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3) 전세제도의 개편
  • (2) 공법 전세제로의 개편

(2) 공법 전세제로의 개편

잘 알려져 있듯이 ‘貢法’이란 원래 여러 해 동안의 토지생산량의 평균치를 기준으로 잡아 1/10에 해당하는 일정한 액수를 과세하는 일종의 정액세법으로서 중국의 夏后氏 때 행하였다는 전설적인 제도이다. 조선 초기에는 답험손실제에서 만연해 온 인간의 자의성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해서 정액세법을 정립코자 노력한 결과, 비록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정액세법의 원리가 다소 도입된 전세제도를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착안할 당시부터 이미 貢法이란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貢法田稅制0136)과전법에서는 租와 稅를 구분하여 사용하였으나, 그것은 私田의 경우에 엄격히 적용되는 술어였다. 여기 공법은 사전의 1/3이 下三道로 이급된 상태에서, 더구나 私田의 답험손실권을 국가로 귀속시킴으로써 개인의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관행이 크게 퇴조한 상태에서 토지의 경작·소유자와 국가와의 수취관계를 새로이 규정하는 것이었으므로, 과전법에서「租」의 개념에 해당하는 稅目을 일찍부터「稅」라고도 칭하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공법 수세제다운 방식을 게문한≪世宗實錄≫10년 정월 기해조의 “農事豊歉 分爲三等以聞 因之收稅可矣”에 보이는 ‘稅’, 또한 최초의 정액세법으로서의 공법의 형태를 갖추어 공표한 19년 7월 丁酉條의 이른바 詳定貢法 節目의 “以各道與田品之等第 定收稅之數”라는 데서 나타난 ‘稅’, 그리고 田制詳定所가 확정한 공법의 원리를 설명한 세종 26년 11월 戊子條의 “一結五十七畝收稅 亦依此二十分而稅一 上上年一等田稅 三十斗”라는 표현, 특히 공법을 확정 반포한 후 收稅 방법의 과도기적 변통을 규정한 세종 27년 7월 乙酉條의 “京中各司及外方田稅貢案 其道田品 畢分揀後 以九等年 田稅多寡 更加磨勘成籍”이라고 하여 ‘田稅’를 독립술어로 사용하게 된 사실 등을 참조할 것이다. 그런데도 ‘조’와 ‘세’는 한동안 혼용되다가 이윽고 ‘稅’ 혹은 ‘田稅’라는 말로 관행되어 갔다. ‘田稅’라는 술어는 특히 공법의 성립 이후에 관용된 말이다. 또한 貢法 節目의 논의 과정에서는 수조권자가 아닌 ‘佃客’ 즉 納稅者=소유자를 ‘田主’라고 표기하고도 있음이 주목된다(≪世宗實錄≫권 78, 세종 19년 7월 정유).는 세종의 즉위 초부터 구상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21년(1439)에 국왕이 “내가 공법을 시행하고자 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 20여 년이 된다”0137)≪世宗實錄≫권 85, 세종 21년 5월 경인.고 토로하고 있음에서 그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종 9년(1427)의 重試의 策題에서 공법의 구상을 표면화시켜 試問한 것이 사료에 처음 보인다.

예로부터 제왕이 (나라를) 다스림에는 반드시 일대의 제도를 먼저 수립하는 법이다.…손실답험은 구차히 愛憎에 좇아 高下가 그 손에 달려 있으므로 백성이 해를 입는다. 이 폐단을 구하려면 응당 공법이나 助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조법은 반드시 井田을 한 뒤라야 행할 수 있으므로 역대 중국에서도 오히려 불가능했다. 하물며 우리 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언덕과 진펄이 뒤섞여 있어 그것을 쓸 수 없음이 명백하다. 공법은 夏書에 실려 있고 周나라 역시 조법을 썼다고 하나 鄕遂에서는 공법을 썼다. 다만 그것은 여러 해 (작황을) 비교하여 平常値를 정하는 까닭에 좋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다. 공법을 쓰면서도 이른 바 좋지 않다는 점을 없애는 길은 어떠한 것인가(≪世宗實錄≫권 35, 세종 9년 3월 갑진).

