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3. 화폐의 유통
  • 2) 저화·동전 유통정책
  • (1) 화폐 유통정책의 추진 경위

(1) 화폐 유통정책의 추진 경위

앞에서 조선정부가 금·은 칭량화폐의 통용이 금지된 왕조 초기에 포·미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나 동전 등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게 된 배경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면 조선정부는 앞에서 살펴본 몇 가지 사실들을 배경으로 과연 화폐 유통정책을 어떻게 추진하였는가. 다음에서는 정부당국이 저화나 동전 등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시도한 화폐 유통정책의 추진 경위를 대강 살펴보고자 한다.

태조 3년(1394) 7월에 호조판서 李敏道는 錢幣(鑄貨)制의 실시를 건의했으나, 채택 실시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 당시 조선정부가 전폐제를 채용하지 않았던 것은, 고려시대에 철전이나 동전 등 각종 주화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해 거듭 시도한 화폐 유통정책이 실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성과, 흉작 등 전폐제를 실시하기에 부적합한 사회 경제적 여건이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태종 원년(1401) 4월에 좌의정 河崙의 건의에 따라 저화제를 실시할 것과 그 업무를 관장할 관청으로 司贍署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정부가 저화를 법화로 통용하기 위해 저화제의 채용을 결정하게 된 것은, 공양왕 3년(1391)에 추진한 저화 유통정책이 통용 직전에 여말 선초 국내외 정세의 혼란으로 좌덜되었기 때문에 저화와 통용을 계속 추진해 보겠다는 정책적 의욕에 기인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저화 유통정책은 고려 말에 추진되었던 것이지만, 조선을 개창한 이성계 일파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볼 때, 조선 초기의 저화제 채용은 고려 말에 시도하다가 좌절되었던 저화 유통정책의 계승 내지 부활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화제의 채용이 결정된 후에, 그에 반대하여 楮紙보다 내구성이 강한 淸淡色 正五升布로「朝鮮布貨」를 만들어 법화로 사용할 것을 주장한 고위관료도 있었다. 그러나 태종의 강한 정책적 의욕으로 포·미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이 추진되었다.0230)李鍾英, 앞의 글.
元裕漢, 앞의 글(1982).
權仁赫,<朝鮮初期 貨幣流通硏究-特히 太宗代 楮貨를 中心으로->(≪歷史敎育≫32, 1982).

조선 초기에 만들어 사용한 저화는 전해지는 것이 없어서 그 규격과 체재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저화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楮注紙로 만든 것은 길이가 1척 6촌이며 폭이 1척 4촌이고, 楮常紙로 만든 것은 길이가 1척 1촌이며 폭이 1척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정부는 저화 1매의 통용가치를 5승포 1필 또는 米 2斗로 비정하여 발행하는 한편 저화의 유통 보급방법으로서 중앙에는 태종 2년(1402) 5월 1일까지, 지방에는 5월 15일까지 5승포의 통용을 일체 금지하기로 하였다. 정부당국은 계속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화의 유통 보급을 시도했으나 일반 유통계에서 명목화폐인 저화의 통용은 거부되고, 국가의 통용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물품화폐인 포화가 중요한 통화기능을 담당 수행하였다. 이로써 통용을 금지했던 5승포를 저화와 병용하도록 하였다. 저화만을 법화로 사용하겠다는 정책방침을 완화하고 포화를 병용케 하자, 저화는 국가가 부여한 법적 통용력과 경제적 신용을 상실하고 마침내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태종 3년(1403) 9월 저화를 印造 발행하던 사섬서를 폐지하는 동시에 1년 9개월만에 楮貨制의 실시를 중단시킴으로써, 화폐제도는 종래의 물품화폐 유통체제로 복귀하게 되었다.0231)李鍾英, 위의 글.
宮原兎一,<朝鮮初期の楮貨制について>(≪東洋史論叢≫3, 1954).

