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1. 도시상업
  • 3) 육의전의 상품 및 건축구조

3) 육의전의 상품 및 건축구조

육의전이 시대 변천에 따라 일반 시전과 마찬가지로 번창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했으므로 그 취급 상품이나 交局의 部數를 정확하게 드러내기는 곤란하다. 다만<漢陽歌>의 내용으로써 그 대체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한양가>에 의하면 6의전은 광통교를 지나서 시작되며, 각 전의 市井들과 고객을 안내하는「열림군」들은 큰 장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을 단 의복을 입고 사람을 불러 흥정을 하였다고 한다. 또 그 상품에 관해서도 아래와 같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① 면포전:당진목·해남목·고양목(고양나이)·강나이(목면, 한강변에서 방직한 것)·상고목·군포목·공물목·무녀포·천은(순은)·정은(품질이 낮은 은)·서양목·서양주 등

② 지전:백지·장지·대호지·설화지·죽청지·상화지·화문지·초도지·상소지·분당지·궁전지·시축지·능화지 등

③ 포전:농포·세포·중산포·함흥오승포·안동포·계추리(경북산 마포의 일종, 황저포라고도 함)·해남포·왜포·당포·생계추리·문포·조포·영춘포·길주명포 등

④ 청포전:주로 중국산 화물, 중침·세침·다홍삼승·청삼승·녹전·홍전·분홍전·삼승고약·공단고약·감토모자(방한용 모자)·회회포·민강사당·오화당·연환당·옥춘당 등

⑤ 선전:육의전의 首廛으로 富商大賈인 시정들의 호사가 극진하였다. 공단·대단·사단·궁초·생초·설한초·운문대단·일광단·가계추·용문갑사·상사단·통해주·장원주·포도대단·조개비단·금선단·설사 및 뱃사·호로단·만수단·우단·광월사·아롱단·팔양주·쌍문초·흑저사·남추라·자지상직·거문궁초 등

⑥ 어물전:북어·관목·꼴뚜기·민어·석어·통대구·광어·문어·가오리·전복·해삼·가자미·곤포·미역·다시마·파래·우뭇가사리.

이 가운데 線廛(縇廛)같은 것은 거액의 자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나 영업품목이 많은 점에 있어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연경·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외국물품이 진열 판매되었다.

육의전의 상품은 대략 이러하며 그 밖의 몇몇 시전의 상품으로서<한양가>에 기재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刀子廛:용잠·봉잠·서복잠·간화잠·금구호박·순금지환·산호지환·옥장도 등

② 병풍전:선약도·강남 금릉의 경직도·소상팔경도·해학파도·십장생도 등 각색 회화

③ 약전:인삼·사삼·현삼·황연·황금·황백·우황·사황·구황·웅담·사담·운모고·우황고·오독고·기타 약품

다음에는 육의전의 외형으로서 그 물적 설비인 건축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전 건축구조에 관한 견해는 일치하지 않으나 서기 1890년 경에는 2층 목조 기와집으로서 상층은 창고로 사용하였고, 하층은 전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0191)黑正巖,≪經濟史論攷≫(岩波書店, 1923), 19쪽. 이러한 건축구조는 옛날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시전 건축 초기에는 2층건축이라는 기사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종로의 잔존 건물이 1890년 경에 건축된 것이라고 하면 별문제라 할 것이다. 그러나≪한국건축조사보고≫에서는「常民의 가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 경성 대로에 임한 시전과 같은 것은 거의 모두 기와집으로서 다소 굴곡있는 옥개를 支承하여 그 扉는 厚板으로써 만들고, 이면에서 수개소의 橫棧을 치고, 외면에서는 丸頭鋲을 간추려 쳐서 장식으로도 삼았다. 店은 일반적으로 상판을 깔고 천정은 中天도 하지 않았다. 점의 후면은 가족의 住屋으로서 대소의 차는 있더라도 모두 온돌방으로 하고 중앙에는 中庭을 만들어 그것을 둘러 싸고 矩形·凹字形·口字形으로 방·창고·낭하·庖廚 등을 배열함을 상례로 하며, 일상 가족의 起臥하는 곳은 반드시 상하에 온돌을 마련한다. 그 밖의 부분은 腰壁의 두터운 煉瓦로써 쌓고, 그 위에 작은 창을 만들며, 扉는 대개 片開 또는 양개로 하였다. 또 뜰에 면하는 곳은 床에서 1척 가량 높은 데에 창을 열고, 여기서부터 출입한다. 일반적으로 주실은 좁고, 천정 또한 얕으며, 창문도 극소하므로 난방을 위해서는 편하지만 광선이 들어오기는 불충분하여 음울함을 면치 못한다.

