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3. 화폐의 유통
  • 3) 포화의 법화화 시책

3) 포화의 법화화 시책

대체로 인류가 직조기술을 터득하게 되면서부터 각종의 직물, 즉 의료는 중요한 교환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인류역사 발전과정에 보이는 이와 같은 일반적 현상은 한국 역사 발전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직물, 특히 마포를 비롯한 포화는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요한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한국 화폐사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철전·동전·은화·저화 등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려 했던 고려시대에는 마포를 비롯한 각종 직물이 곡물과 함께 중요한 물품화폐로서 일반 유통계를 지배하였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고려시대의 일반유통계를 지배한 포·미 등 물품화폐 유통의 관행은 조선시대로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왕조 초기부터 고려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포·미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정부당국은 이상과 같은 화폐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는 布貨의 통용을 금지하려 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는 물품화폐인 포화를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와 병용하거나, 마·면포 등 포화를 법화로 규정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면 조선정부는 왕조 초기에 그 당시의 일반 유통계를 미와 함께 지배하고 있던 포화를 어떻게 법화로 규정하여 유통 보급시키고자 하였는가. 다음에서는 조선정부가 개국 초기에 일시 방편적 조치로 포화를 저화나 동전과 병용하려던 단계를 넘어서 포화를 법화로 규정해 유통 보급시키려 했던 역사적 사실을 대강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초기에 포화를 법화로 통용하자는 논의가 처음 있었던 것은 저화의 통용문제가 결정된 태종 원년(1401)이었다. 사실상 그 당시 법화로 만들어 사용하자고 했던 布幣는 엄격히 말해서 뒷날 법화화한 正布나 常布와는 규격 내지 체재가 다른 것이었다. 중국의 지폐법인 鈔法을 본따서 내구성이 저화보다 강한 담청색의 正5升布를 3척·2척·1척의 길이로 잘라, 문양을 넣고 만들어서 저화 대신 법화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朝鮮布貨」라고 한 포폐는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저화보다는 뒷날 법화로 사용된 포화에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0236)≪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4월 정축. 어쨌든 조선 초기에 저화와 함께 법화로 통용될 것이 논의되었던 포폐는 태종이 저화의 통용을 적극 주장하였기 때문에 한갖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

조선정부는 태종 원년부터 저화를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추진했으나 동 3년에 중단되었고, 그로부터 7년 후인 동 10년에 저화 유통정책을 다시 채택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당국은 저화 유통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물품화폐인 포화의 통용을 억제하는 동시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화의 유통 보급을 적극 시도하였다.

그러나 저화의 유통은 부진하고 실질적으로는 포화가 일반 유통계를 지배하게 되자, 일시의 방편적 조치로서 화폐물품인 포화를 저화와 병용시키는 일을 되풀이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태종 15년(1415)에 이르러 마침내 楮貨全用令을 폐기하고 포화의 통용을 허용함으로써 포화는 더욱 통용이 활발해졌다. 이같이 포화가 공적 지위를 회복해가는 것을 계기로 하여, 정부당국은 태종 15년 4월에 布帛稅, 즉 着稅의 징수를 결정하게 되었다. 착세의 징수는 저화를 유통 보급시키려는 데 동기가 있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포화의 법화로서의 위치를 강화해준 셈이었다.0237)≪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병자.

이후 조선정부는 세종 5년(1423) 9월에 저화 유통의 부진을 보완할 목적에서, 동전 즉「朝鮮通寶」의 주조유통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동전을 저화와 함께 법화로 병용하다가 동전을 전용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동전의 유통이 저화 유통처럼 부진하게 되자 세종 27년(1445) 12월에는 다시 저화를 법화로 유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조선정부가 포화·미곡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화폐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저화와 동전의 유통은 부진하고 일반 유통계는 포화가 미곡과 함께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경국대전≫호전이 반행된 세조 6년(1460) 8월에는 포화를 國幣, 즉 법화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국폐를 3등으로 나누었는데, 상등은 5승포, 중등은 3승포, 하등은 저화였다. 그리고 정부당국은 20분의 1에 해당하는 經印稅를 납부한 포화에 한하여「朝鮮通幣」라는 도장을 찍어 주어, 그러한 포화만이 법화로서 통용될 수 있게 하였다.0238)≪世祖實錄≫권 21, 세조 6년 8월 을묘. 포화에 도장을 찍어주고 경인세를 징수하게 된 동기가 확실치는 않으나, 화폐의 기본적 구성요건인 체재와 품질을 일정하게 규격화하여 포화의 공신력을 강화하는 한편 세수증대에도 동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포화의 經印제도도 세조 10년(1464) 8월에 그로 말미암아 범법자가 속출하고 간사한 무리가 발호하게 된다는 이유로 폐지하였다.0239)≪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8월 기해. 포화의 경인제도 폐지 이유 중에는, 포화는 실용가치가 전제된 물품화폐이기 때문에 그것의 통용을 돕기 위한 경인제도의 실시와 같은 조치가 절실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앞에서 대간 살펴본 바 세조 6년(1460)에발행된≪경국대전≫호전 국폐조에서 포화를 법화로 규정한 내용은 그로부터 14년 후인 성종 5년(1474)에 공포 시행된≪경국대전≫국폐조에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되고 있다.

국가의 화폐는 포화와 저화를 통용한다. 正布 1필은 常布 2필에 준하고 상포 1필은 저화 20장에 준하며 저화 1장은 米 1升에 준한다. 모든 徵贖에는 모두 저화를 사용하고 값을 주고 살 때는 포화와 저화를 반반씩 사용한다.

조선정부가 성종 5년에 이처럼 포화를 주로 하고 저화를 종으로 하는 화폐제도를 공포 시행하였지만, 그 이전부터 저화는 거의 통용되지 않고 포화만이 미곡과 함께 유통계를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이후 포화는 실용가치가 전제된 자생적 물품화폐이기 때문에 17세기 70년대 말부터「常平通寶」가 유일한 법화로서 유통 보급되기 이전까지는 국가의 정책적 뒷받침 없이도 일반 유통계에서 지속적으로 화폐기능을 담당 수행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정부가 왕조 초기에 포·미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화폐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원칙적으로 통용금지 대상이었던 포화를 법화로 규정 통용케 하였다는 사실은, 화폐정책의 한계 내지 그 당시 사화 경제발전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부당국이 법화로 적극 보급시키려던 저화의 유통이 사실상 중단되고, 법화로 규정된 포화가 국가의 정책적 뒷받침 없이도 지속적으로 통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화폐정책의 실패 또는 조선사회의 명목화폐 수용력이 한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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