그러나 태종은 10년(1410) 7월에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7년 전에 저화제도의 실시를 중단시켰던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말하고, 사섬서로 하여금 다시 저화통용에 관한 업무를 담당 수행케 하였다. 이로써 종래 印造하여 退藏해 두었던 저화, 즉「建文年間所造楮貨」에 ‘永樂’이란 연호만 찍어서 그 해 9월부터 발행하였다. 그 당시 저화의 통용가치는 1枚에 米 1斗, 30枚에 木棉 1필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저화 유통정책의 일환으로서 5승포의 사용을 일체 금지하는 동시에 규정을 위반한 자는 중죄로 다스리는 등 종래보다 강경하고 적극적인 여러 가지 저화 유통방법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당국의 저화 유통정책에도 불구하고 저화에 대한 일반 민중의 공신력은 약화되어 저화통용을 꺼려한 나머지 장시에서는 상품의 매매를 기피하는 경향까지 나타나 유통계를 침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왓다. 그리하여 정부당국은 다시 엄벌주의 내지 강경일변도적인 저화 유통방법, 즉 포화통용을 엄금하고 저화만을 법화로 사용케 하는 방침을 완화하기 시작하였다. 태종 11년(1411) 6월에 한성부로 하여금 斗升 이하의 미곡매매는 雜物을 물품화폐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한편, 태종 15년(1415) 정월에는 收贖을 제외한 기타 매매거래에 포화사용을 허용함으로써 마침내 楮貨全用令을 폐기된 셈이 되었다.

이처럼 포화가 사실상 法貨로서의 공적 지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조선정부는 태종 15년(1415) 4월에 布帛稅인 着稅를 징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착세는 布帛에 부과되는 일종의 물품세로서 포백이 화폐로 통용될 수 있으려면 국가의 검열·着印을 받아야만 했는데, 착인할 때에 포백의 소유자는 布價의 30분의 1에 상당하는 저화를 납입하는 것을 말한다. 물품화폐인 布貨의 통용이 합법화되어 그것이 법화로서 기능하게 됨에 따라 저화의 유통가치는 폭락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정부가 태종 15년(1415) 포백세인 착세의 징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법화로 동전을 주조 유통시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태종 15년 5월 知申事 柳思訥이 신설된 착세를 징수하는 데 저화 1매 미만의 적은 액수를 처리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동전의 주조 유통을 제의한 사실이 그것이었다. 동전을 주조 유통하면 착세의 징수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일반 상품의 소액거래에도 편리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로써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하는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어, 그 해 6월에 호조의 건의에 따라 唐의「開元通寶」의 체재와 품질을 본딴「朝鮮通寶」의 주조 유통문제가 결정되었다.

그러나「조선통보」의 주조사업이 착수되려던 시기에 사간원이 楮貨制의 보완목적으로 추진된 동전 주조 유통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동전 주조 유통계획은 중단되었다. 동전을 저화와 함께 법화로 주조 유통하려던 계획이 중단된 중요한 원인은, 일반 민중이 동전만 사용하게 되어 저화는 유통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데 있었다. 사실상 동전이 주조 유통되기도 전에 일반 유통계에서는 저화의 유통가치가 폭락되어 저화로는 미곡을 매입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조선정부는 일부 고급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종의 주장에 따라 추진한 동전 주조 유통계획이 중단되자, 저화제 실시를 일층 강화하는 방향으로 화폐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유통계는 물품화폐인 포화가 지배하고 저화의 유통가치는 폭락하여 ‘賤物’처럼 취급되었다. 이에 정부당국은 흉년을 이유로 하여 楮貨專用을 잠시 중지하고 포화·잡물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매매거래를 허용함으로써 사실상 저화는 통용이 중지된 셈이었다. 한편 세종 4년(1422) 말에 제기된 바 있는 동전 주조 유통론을 이듬해 9월에 받아들여서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하는 문제를 결정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의정부와 6조의 합동회의에서 동전을 주조 발행하여 법화인 楮貨와 병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당「개원통보」의 체제와 품질을 본따서 10錢을 1兩으로 하고, 錢文은「조선통보」라 하여 銅 1斤을 바치는 자에게는 동전 160文을 지급케 하였다. 그리고 동전의 주조발행은 사섬서에서 관장하고 동전을 불법적으로 주조하는 자는 처벌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개국 초부터 거듭 논의 시도된 바 있는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는 문제는 세종대에 이르러 마침내 실현된 셈이다.