또 러시아 대장성에서 간행한≪한국지≫에서는「내지의 상업」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각 상회의 특종의 勤工場을 소유하되 통례 같은 건물 중에 설치한다. 이러한 근공장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산의 書寫紙·면제품·絹布·신발·공작펜·부채·虎髭 및 자수품 등이다.…보통 점포는 藁葦 건물로서 이것을 전후 2부로 구분하여 시가쪽 부분에 상점을 진열하고 후부는 가족의 처소로 사용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각 都家에는 각 전 취급 상품을 제조하는 공장이 부설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그 양상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都家事例≫가 기록한 입전 전포 구조의 기술은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즉 입전의 구조는 1방부터 7방으로 구분되며 각 방의 면적은 10칸으로 되었는데, 그것을 다시 10등분하여 영업에 종사하였으니 입전의 都員 수는 70인 정도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입전에는 전포 뒤에 도가(Guild Hall)를 설치하여 廛務에 관한 회의 및 공사 처리의 사무소로 사용하였다. 뒤에 상술한 都中의 각 역원은 이 곳에서 전의 업무를 집행하였는데,≪도가사례≫에 의하면 시전의 도가 건평이 65평이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전의 도가 면적도 대체로 그와 흡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건물의 단속을 위해서 看手人(主人)을 두고, 만약에 물건 서류를 분실당했을 경우에는 일일이 徵棒케 하고, 재화가 훼손되면 즉시로 보수케 하며, 명령을 거역하면 즉시 출가시키는 동시에 盟文으로써 시행 처결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가를 사적으로 소유했다고 하여 임의로 개폐할 수도 없었다.

이 도가의 창시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초기의 시전건설기에 “각 전의 정부에 대한 부담이 춘추 2기에만 저화 각 20장씩의 사용세를 내는 것 뿐이었다”0192)≪經國大典≫권 2, 戶典 雜稅.는 사실로써 추측하건대, 이 때엔 도가와 같은 것이 물론 없었던 듯하다. 그 뒤 여러 국역 부담이 생기고 육의전의 길드조직이 발생되어 전의 업무가 많아짐에 따라 일종의「길드 홀(Guild Hall)」등을 필요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길드란 중세의 동업조합으로 원래는 종교적·정치적·사교적인 의미에서 조직되었으나 조합원간에 상호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분열이 생겨 상인길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도시의 상공업자 상호간에 일정한 규율에 의해 부정한 생산경쟁과 판매를 억제하였으며 전체의 조화를 이룩하면서 각기 상공업자를 대표하기도 하였다.

유럽 사회의 길드 클럽(Guild Hall) 등도 길드단체의 특허 창립보다는 훨씬 뒤에 건축되었다. 또 중국의 상인 집회소인 회관의 기원을 살펴보더라도 각종 회관의 역혁이 200년 전에 알려진 것이 없다.0193)O. D. J. MacGowan,≪Chinese Guilds≫. 당나라 때부터 상인회가 존재하였고, 명초(1368)에는 북경에 강서회가 창설되었다고 하나,0194)Morse,≪The Guilds of China≫, 42쪽. 芝罘의 복건회관·漢口의 영남회관 등의 건조는 각각 18세기 초·중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0195)根岸佶,≪支那 길드의 硏究≫, 41쪽. 역시 길드 단체의 창립과는 시간적인 거리가 있다. 이와 같은 외국의 사례로 보더라도 우리 나라의 도가가 반드시 공랑 건축과 같은 시기에 건축된 것은 아니고 육의전의 길드인 도중조직이 완비된 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