여기서 ‘좋지 않다’고 하는 측면은 공법이 정액제이므로 농업생산이 불안정한 당시로서 풍년에는 관계없지만 흉년에는 정액에 구애되어 반드시 과도한 수탈이 자행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여기서는 답험손실제가 안고 있는 인습적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서 결국 유교 경전에서 이상적 제도의 하나로 간주되는 공법을 개선하여 새로운 일대의 제도를 수립하고자 하였음이 주목된다. 고전에 제시된 이상을 살려 제왕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후 공법의 논의는 진척되어 갔다. 重試로부터 10개월 후인 세종 10년(1428) 정월에는 국왕이 질문에 대하여 좌의정 黃喜는 “공법을 따르되 수확의 다소를 비교하여 전지 몇 負에는 米 몇 두인지 미리 그 액수를 정해두고, 해마다 가을이면 각 도 각 군현으로 하여금 농사의 풍흉을 審檢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啓聞토록 하여, 거기에 따라 세를 징수함이 좋다”고 하였으며, 호조판서 安純 등도 역시 “그 밖에는 다시 다른 길이 없다”고 하였다.0138)≪世宗實錄≫권 39, 세종 10년 정월 기해.

세종 12년(1430)에는 다시 호조가 제의한 “지금부터 공법에 의거하여 전 1결마다 10두(평안·함길도는 7두)를 정액세로 징수”하는 방안을 국왕이 6조·각사 및 경중의 전함 품관, 각 도 감사·수령·품관으로부터 閭閻의 소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가부를 물어서 계문토록 하였다.0139)≪世宗實錄≫권 47, 세종 12년 3월 을사. 그 결과 전국적으로 공법의 시행을 찬성하는 자가 관민 98,657인이며 반대하는 자는 관민 74,149인이었다. 그 가운데 토지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경상·전라 양도의 경우 65,864 대 664로 찬성편이 절대 우세하였으며, 반면 함길·평안 양도의 경우는 1,410 대 35,912로 반대편이 절대 우세하였다. 그리고 특히 현직의 大臣을 비롯하여 다수의 전·현직 고위 관료가 반대하는 편이었다.0140)≪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무인.

공법의 논의는 다시 진전되어 세종 18년(1436) 윤 6월에는 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여기서 공법을 전담하여 추진토록 하였는데, 여러 논의를 거쳐 다음 해에는 이른바「詳定貢法」을 일단 수립하였다. 7개조로 되어 있는 그 절목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0141)≪世宗實錄≫권 78, 세종 19년 7월 정유.

土品에 따라 전국을 3등도로 구분하고 다시 각 등도를 종래의 전품에 따라 3등전으로 구분하되 수세액을 아래와 같이 정한다.

구    분 상전 1결 중전 1결 하전 1결
上等道(경상·전라·충청)
中等道(경기·강원·황해)
下等道(함길·평안)
20두
18두
15두
18두
16두
14두
16두
14두
12두

전분의 등급과 연분의 등급이 더 세분화된 이 상정공법은 세종 19년(1437)부터 전국에 시행하기로 하였으나, 각 지방의 관원들이 그 시행의 불가함을 역설하는 상소가 거세게 들어오고 사간원을 비롯한 여론의 반대가 심하여 결국 그 시행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0142)金泰永, 앞의 책, 273∼276쪽. 그러나 다음 해인 세종 20년(1438)에는 토지생산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경상·전라도에서 우선 시험삼아 시행키로 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충청도에서도 시행키로 하였으며, 그 뒤로도 상정공법의 미진한 조항들을 계속 수정 보완하여 나갔다.

나아가 세종 25년(1443)에는 5등의 전품제, 9등의 연분제, 그리고 결부제 대신 頃畝制로 고쳐 양전하는 법 등을 골자로 하는「更定貢法」을 수립하였는데, 이 때 양전의 근거 척도로서 종래의 指尺 대신 周尺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 많은 실험과 논의를 거친 끝에 세종 26년(1444)에는 드디어 결부제에 의거하는 전분 6등, 연분 9등의 공법을 확정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0143)공법의 전체 절목과 그 원리는≪世宗實錄≫권 106, 세종 26년 11월 무자조 참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金泰永, 앞의 책, 306∼312쪽 참조.