이후 조선정부는 중앙에서는 물론 경기도·경상좌우도 및 전라도의 각 지방에 鑄錢所를 설치하고 동전, 즉「조선통보」를 주조케 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화폐 유통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수량의 동전을 주조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요한 원인은 우선 거의 日本銅의 수입에 의존하는 화폐 원료의 공급이 어려웠고, 처음 시도하는 동전주조사업이었기 때문에 주조시설이 미비하고 기술자 동원이 어려우며, 기술이 미숙하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정부당국은 세종 7년(1425) 정월까지 주조된 동전 12,537貫을 길일을 택해 통용하기로 하고, 또한 濟用監을 비롯한 중앙 각 관청과 각도 및 留後司에 각각 일정량의 동전을 頒給하였다. 그리고 동전 유통 보급에 관한 업무를 철저히 독려하고 감독하기 위해, 그 해 2월에「不用銅錢者糾察條件」을 공포하는 동시에 동전을 유통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결정된 동전과 저화와의 比價는 1대 2였던 것이나, 동전과 미·포 등 물품화폐와의 비율은 확실히 알 수 없다. 동전을 저화와 함께 법화로 통용케 했으나 저화는 일반 유통계에서 전혀 통용되지 못하고, 행정권이 직접 작용될 수 있는 조세의 납부수단으로 일부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세종 7년(1425) 4월에는 호조의 건의에 따라 저화의 통용을 중지하고, 저화 1매를 동전 1문으로 환수케 했던 것인데, 그 당시 저화 1매의 가치가 米 1승으로 比價된 셈이다.

이후 국가의 화폐 유통정책은 저화 못지않게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적극 추진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의 강한 정책적 의욕과는 달리, 동전 역시 저화의 경우와 같이 마찬가지로 유통계를 지배하는 법화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정부당국의 적극적인 화폐 유통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반 민중은 실용가치가 작은 동전보다는 실용가치가 전제된 포화를 즐겨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킨 초기에는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자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서 포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었으나, 국가의 동전 유통방침이 완화됨에 따라 포화의 통용은 점차 활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정부당로자들이 “포화는 만년을 지나도 폐단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포화의 통용 즉 물품화폐인 포화의 통화기능은 활발해졌으며, 상대적으로 법화로서의 동전의 기능은 위축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저화제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시도한 동전 유통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저화제를 다시 채용하는 문제가 제기 논의되었고, 세종 27년(1445) 12월 마침내 저화제 채용이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저화제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동전을 유통 보급한 목적이 그러했듯이, 동전 유통정책의 실패를 보완해서 다시 저화제를 채용한 것은, 조선정부가 왕조 초기부터 일관되게 시도한 포·미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실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저화제를 다시 채용한 정부 당국은 국가의 수입지출을 화폐화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화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같이 적극적인 저화 유통정책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저화의 법화로서의 기능은 점점 약화되는 반면 물품화폐인 포화의 유통은 실질적으로 유통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經國大典≫의 ‘戶典’이 頒行된 세조 6년(1460)에 이르러서는 물품화폐인 포화의 품질과 체재를 규격화하여 저화와 함께 법화로서 결정하였다. 이처럼 포화를 저화와 함께 법전에 법화로 규정했다는 사실은, 곧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를 실시하려는 화폐정책의 실패를, 보다 본질적인 면에서 본다면 명목화폐제도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그 당시 조선사회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 민중이 저화나 동전은 입거나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던 그 당시의 사회 경제적 여건속에서 실용가치가 있는 포화의 통용이 합법화됨에 따라 저화의 통화기능이 위축되고 포화가 유통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성종 23년(1492) 11월에 종래 저화로 수납하던 各司의 徵贖을 모두 포화로 거둬들이게 되자, 지방에서는 저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종 7년(1512) 경에는 “저화는≪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을 뿐 근래에는 專廢되고 사용되지 않는다”0232)≪中宗實錄≫권 15, 중종 7년 정월 병인.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저화가 전혀 통용되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그 이후 대략 1670년대 말에「常平通寶」가 유일한 국가의 법화로 채택 유통되기까지 저화는 유통계에서 사라지고 포화가 역시 물품화폐인 미 및 칭량은화와 함께 공·사 유통계를 지배하였다.0233)李鍾英과 宮原兎一의 앞의 글 참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