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3) 전세제도의 개편
  • (3) 공법전세제의 전개

(3) 공법전세제의 전개

공법은 새로운 기준에 따라 전분을 6등급으로 세분하는 한편 새로운 척도에 의거하는 양전을 통하여 각 전등의 전결을 파악한 다음에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처음의 의도보다는 시행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세종 26년(1444) 공법의 확정으로부터 많은 논란과 수정을 거쳐 45년이나 지난 성종 20년(1489)에 가서야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그 경과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0148)金泰永, 앞의 책, 314∼321쪽.
전라도의 경우 전품의 분등만을 먼저 끝낸 내용을 가지고 옛 田結을 환산하여 공법을 적용한 것이므로 새로운 양전에 앞서 공법이 시행되었다.

지 역 공법에 의거한 양전 공법의 실시
전 라 도
경 기 도
충 청 도
경 상 도
황 해 도
강 원 도
평 안 도
함 경 도
세조 8년(1462)
세조 7년(1461)
세조 8년(1462)
세조 9년(1463)
성종 2년(1471)
성종 7년(1476)
성종 17년(1486)
성종 19년∼20년(1488∼89)
세종 32년(1450)
세조 7년(1461)
세조 8년(1462)
세조 9년(1463)
성종 2년(1471)
성종 9년(1478) 무렵
성종 18년(1487)
성종 20년(1489)

<표 4>공법 시행 경과표

공법에서의 6등 전품의 분등과 거기 따른 수등이척의 양전은 원리상으로는 보다 더 객관적 타당성을 띠게 된 것이 틀림없지만, 그 절차에 層節이 많고 까다로와졌기 때문에, 착오라든가 중간 농간이 개입할 여지가 많았다. 가령 공법을 시행한 후 처음으로 실시된 전라도 양전(성종 24년, 1493)의 경우를 보면, “한 군현의 전지가 혹 2, 3천 결이 늘고 한 州府의 전지는 혹 3, 4천 결이 늘어났으니, 그 작성된 전적을 살펴보면 명백히 알 수 있는 일”0149)≪成宗實錄≫권 293, 성종 25년 8월 신사.이라는 정도로 실착이 커지고 있었다. 각 군현의 양안이 모두 다 冒濫하다는 논란이 일어나자, 성종 자신이 “비록 고쳐 바로잡더라도 폐단은 다시 여전할 것”0150)≪成宗實錄≫권 57, 성종 6년 7월 계유.이라고 자포자기할 정도로 양전은 개선의 전망이 없었다. 16세기 중종 때 양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의정부 3대신이 국왕에게 보고하는 다음의 말을 보면, 공법전세제에서도 양전은 크게 개선된 수준에서 운용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듣건대 양전의 일은 비록 최선을 다하려 하나 그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새 양안이) 오히려 전 양안만 같지 않으며, 또한 正案도 없다고 합니다(≪中宗實錄≫권 62, 중종 23년 7월 임오).

한편 공법에서는 권농책의 일환으로 陳田에 대한 면세 절차를 매우 까다롭게 규정해 두었다.≪經國大典≫에는 “全災傷田 및 全陳田은 면세하고 續田·加耕田은 기경하는 대로 수세한다”0151)≪經國大典≫권 2, 戶典 收稅.고 다소 고쳐졌지만, 실제로 면세의 절차가 매우 까다로왔으며 면세되기는 더욱 어려웠다. 가령 16세기 명종 때의 대사간 姜士弼은 당시 농민들이 유리도산하여 그 생명을 보존하지 못하는 세 가지 근본 요인으로서 군역 및 各司 選上과 함께 진전 수세에서의 一族 침해 현상을 들었다.

오래된 진전도 그 세를 감하지 않고 비록 유망하여 絶戶되거나 푸나무가 수풀을 이루어도 또한 반드시 一族切隣에게서 징렴한다.…농민으로서 기경하는 자가 겨우 數畝의 토지를 일구기가 무섭게 100결의 세를 독촉한다. 그러므로 호미를 메고 익히 바라보면서 땅을 일구려 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陳地가 점점 넓어져 끝없이 肅然하게 되었다(≪明宗實錄≫권 32, 명종 21년 5월 임인).

