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3. 화폐의 유통
  • 4) 전폐의 주조 유통 시도

4) 전폐의 주조 유통 시도

조선정부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포·미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해 추진한 화폐정책이 실패하자, 그 보완책으로 포화를 법화로 규정하여 저화와 병용하는 화폐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화폐정책 역시 그 한계 내지 조선사회의 명목화폐 수용력의 한계로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일반 유통계는 포화 및 미곡을 비롯한 각종 물품화폐가 지배하는 시기, 즉 저화나 동전의 유통시도 이전의 물품화폐 유통체제로 복귀하였다. 정부당국은 이같이 물품화폐가 지배하는 상품·교환경제의 현실 내지 역사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화폐제도 개혁방안으로서 箭幣의 주조유통을 시도하였다.

조선정부는 세조 10년(1464) 8월 정부당로자들이 모여 국가의 화폐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전폐를 법화로 주조유통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포화·저화 및 전폐의 통용문제가 제기 논의되었는데, 전폐의 주조 유통은 대다수 당로자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세조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결정되었다. 즉 세조는 역대 왕조의 화폐사용이 한결같지 않았다는 점과 전폐는 비록 옛사람이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이라 해도 軍國에 유익하다면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0240)위와 같음. 세조가 전폐를 주조 유통하게 되면 군국에 유익하다고 한 것이 원활한 화폐통용에 의한 경제적 이익과 군사적 기여를 의미한다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전폐 주조 유통을 바로 저화의 통용이 극히 부진하고 또한 포화가 법화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되었던 經印제도가 폐지되는 시기에 결정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전폐의 주조 유통을 결정한 동기가 화폐제도를 개혁하려는 정책적 고려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폐는 평상시에 법화로 사용하고 유사시에는 화살촉, 즉 무기로 사용한다고 한 데서 전폐 주조 유통을 결정하게 된 동기가 군사적 목적에 있었다는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세조 초기에 여진족이 국경지대를 자주 침범해서 국방에 대한 국왕의 관심이 컸고, 그 당시 정부당국은 水牛角이나 箭竹 등 활 만드는 재료를 확보하는 데 힘썼던 것이다.

이처럼 세조 10년(1464) 8월에 주로 정부당국이 화폐정책 및 군사정책적 배려에서 전폐의 주조 유통을 결정하고, 그 해 11월에 전폐의 주조를 지시하였다. 그 당시 주조를 지시한 전폐는「八方通貨」또는「柳葉箭」이라고 했던 것인데, 기록에 의하면 그 체재와 품질 및 주조 계획량을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연간 주조량은 10만 개, 전폐의 형태는 버드나뭇잎 모양, 鏃의 길이는 1치 8품, 莖의 길이는 1치 7품, 箭幣文은「八方通貨」, 교환비율은 전폐 1개에 저화 3장, 소재는 鐵이었다는 것이다.0241)≪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11월 임술.
元裕漢, 앞의 글(1982).
전폐는 주조명령을 내린 뒤 11월 말 경에 주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전폐의 주조발행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물이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전폐의 주조유통에 대한 전후의 사실을 보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전폐의 주조유통을 시도한 사실을 통해서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전폐를 법화로 주조 유통하게 된 동기가 저화나 동전에 비해 실용가치가 더 큰 화폐를 만들어 쓰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폐를 유사시에는 화살촉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전폐의 주조유통을 결정하게 되었던 동기에는 화폐정책 내지 경제정책 외적인 군사정책적 배려가 강하게 작용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전폐를 주조 유통하려 했던 사실을 화폐가치관이나 화폐정책의 측면에서 볼 때, 저화나 동전의 통용을 시도했던 시기의 그것에 비해 일보 후퇴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전폐의 주조 유통시도는 실용가치 중심의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액면가치 중심의 명목화폐 유통체제로 전환시키려는 진보적인 것이었기 보다는, 그것을 전환시키려다 실패한 데 대한 반동 내지 전·후자를 절충하려는 화폐정책적 배려에 중요한 동기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전폐의 주조유통을 시도한 15세기 중엽의 조선사회는 저화나 동전 등을 법화로 통용하는 명목화폐제도를 보수적 반동없이 수용할 수 있으리 만큼 충분히 발전되어 있지도 못했지만, 또한 실용가치 중심의 전폐나 포·미 등 물품화폐가 저항없이 지속적으로 통용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경제발전이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세조조에 있었던 전페의 주조 유통 시도는 그 중요한 동기가 화폐정책 외적인 정책적 고려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폐의 주조유통을 결정 지시하는 데 그쳤을 뿐 실현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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