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3. 화폐의 유통
  • 1) 배경

1) 배경

우리나라 화폐사 발전과정에서 볼 때, 국가가 정책적으로 체제와 품질을 일정하게 규격화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려 했던 것은 고려 성종 15년(999)에 鐵錢을 주조 유통시켰던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당시에는 唐錢·宋錢 등 중국화폐가 유입되어 극히 제한된 일부 유통계에서 사용되었을 뿐, 대체로 布·米 등 물품화폐와 稱量金銀貨가 일반유통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정부가 철전을 주조 유통시키려 했다는 사실은, 한국화폐사상 자연경제적 유통질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의 도입·실시를 위해 취한 최초의 시도라 할 것이다. 그 이후 고려정부는 계속해서「海東通寶」등 각종의 동전과「銀甁」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켰고, 말엽에는 元의 지폐(寶鈔)와 明錢 등이 유입, 통용되는 상황에서 楮貨의 人造유통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정부가 명목화폐의 통용 목적으로 거듭 유통 보급시키려 했던 철전·동전·은병 및 저화들 중 어느 한 가지 화폐도 지속적으로 통용되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자연발생적인 포·미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가 의연히 공·사 유통계를 지배하였다. 조선정부는 저화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즉 태종 8년(1408)에 화폐정책 외적인 대명정책적 고려에서 고려시대 이래 중요한 통화기능을 담당해온 칭량은화의 통용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조선 초기에는 포·미 등 물품화폐가 공·사 유통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개국 초기의 혼란 내지 국내·외적 불안을 점차 극복하면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부문에 걸쳐서 제도정비를 시도하였다. 이처럼 제반 문물제도를 정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당시의 지배적 유통질서인 포·미 등 물품화폐에 의한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수용하기 위해 저화와 동전의 유통 보급을 추진하였다. 또한 이같은 명목화폐제도의 도입시도가 좌절되면, 미봉책 내지는 반동으로 당시의 유통계를 지배하던 물품화폐인 布貨를 法貨化하려 하거나, 실용가치를 전제로 한 箭幣를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려 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10세기 말부터 거듭 시도해 왔던 것처럼, 조선정부가 자연경제 체제하의 물품화폐에 의한 유통 질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수용하기 위해 저화나 동전은 물론 포화와 箭幣 등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게 된 배경으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역사적 배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려정부는 10세기 말 이후 철전·동전·은병·저화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 하는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기 위한 화폐정책을 거듭 추진하였다. 고려시대의 화폐유통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조선정부가 저화·동전·포화·전폐 등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화폐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사실상 한국화폐사 발전 과정에서 볼 때, 10세기 말 이후의 고려시대나 왜란 이전의 조선 전기는 명목화폐제도의 도입시도기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성격을 같이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화폐유통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 초기 화폐정책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듯이,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화폐유통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왜란 이후, 즉 17세기 초부터 조선정부가 동전을 법화로 채택, 유통보급시키기 이해 화폐유통 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0224)元裕漢,<貨幣流通政策>(≪韓國史論≫11-朝鮮前期의 商工業-, 국사편찬위원회, 1982).

둘째, 조선정부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며 개국 초기의 민중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제정책의 일환으로서 저화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 당시 정부는 저화를 유통 보급시킴으로써 “국용을 넉넉하게 하고 民食을 풍족케 할 수 있다”0225)≪太宗實錄≫권 6, 태종 3년 8월 을해.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저화는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좋은 법이다”0226)≪太宗實錄≫권 4, 태종 2년 9월 갑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 왕조의 경제기반 확립을 필요로 하는 개국 초기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서 저화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화폐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상 저화나 銅錢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농업에 경제기반을 둔 조선사회에 있어서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짧은 기일 내에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재정조달의 방법이기도 하였다. 또한 저화나 동전 등이 유통 보급됨으로써 화폐경제가 발전하면 제반 사회생산력이 증진되고 유통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화폐유통에 대한 가치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조선 전기에는 저화나 동전과 같은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화폐정책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셋째, 중앙집권적 조선정부는 중요한 利權(經濟權)인 화폐의 주조 발행에 대한 일체의 지배권을 국가 또는 국왕이 장악하기 위해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 하거나, 布貨 등 물품화폐의 法貨化를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정부는 전통적으로 국가통치권의 중앙집중화를 속성으로 하였기 때문에 “利權은 위(국가 또는 국왕)에 있다”거나, “利權이 백성에게 있는 것은 옳지 않다”0227)≪太宗實錄≫권 6, 태종 3년 9월 을해·을유.고 했듯이, 국내의 경제권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백성에게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일반 유통계에서는 백성이 생산하고, 또는 그들에 의해 지배되는 포·미 등 물품화폐가 통용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利權在上’이란 전통적 정치이념을 강조하면서 백성에 의해 지배되는 포·미 등 물품화폐의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국가가 그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저화·동전 등을 법화로 사용하는 화폐제도의 실시를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권재상론’은 조선 초기와 같이 명목화페제도의 도입 시도기에 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말부터「常平通寶」가 법화로 채택되는 과정이나, 그것이 계속 유통되어 화폐경제가 확대 보급되는 과정에서도 종종 화폐주조 관리체계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논리적 근거로 제시되었다.

