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1. 도시상업
  • 6) 육의전의 상업적 특권

6) 육의전의 상업적 특권

조선 초기 이래로 상업상의 감독기관으로서 호조 산하에 경시서, 뒤의 평시서를 두어 시전의 검사, 도량형의 감독, 물가의 평균조절 등에 관한 사무를 맡게 한 것은 농본주의에 입각한 상업억악 정책의 좋은 표현이라 하겠다. 그 뒤 점차로 상인은 자본을 축적해 갔지만 국가재정이 궁핍해졌으므로 자연히 정부는 상인의 부에 의지하게 되고 상인은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게 되니 양자 사이에는 일종의 代償 관계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정부는 상업보호라는 혁명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 하나가 바로 육의전 길드에 의한 특허적 전매 형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특권이 강대하면 할수록 그 의무 또한 가중되었다. 육의전의 상품독점은 한편으로는 궁실, 정부관리들의 부정 부패의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동시에 신흥 기업자의 진출을 막았던 까닭으로 상공업은 한층 더 위축 침체하게 되는 현상이 빚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위정자들은 상업을 공정한 생업이 아니라는 관념 아래 장려할 수 없는 것으로 천시하였다. 따라서 정부의 특수재정인 귀중물품 조달의 필요상 어느 정도 보호 육성할 정책적 가치가 있다고 보면서도 그 감독은 엄격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며, 이 특허를 이용하여 관리들의 부정 부패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정부의 상업 보호책에는 첫째 정부의 자금 대여가 있고0205)순조 9년 12월 慶安宮 內帑錢 50,000냥과 내사전 20,000냥을 都下 十廛 十貢에 대여하여 불경기를 구제한 일이라든지, 순조 31년 11월 당시 帽子廛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았던 까닭으로 關西錢 15,000냥을 10년 기한으로 대여한 일이라든지, 헌종 6년 11월 저포전·진사전·상전·입전 등이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 앞의 각 전에 恤典을 급여한 일 등의 예가 있다. 둘째로는 외부의 압력에서 시전을 보호하는 것 등이 있었으나0206)순조 33년 3월에 호위영군관 김선헌이 米廛에서 군량 9석을 판매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무뢰배를 끌어모아 시전을 불사르고 가산을 파손하였을 때(≪純祖實錄≫권 33, 순조 33년 3월 임오), 무인 洪眞吉·姜春得 등이 시전을 불태웠을 때에 각각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할 일 등이 있다. 또 헌종 원년 5월에는 사헌부 지평 조효준이 저포전에 대하여 법에 따라 처분하지 않고 자의로 백저포 판매를 금하여 시전의 동요를 야기시킴에 따라 그 직을 파면한 일(≪日省錄≫헌종 을미년 5월 26일)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보다도 정부의 상전 보호책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금난전이며 이것이 곧 육의전 최대의 특전이었다. 그 특전이 서구 길드의 특전과 유사한 것인지 아닌지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본래 난전이라 함은 전안에 등록되어 있지 아니한 자나 판매를 허가받은 상품 이외의 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을 평시서로 하여금 금지하게 하였던 것은 기술한 바이거니와, 난전을 자행하는 자는 시민의 고발로써 적발 징계하되 그 압수한 물품이 소정의 벌금에 미달할 때는 杖刑까지도 가하였다. 그 밖에 궁가소속자를 위한 난전이 심한 경우에도 법으로 엄중히 다스리고 그 물건은 몰수하라고 하였고 사대부가에서도 난전을 자행하여 禁吏를 구타하고 전인을 구류시켜 속전을 도로 뺏는 일이 있으면 그 가장을 적발하여 의법 처단한다는 규정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난전의 금지는 조선 상업정책의 일부로서 관서로 하여금 이를 금지케 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관부의 어용상인이자 최대의 국역부담자인 육의전으로 하여금 난전 금지에 관해 일종의 경찰권을 부여하여 관서와 협력케 하였던 것이니, 이것은 곧 육의전의 자위적인 행동인 동시에 관부의 육의전에 대한 보호를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 금난전이 시작된 연대는 육의전 내지 유분각전의 성립 연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육의전이 어느 때부터 이 금난전의 경찰권을 갖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특권의 부여가 반드시 국역 부담의 代償 조건인 이상, 육의전에 대한 국역 부담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육의전과 같이 관허의 특권이 있는 것 이외에 이것을 모방 또는 악용하여 폭력배들이 난전금지를 사사로이 자행하는 현상도 있어 적지 않은 악폐를 남겼다. 예컨대 정조 15년 蔡濟恭의 상소에 의하면 폭력배들이 세민(細民)의 채소, 옹기파는 것까지 고발하고, 혹은 사람들이 물품을 시장으로 반입하는 것을 도중에서 협박하여 염가로 강제 구매하는 등의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농민의 간단한 물물교환이나 심지어 병중에 있는 부모의 치료약을 구하려고 면포 등을 가지고 나와도 난전이라는 명목으로 처벌을 당할 정도로 피해가 막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폭력배 중에는 관부나 세가의 공사노비도 있었고,0207)≪英祖實錄≫권 3, 영조 12년 12월 병인. 군병인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이처럼 권력을 가진 자에게 대해서는 그 단속이 지극히 곤란했던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선조 때에 훈련도감이 세워지자 그 군병으로서 서울시내에 거주하는 자가 市業에 종사할 경우에는 그것을 묵인하였으며 나아가 그들에게는 일반 상인이 부담하는 市役을 전적으로 면제하였던 것이다.0208)≪增補文獻備考≫권 163, 市糶考. 그러나 인조 이후 시전에 대한 국역이 규정되면서 이 국역을 분담하는 유분각전, 특히 육의전에 대하여도 제약이 없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효종 때에는 군병으로서 상업을 경영하는 자에게는 市牌라는 認證을 급여하고, 그 대신 5분의 1의 시역에 응하는 의무를 부과하였다.0209)위와 같음. 그러나 그들의 작폐는 그치지 않고 오히려 結黨設肆의 경향까지 생겼다. 숙종 원년에는 훈련도감 군인과 精抄軍 등의 난전의 폐단을 금한 바 있고, 숙종 49년에는 효종 때에 제정한 시패법을 폐지하기까지 이르렀다.0210)위와 같음. 그러나 이와 같은 군병의 난전작폐는 실로 군사 재정의 무질서에서 온 것으로 영조 23년 11월 좌의정 趙顯命의 上箚文을 보면, 군병의 난전을 금하지 않으면 廛民이 감당할 수 없고, 군병의 난전을 금하면 군병이 자생할 길이 없다는 모순에 빠져 심지어 호위영의 폐지 논의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난전을 혁파한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영부사 金在魯같은 사람은 호위군의 난전을 금지하지 말 것을 上啓한 일조차 있었다.0211)≪英祖實錄≫권 80, 영조 29년 7월. 이리하여 이 문제는 좀체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정조 5년 정월에도 각 군문에 난전을 엄칙케 하는 상교가 내려지기도 하였다.0212)≪正祖實錄≫권 11, 정조 5년 정월 을유·무자.