① 6등전 각 1결의 양전척(尺·寸·分)과 그 실적은 아래와 같다.0144)각 등전 1결의 실적을 尺貫法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단위:坪)

제1등전 제2등전 제3등전 제4등전 제5등전 제6등전
2,753.1
2,986.6
3,246.7
3,513.2
3,931.9
4,259.8
4,723.5
5,423.0
6,897.3
7,466.5
11,035.5
11,946.4


위의 수치는 朴時亨의 논문에, 아래 수치는 朴興秀,<李朝尺度에 관한 硏究>(≪大東文化硏究≫4, 1967)에 제시된 것이다. 양자간의 차이는 周尺 1尺의 길이를 20㎝ 전후로 서로 달리 잡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제1등전 제2등전 제3등전 제4등전 제5등전 제6등전
4·7·7 5·1·8 5·7 6·4·3 7·5·5 9·5·5
38畝 44畝 7分 54畝 2分 69畝 95畝 152畝

② 수세는 소출의 1/20로 한다. 9등연분제에 의거한 각 등전 1결의 전세는 아래와 같다.

상상년 상중년 상하년 중상년 중중년 중하년 하상년 하중년 하하년
20두 18두 16두 14두 12두 10두 8두 6두 4두

③ 각 도의 감사는 그 관하 각 군현이 審定한 연분을 보고하되, 각 군현 단위로 종합하여 10분을 기준으로 全實을 상상년, 9分實을 상중년…2분실을 하하년으로 잡아 수전과 한전을 각기 年分等第하여 某縣의 수전은 某等年이며 한전은 某等年이라고 啓聞한다. 1분실은 면세한다.

④ 正田 내의 진황전은 모두 매년 可耕之地인데 혹 전지를 많이 점유한 까닭에 번갈아 진황시키거나 혹은 게을러서 경작하지 않는 까닭에 전지가 많이 진황되니 심히 불가한 일이다. 부분 陳田이나 全陳田 모두 수세한다.

⑤ 續田 내의 진황전은 수령이 경작자의 告狀을 받아 親審한 후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 首領官이 다시 그 수를 사실대로 조사한 후 啓聞하여 면세토록 한다.

⑥ 災傷田의 경우 片斷災傷을 제외하고 뭇 사람이 다 아는 連伏 10결 이상의 全損田은 수령이 친심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啓聞한 후 다시 敬差官을 파견 조사하여 재상의 분수를 계문하고 王旨를 받아 감세한다.

즉 공법은 각 군현 단위로 수전·한전별로 연분을 단일하게 책정함으로써 일종의 지역단위 比定法的 정액세법의 원리를 도입하게 된 것이었다. 이른바 중간부정이 많이 줄어들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그리고 正田이나 續田을 막론하고 이제 진황은 용납되기가, 災傷田은 감세받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권농정책이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것이지만, 당시의 생산력 수준으로 그것은 결국 농민의 유망을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損實수조시의 각 등 전결과 특히 종래 넓은 면적으로 책정되었던 山田들이 공법에서는 어떻게 편성되었는가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0145)특히 山田은 이제까지의 공법 논의에서 전혀 도외시되어온 편인데, 공법의 확정 후 다음 해 7월에 가서야 6等田制 속으로 편성되었다(≪世宗實錄≫권 109, 세종 27년 7월 을유). 이에 관한 설명은 金泰永, 앞의 책, 310∼31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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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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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래 전국 전지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하등의 많은 전지가 제1·2·3등전으로 편입되고, 종래 넓었던 結積의 산전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결적의 제5·6등전으로 편성됨에 따라, 결국 전체적으로 결의 실적을 축소시킴으로써 전국의 결총을 대폭적으로 증대시켰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손실수조시의 1/10조로서의 결당 최고 30두에 비하여 공법에서는 1/20조로서 결당 최고 20두를 규정하였다는 것은 사실 그대로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공법의 시험적 실시를 통해서도 수세액이 대폭 증대하는 결과로 나타났음은 객관적 사실로 판명되었다.0146)≪世宗實錄≫권 105, 세종 26년 8월 경오. 그리고 그 일차적 원인은 공법의 정립 과정에서 기준 토지생산량을 과다하게 책정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0147)세종 25년부터 충청도 淸安에서 실험한 기준 토지생산액은 57畝地(구 下等田 1結의 實積)에서 上上年 제1등전의 所出은 米 40石(벼 80석), 제6등전의 그것은 米 10石으로 산정되었는데, 이를 종래의 損實收租時의 평상 소출과 비교해보면 過多한 산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세종 자신도 이것이 다소 과다한 산정인 듯하다고 이해하였다(≪世宗實錄≫권 105, 세종 26년 8월 경오). 이 기준 생산량의 과다한 산정이야말로 공법의 시행과정에서 年分이 결국 下下로 떨어져 가는 궁극의 원인이 아니었던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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