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2. 농업과 농업기술
  • 3) 농업생산력 발달의 여러 요인
  • (1) 직접적인 요인

가. 농학의 발달

조선은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지방에 권농관을 파견하거나 지방관 및 농업경영자에 대한 기술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특히 농서의 편찬 및 보급이 활발하였다. 이 시대 봉건정부가 취한 정책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중국 농서를 수집·보급하여 중국의 선진 농법을 우리 것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 농업선진지역의 관행기술을 채록하여 농서로 편찬하여 보급하는 정책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전자를 중심으로 추진되었지만, 세종 8년(1429)의≪農事直說≫의 편찬과 더불어 점차 우리 실정에 맞는 우리 농서를 보급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중국의 선진농법을 흡수하기 위하여 중국 농서를 민간에 널리 보급시키려는 노력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시도되었다. 신흥 사족층에 의해 14세기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이러한 노력은 특히 충정왕 원년(1349)에 李嵒이 연경에서 구입한≪農桑輯要≫를 知陜州事 姜蓍가 간행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중국농서는≪농상집요≫와≪四時纂要≫가 대표적이다. 또한 태종 15년(1415)에는≪농상집요≫양잠편만을 韓尙德이 이두로 번역한≪養蠶經驗撮要≫가 간행되었고, 비록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지는 않으나≪농상집요≫를 이두로 초역한≪農書≫도 편찬되었다. 당시 정부가 중국농서를 통해 주로 참고하였던 기술은 秋耕, 早種, 蟲蝗對策, 養蠶方 등이었는데, 중앙관료나 지방관료들은 이를 표준으로 권농을 독려하고 농사를 지도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우리 농업은 결코 이들 중국 농서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이미 조선 전기의 농업에서는 중국과는 달리 ‘상경 농법의 확립’이란 커다란 생산력의 구조전환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정은 우리 실정에 알맞은 새로운 기술보급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청하였으며, 그러한 요구가 농학에까지 영향을 미쳐 새로운 우리 농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일찍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 농법의 발전과 우리의 기후와 토양조건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이제 중국 농서는 점차 그 이용 빈도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농상집요≫만은 여전히 널리 참고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각 처에서 점차 우리 농법과 농업환경에 알맞은 새로운 농서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적인 필요성은 곧바로 국가의 권농정책으로 이어져 1429년 최초의 관찬농서인≪農事直說≫이 편찬되었다. 이 농서는 먼저 우리 풍토에서 이미 실험이 끝난 선진지역 老農들의 관행 농법을 충분히 수집하여 편찬한 것인데, 정부는 이렇게 편찬된 농서를 농업 후진지역으로 보급시켜 선진 농법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선진 지역의 관행농법을 수집하는 조치로서 하3도의 이른바「耕種耘穫의 법」·「五穀의 土性所宜」·「雜穀交種의 방법」등을 수집하여 농학자 鄭招 등으로 하여금 새 농서를 편찬하게 한 뒤, 함경도·평안도 등의 산간 및 한전 농업지대에 이 농법을 확산시켰던 것이다. 그러나「농사직설」은 그 내용에 있어 주로 主穀만을 중점적으로 서술하여 채소류나 과수·특작 또는 식품에 관한 내용을 전혀 포함시키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관찬 농서로서의「농사직설」이 갖는 그러한 한계점 때문에, 중국농서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여전히 권농의 지침서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농학자 姜希孟은 당시 경기도 지방의 불안정한 소농민들의 관행농법에 주목하면서 열악한 그들의 경영을 개선하기 위해, 성종 23년(1492)에 최초의 사찬농서인≪衿陽雜錄≫을 저술·간행하였다. 또한 그는 농민들의 농사작업을 월별로 서술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작물들의 재배법도 함께 다룬 농서인≪四時纂要抄≫도 편찬하였다. 하3도의 선진 농법만을 취급한≪농사직설≫과는 달리,≪금양잡록≫은 특히 당시 경기도 衿陽縣에서 실제로 행해진 관행농법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처럼≪금양잡록≫에 수록된 관행농법들은 이 시기의 소농민경영을 이해하는데 무엇보다 소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사시찬요초≫도≪농사직설≫과≪금양잡록≫만큼 중요한 농서로서 적어도 18세기 초까지 우리나라의 유일한 원예 농서로서 널리 이용되었다. 특히 이는 우리 농업의 환경과 실정에 맞도록 여러 농서를 참고한 독창적인 농서였다. 그러한 중요성 때문에 비록 사찬 농서이기는 하지만 선조 14년(1581)에 정부는 이들을 합본하여 간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조선 전기에는 중앙정부가 중심이 된 농서편찬 사업 외에도 각 지역의 지방관들에 의한 농서간행 사업도 추진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6세기 초의 경상관찰사였던 金安國은 농서와 잠서를 언해하여 간행하였으며, 그의 산하에 있던 안동부사 李偶는 중종 12년(1517)에 기존의 농서에다 새로운 관행농법을 추가한≪農書輯要≫를 간행하였다. 한편≪농사직설≫을 보완하기 위한 증보작업도 지방관들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그 단적인 예로서 16세기의 昌平縣과 17세기의 龍洲縣에서는 종래 없었던 목면의 경종법, ‘新增種綿’편을 증보한 새로운 판각이 만들어졌다. 이들 농서 외에도 정종 원년(1399) 우마에 관한 의서인≪新編集成馬醫方≫, 15세기 초에 朴興生의≪撮要新書≫, 그리고 15세기 중엽의 화훼서인 姜希顔의≪養花小錄≫등이 있다.

이와 같은 조선 전기의 농학은 중국 농서를 도입하는 데서 출발하여 이를 번역하여 보급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자체 농서의 편찬과 간행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특히 우리 농학 발달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농서의 편찬은 관찬과 사찬이란 두 보완적인 방식을 통하여 급속히 전개되었는데, 16세기에 들어서서 더욱 확산되었다. 결국 이와 같은 농학의 발달은 이 시대 농업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