넷째, 일찍부터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의 직·간접적인 영향은 조선 초기에 저화·동전 등의 통용을 시도하게 된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문화가 일찍부터 중국의 문물제도를 주체적으로 수용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한국 화폐사 발전도 화폐경제가 일찍부터 발달한 중국으로부터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리하여 선사시대나 고대사회에서도 그러했다고 하지만, 비교적 연대가 확실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는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 철전·동전·저화·은화 등 각종 화폐를 유통 보급시키고자 한 그 중요한 동기가 일찍부터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에 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성종 15년(999)에 철전통용을 시도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듯이, 중국의 제반 문물제도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있던 조선 초기에도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아 저화와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고자 하였다. 왜란 이후는 물론, 1890년대에 근대적 은본위제도를 수용하기까지도 중국으로부터의 직·간접적인 영향은 지속되었던 것이다.0228)李鍾英,<朝鮮初 貨幣制의 變遷>(≪人文科學≫7, 延世大, 1962).
元裕漢,≪朝鮮後期 貨幣史硏究≫(韓國硏究院, 1975).

다섯째, 조선정부가 초기에 포·미 등 물품화폐가 가지는 한계를 느끼고 명목화폐를 필요로 하는 사회 경제적 요청에 따라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조선정부는 개국 초기부터 말엽인 상공업은 본업인 농업을 해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농업을 적극 장려하는 반면 상공업 발전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억제하였다. 이처럼 상공업과 농업과의 관계를 대립 상충관계로 인식했기 때문에, 중농억말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수공업생산과 상품·교환경제 발전은 활성화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볼 때 상공업과 농업의 관계는 대립 상충관계이기 보다는 상호 보완관계이기 때문에, 정부당국의 적극적인 중농억말정책하에서도 상공업, 특히 상업은 정부의 심각한 우려를 자아낼 만큼 발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성을 비롯한 도시상업, 지방상업, 선박을 이용하여 연해에서 활동하는 水商, 국경지대의 潛貿易 등이 전개되었다. 또한 상업에 종사하는 자가 증가하여 농업인구의 축소 내지 농업생산의 위축을 가져오게 된다는 점에서 정부의 우려가 컸다는 것이다. 또한 한갖 추론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조선 초기 이래로 일관되게 중농억말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은 그동안에 상공업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의 일반유통계에서는 실용가치가 없는 품질 나쁜 포, 즉 麤布가 교환매개로 사용되었으리만큼 수공업을 비롯한 제반 사회생산과 상품·교환경제는 성장 발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제반 사회생산과 상품·교환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발전수준이 실용가치를 중요시하는 일반 민중의 화폐가지관을, 실용가치가 적은 저화나 동전의 명목가치를 존중하는 화폐가치관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와같은 점은 일반 민중이 저화나 동전 등은 추워도 입을 수 없고 주려도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 저화와 동전이 법화로 계속 유통보급될 수 없었다0229)宮元兎一,<朝鮮初期の銅錢について>(≪朝鮮學報≫2, 1951).
田壽炳,<朝鮮太宗代의 貨幣政策-楮貨流通을 中心으로>(≪韓國史硏究≫40, 1983).
元裕漢, 위의 글.
―――,<官僚學者 金藎國의 貨幣經濟論>(≪朝鮮時代史硏究≫, 1989).
고 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여섯째,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는 포·미 등 물품화폐와 비교해 볼 때, 교환매개·가치척도·운반수단·지불수단·저장수단·분할수단 등 화폐로서의 제반 기능이 우수한 것이다. 이 점이 조선정부가 초기에 포·미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게 된 기본적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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