즉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설정된 진전 수세의 고식책은 오히려 전지의 진전화를 조장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한편 공법에서 災傷田은 앞서 살핀 대로 뭇 사람이 다 아는 連伏 10결 이상의 현저한 災損에 한하여, 그것도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고서야 감세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소농민일수록 재상을 입기 쉬운 척박한 조각땅을 경작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실이었으므로≪경국대전≫에서는 全災傷田은 면세하도록 고쳐 규정하였다. 그런데 재상을 인정해주는 給災의 실무가 현지의 吏胥들에게 맡겨져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가난한 소농민일수록 그 규정을 적용받기란 매우 어려웠다.

감사가 수령을 파견하여 답험하게 하면 수령은 災와 實을 돌보지도 않고 큰 길로 다니면서 委官에게 맡겨버리는데, 위관은 吏胥에게 맡기고 이서 또한 跋涉을 꺼려 여러 마을로 편히 다니면서 닭을 잡고 기장을 삶아 농민의 재물과 가축을 축낸다. 하물며 이서는 또 뇌물을 이롭게 여기므로 强猾한 자의 경우는 혹 實이라도 災로 매기고 貧賤한 자의 경우는 혹 災를 당해도 實로 매긴다(≪中宗實錄≫권 29, 중종 12년 8월 갑자).

즉 가난한 소농민의 조각땅은 재손을 인정받을 길이 거의 없었던 반면에 오히려 세력을 가진 토호 사족에게만 그 혜택이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공법은 처음에 각 군현 단위로 동일한 연분을 적용하기로 규정하였으나, 그것이 너무 소략하다 하여 많은 논란 끝에 단종 2년(1454) 이후 각 面 단위로 연분을 등제하는 법으로 고쳐졌다.0152)≪端宗實錄≫권 12, 단종 2년 8월 정미.

그 이후 9등연분제의 일반적 추세로 말하자면 15세기까지는 현지의 보고 보다도 중앙에서 한 등급 올려서 수세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연분이 점차 낮추어 등제되면서 드디어 전국이 대체로 下下의 연분으로 고착되어가는 경향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이는 민생이 날로 곤궁해지고 요역이 많았던 까닭에서라고 하는 바,0153)≪仁宗實錄≫권 2, 인종 원년 6월 임자.
≪宣祖實錄≫권 5, 선조 4년 11월 정축 및 권 17, 선조 16년 2월 무술.
그것은 곧 지주제의 확대에 따른 그리고 공납·군역 등 부역의 과중함에 따른 소농민경영의 불안정에서 기인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전국의 전세가 하하로 고착되는 것은 결국 지주사족에게 유리한 세율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전세제도의 측면에서 볼 때 조선 전기에 지주지를 보존하거나 혹은 확대해갈 수 있는 계층은 범주적으로는 지배층에 불과하였다. 신분제적 지배체제에 대응하는 신분제적 지주, 곧 양반지주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공법전세제는 양전·수조제에 고질적으로 수반되는 여러 폐단을 불식하기 위하여 여러 의견을 모아 마련한 것이며, 그것은 조선 초기에 성취된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하여 보완되고, 더구나 동시기의 안정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갔다. 그래서 그것은 당시에 있어서 비교적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닌 새로운 전세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시 현장에서는 그러한 객관적 타당성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원래의 법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의연 奸吏·鄕愿 따위의 중간세력층에 의하여 농단되는 좀 모호한 전세제로 운용되어 갔다.

그같은 모호한 수취제는 결과적으로 有勢層에 의한 지주제의 전개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운용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공법이 원래 의도하였던 국고의 증수를 실현하기가 어렵게 되어 갔음은 물론, 소농민 보호라고 하는 또 하나의 이상도 좀처럼 실현하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金泰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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