이러한 가운데 금난전의 특권이 공납으로 허용된 민간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육의전분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육의전 이외의 상전에도 이를 일시 허용하고 또는 하려고 한 일도 있었다.0213)정조 15년 채제공의 상소에 따라 평시서로 하여금 30년 이전에 설치한 老鋪를 조사·보고케 하여 이들에게만 특권을 부여하려 하였으나 조사 결과 동년 2월까지 오직 3전밖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연한의 久近으로써 규정치 말고 육의전 외에는 일체 금난전을 허용하지 않기로 한 일도 있었으며, 순조 7년에는 육의전 이외의 鉢里廛·樺皮廛·淸蜜廛·鞋廛 등에도 그 특권을 준 일이 있었으나 그들이 이것을 이용하여 물가를 조종하고 도시경제의 폐단을 초래하였으므로 뒤에 다시 그 특권을 취소한 사실도 있었다(≪日省錄≫순조 7년 2월 25일·7월 29일).

여기에서 부언할 것은 금난전의 특권을 가진 육의전으로서도 그 특권은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는 허용되지 않았으며, 난전금지에 의하여 압수된 물품은 관부의 소유로 하였는데, 경종 4년에 이르러 호조우윤 조영익의 상계로 인해 난전의 액수가 적으면 징치하지 말고 설령 많다 할지라도 관부에 속하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논의가 일어나, 마침내 난전행위에 대하여만 처벌을 하고 그 물품을 관부에 속하게 하는 일은 금지하였다.

<劉元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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