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2. 지방상업
  • 1) 상무사 우사
  • (1) 조직

가. 보부상 조직의 기원

우리 역사상 부상의 기원은 아마도 고대사회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당시의 물품 운반수단으로 소와 말이 있었지만 주로 사람의 머리나 등에 의해 운반함으로써 수요와 공급이 충당되었었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同濟相救’하는 미풍도 생격으니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도 보인다. “태조가 고려 말 함경도 만호로 있을 때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머리를 맞은채 적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 때 마침 황해도 토산군에 거주하던 백달원이란 자가 죽립을 쓰고 지게를 짊어지고 지나가다가 태조의 위기를 보고 태조를 지게에 담아 싣고 위기를 구하였기 때문에, 태조 즉위 후에 백달원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그의 소원에 따라 소자본인 8도의 행상인을 구제할 목적으로 각 주군에 任房을 설치케 하고 침식·질병의 치료·장례 등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설과 또는 “태조가 함경도의 행상들을 이용하여 신왕조를 건설하였기 때문에 8도에 하명하여 상민을 우대하기 위하여 상민 단체를 조직케 하였다”는 설, 그리고 “태조가 즉위 이후 안변에서 석왕사를 증축할 때 백달원이 동지 80명을 인솔하여 쌀·자재를 운반하고 삼척군에 있는 5백나한을 이안한 공로로 지금의 개성군 발가산에 임방을 설치하여 옥도장을 하사하였다”고 하는 설 등이 있다.0219)柳子厚, 앞의 책. 이와는 달리 상류계급과 무뢰한의 탐욕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초에 부상조합을 조직하였다는 주장인 프랑스인 Chaillé-long-bey에 의해 저술된≪La Corée ou Chosôn≫에도 보인다.

이와 같이 부상단은 적어도 조선 초부터 발생하여 그들의 支杖과 支機[지게]를 무기와 輜重으로 이용하면서 동심결속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뒤에도 정부에서는 국가대사나 국난위기 때 그들 행상단을 수시로 사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보상이 언제부터 조직을 갖게 되었는지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그것이 전국적인 조직을 갖게 된 것은 고종 13년(1879) 8월에 발포된<漢城府完文>에서이다. 그에 의하면 언제부터 존재하였는지 추측하기 곤란하지만 그 전부터 지역적으로 각기 정해진 기율과 수령인 접장의 소임이 있어 군료를 통솔하였고, 또 산재한 조직을 전국적인 상단으로 조직하여 소규모 자본의 행상을 규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보상단은 그 ‘同濟相救’와 ‘以疏爲親 以遠爲近’을 위하여 ‘吏無賴劇掠之類’와 ‘吏校輩侵掠之弊’를 금단함으로써 상권확립을 기도하였던 것이니, 한성부에서 8도의 都接長을 차출하면 圖書를 지급함으로써 보상의 신분을 보장하였던 것이다.

보상과 부상은 각각 별개의 행상조합 조직으로 성장하였으나 1883년에 惠商公局을 설치하여 보상과 부상을 완전 합동케 하여 군국아문에 부속시켰다.0220)≪惠商公局關文謄書冊≫. 고종 22년에는 다시 商理局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부상을 左社, 보상을 右社로 구별하고 다만 역원은 상리국에 통합 단일화시켰다.0221)≪判下商理局序文≫.

이와 같이 정부에 의한 보호 및 관리가 시작된 것은 곧 보상 및 부상이 강대한 조직체로 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1887년 경에 우리 나라에 체류하였던 Chaillé-long-bey의 글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상인 자신들이 전매권 획득과 상권의 방어를 위하여 단결을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정부에서도 그 완강한 조직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보호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관권을 배경으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정부의 승인을 받은 조직체로 변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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