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2. 농업과 농업기술
  • 2) 농업생산력의 추계
  • (3) 노동생산성의 추계

(3) 노동생산성의 추계

앞에서 추계한 실제 경작면적 지수와 토지생산성 지수를 기초로 하여, 한국 농업에서 노동생산성의 흐름을 추계해 보자. 이 연구에서는 하야미(Y. Hayami)와 루텐(Rutten)이 사용한 공식에 따라 노동생산성을 추계하였다.0155)여기에서 Y=총산출량, L=농업노동력, A=토지라고 할 때, Y/L=노동생산성, A/L=(호당·구당) 실제 경작면적, Y/A=토지생산성으로 정의된다(Y. Hayami and V.W. Rutten, Agricultural Development:An International Perspective, The Johns Hopkins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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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에서는 앞서 추계한 호수 및 구수당 ‘실제 경작면적’ 지수와 ‘토지생산성’ 지수를 사용하여 추계한 두 종류의 노동생산성의 흐름을 추계하였다. 첫 번째의 사례(사례 1)는 토지생산성 지수에 ‘자연인구당’ 실제 경작면적 지수를 곱한 결과이고, 두 번째의 사례(사례 2)는 ‘자연호당’ 실제 경작면적 지수를 곱한 것이다. 이 두 사례를 평균한 노동생산성의 최종 추정치를 보면 노동생산성은 제2기에서 가장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점차 상승하였던 노동생산성은 제2기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고, 제3기 이후에는 점차 하락세를 보이다가 제4기부터 조금 증가하였다.

시기\구분 토지생산성지수 노 동 생 산 성 지 수
사례 1 사례 2 평 균
 제 1 기
① 8세기∼9세기
② 992∼1301년

11.4
16.0

58.0
116.4

57.4
115.7

57.7
116.1
 제 2 기
③ 1391∼1432년
④ 세종년간(1432)

94.0
72.4

127.7
103.8

152.6
117.1

140.2
110.5
 제 3 기
⑤ 淸安縣(1444)
⑥ 1444∼1543년

75.0
100.0

97.9
100.0

157.4
100.0

127.7
100.0
 제 4 기
⑦ 17세기 전
⑧ 18세기 전
⑨ 18세기 후
⑩ 19세기 전

75.0
119.7
125.9
142.5

83.4
98.4
102.7
114.0

55.8
83.0
85.0
97.2

69.6
90.7
93.9
105.6

<표 3>토지생산성과 노동생산성의 추이

(이호철, 앞의 책, 746·751쪽).

특히 이렇게 계산한 노동생산성과 토지생산성의 흐름을 서로 비교해 보자. 대체로 통일신라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제1기와 제2기에 이르기까지에는 노동생산성이 토지생산성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제3기에서는 비록 노동생산성이 토지생산성보다 조금 높았지만 서로 엇비슷한 추세를 보이다가, 제4기 초에 이르러 토지생산성이 노동생산성을 추월하였다. 이처럼 원래 월등하게 높았던 노동생산성은 제4기 초반에서부터 오히려 역전되어 토지생산성이 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조선 전기에 있어 농업생산성 발전은 상대적으로 토지생산성보다 노동생산성에 좀더 기초하고 있었으며, 그에 비해 토지생산성은 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농업생산력이 토지생산성보다 노동생산성에 더욱 기초하고 있었으며, 그 후 그와 같은 사정이 역전되었다는 사실은 조선 전기 농업생산력의 성격 규명에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른바 조선 초기에는 직영지적 농장경영에서 나타나는 노동생산성 위주의 대농법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지만, 16세기 말 이후부터는 점차 사정이 역전되어 토지생산성 위주의 소농법이 보다 우위를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상황변화는 임진왜란에 이르기까지 그리 강력하게 전개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적어도 토지생산성이 급속하게 증대된 18세기 전까지는 노동생산성이 여전히 사회적인 생산력을 대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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