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1. 도시상업
  • 1) 서울 시전의 성립

1) 서울 시전의 성립

고려 초의 수도건설은 궁궐을 세우고 방리를 나누며 시전을 세우는 것이 3대 중요사업이었다. 조선 초에 있어서도 역시 시전을 세우는 일은 태조 천도 이래 4대에 걸쳐 궁궐의 건축·坊里의 구획과 아울러 계속 수행된 중요 사업의 하나였다. 즉 간선도로 좌우 양측에 막대한 국비와 노동력을 동원하여 定住商人의 점포를 개설하였다. 이로써 상민을 초치하여 최대한의 어용적 상업경영에 종사케 하고, 관부 및 귀족층을 비롯한 신도시 주민의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본시 옛부터 왕도에는「前朝後市」0168)≪萬機要覽≫財用編 5, 各廛.를 하나의 원칙으로 삼았는데,≪萬機要覽≫의 各廛條에서 市의 성격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0169)위와 같음.

≪만기요람≫에 보이는 市는 小民의 교역장소로서 신라시대의 이른바「日早晩爲市」의 시와 동일한 성격으로 이해된다. 즉 점포를 갖춘 商廛이 아니라, 행상이 몰려들어 교역하고 물러나는 이른바「場」을 가리키는 것이다.≪만기요람≫을 통해 서울 신무문 밖 경무대 앞에「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0170)위와 같음. 이것이 곧 위에 말한「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장」은 이 신무문 밖뿐만 아니라 그 뒤 雲從街, 즉 지금의 세종로(종로십자로)를 비롯한 梨峴, 七牌 등지에도 형성되어 상품이 교역되었다.0171)≪太宗實錄≫권 15, 태종 10년 정월 을미. 그러나 이들 장시는 처음 한양으로 천도했을 당시에 운종가 등지에 섞여 있어서 상업질서가 서지 않고 혼란한 상태였다.

장시의 자연발생과 그 무질서는 이와 같았으나, 관부로서의 시전건설은 이보다 훨씬 앞서 이미 시작되었다. 즉 태조 2년에는 領書雲觀事 權仲知가 왕도 시전에 대한 도안을 올린 바 있으며,0172)≪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계유. 정종 원년에는 惠政橋로부터 창덕궁 동구까지 행랑시전 좌우 800여 칸을 營造하려 하여 착수한 일이 있었다.0173)≪定宗實錄≫권 1, 정종 원년 을묘. 그러나 실제로 완성되지는 못하였으며, 더구나 송도 천도의 정치적 분규로 인하여 계속적인 시전의 영조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태종이 다시 한양에 천도하면서부터 시전 건축은 본격화되었다. 즉 태종 10년 2월에는 먼저 시전의 지역적 한계를 정하여 大市는 長通坊(관철동·장교동), 미곡잡물은 동부 蓮花洞區(연지동), 남부 蕙陶坊(을지로 2가), 서부 혜정교(종로 1가 복청교), 북부 안국방(안국동), 중부 廣通橋(남대문로 광교), 소와 말은 장통방 하천변에서 각각 매매하도록 하고, 閭巷小市는 각각 사는 곳의 문앞에서 영위하도록 하였다.0174)≪太宗實錄≫권 15, 태종 10년 2월 갑진. 동시에 그 감독 기관으로 京市監을 다시 설치하여 시내 상업교역에 관한 물자 조절, 欺誑 방지, 奸盜 단속, 商稅 징수 등의 일을 주관케 하였으며, 별도로 淸齋監을 설치하여 시가의 청결을 감독케 하였다.0175)≪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3월 무신·4월 정사·병인.

이 지역적 한계를 기준으로 태종 12년 2월부터는 영조의 실제공사에 착수하였다. 즉 제1차로 그 해 2월부터 4월까지 혜정교로부터 창덕궁 동구에 이르는 800여 칸의 좌우행랑을 건조함으로써 수도 상가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태종 10년의 계획 이래 계속된 영조공사는 태종 14년 7월까지 5년간에 4차례 실시되었다. 제2차로 태종 12년 5월에 궐문에서 貞善坊 동구까지 행랑 472칸이 건조되었고,0176)≪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5월 을사. 제3차로 12년 7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종루로부터 경복궁까지와 창덕궁으로부터 종묘 앞 누문까지, 그리고 숭례문 전후까지를 합하여 총 1,360칸이 완성되었으며,0177)≪太宗實錄≫권 24, 태종 12년 7월 기축 및 권 25, 태종 13년 4월 을축·5월 정미. 제4차로 태종 14년 7월에 다시 종루로부터 남대문까지와 종묘 앞 누문으로부터 동대문까지에 좌우 행랑을 조성하였다.0178)≪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7월 임진.

차 순 시 기 적    요 면적(칸수)
제1차 12년 2월∼12년 4월 혜정교∼창덕궁 좌우행랑 800여 칸
제2차 12년 5월 대궐문∼정선방 동구 행랑 472칸
제3차 12년 7월∼13년 5월


경복궁 남방∼종묘 앞 좌우행랑 881칸
종루∼경복궁
창덕궁∼종묘 앞 누문
숭례문(남대문) 전후
480칸
제4차 14년 7월
종루∼남대문
종묘 앞 누문∼동대문 좌우행랑
 

<표 1>태종 연간에 건조된 각 궁궐·관서·행랑의 면적표

(≪太宗實錄≫)

시  기 역정목공 승 군 선 군 감  독 비  고
12년 2월 을축   10,000   개 천 도 감 사망자 11명
병 자 200명
병사자 64명
12년 2월 경오 1,535 500   행 랑 조 성 도 감  
12년 7월 기축 200
(목공)
1,000   행 랑 조 성 도 감  
13년 2월 을묘 2,141 500   督 役 22
領 事 3
 
14년 7월 임진   600
(경기)
1,000
(황해도)
공조판서
관령 朴子靑 감독
李暕 등 22인
목재는 강원·충청
해변 각 군에서
조달
3,876 12,600 1,000    
   총 계        17,476명

<표 2>태종 연간에 징발된 한양 행랑조성 役丁

(≪太宗實錄≫)

그 동안 각 도에서 징발된 연인원은 游手·승려·목공·船軍 등 17,000여 명에 달하였으며, 그 공사로 인한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그 동안의 동원수와 건조된 행랑을 일람하면 앞의<표 1>·<표 2>와 같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