행 절차를 면밀하게 준비해오던 터이었으므로, 과전법은 공포된 즉시부터 효력을 발생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392년에 조선이 개창되고서도 과전법은 신왕조의 기본 토지법제로 존속되었다. 조선의 개창 직후 중외의 대소 신료·한량·耆老·軍民에게 내린 태조의 교서에 “田法은 일체 전조의 제도를 따르되, 만약 損益할 것이 있으면 主掌官이 논의하여 申聞한 후 시행하라”0041)≪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고 하였다는 조처가 그것이다. 그리고 과전법은 다소의 변질을 거치면서도 조선 초기의 기본 토지제도로서 한동안 운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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