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4. 무역
  • 2) 명과의 무역

2) 명과의 무역

태조 이성계는 사대의 예로써 명과의 외교관계를 안정시키려 했으나,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명의 외교정책이 원인이 되어 양국관계는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대 이후에는 조선에 대한 명의 외교정책 병화로 조선정부의 명에 대한 사대외교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전되어, 정치적으로는 별다른 변동없이 2백 년간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과 명 사이에 경제·문화적 교류가 본궤도에 올라 원활해진 것은 세종 11년(1429) 명에 대한 금은 세공이 면제된 것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조선에 과중한 부담이 되었던 금은 세공을 우·마·포 등으로 대납하기로 결정을 본 이후부터 성종조까지 조선정부의 명에 대한 사대교린관계는 여진문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정부가 왕조 초기부터 명에 대해 사대외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매년 몇 차례의 정기 및 임시 사행을 보내고, 명에서는 수시로 특별한 목적으로 사절을 보내왔다. 명은 처음부터 ‘三年一貢’을 규정하였으나 조선정부는 도리어 실리를 취해서 사행을 더욱 자주 보내게 되었다. 즉 조선정부는 왕조 초기부터 正朝使·聖節使·千秋使를, 얼마 후에는 冬至使를 더하여 매년 네 차례의 정기사행과, 謝恩使·奏請使·陳奏使·進賀使·陳慰使·進香使·辨誣使·參覈使 등의 임시사행을 명에 보냈다. 대체로 명에 보내는 사행은 正使·副使·書狀官·從事官·通事·醫員·寫字官·畵員 등 40여 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비록 조선정부가 명에 대한 외교관계에서 명분상 사대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으로부터 내정과 외교면에서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사대외교 관계에서 조선과 명과의 사이가 전혀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각종의 정기 및 임시사행을 통해 사대외교의 예로써 조공을 명에 보냈고, 명은 조공에 대한 답례로 賞賜나 賜與를 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명 사이에는 조공과 상사 등의 형태로 양국 사이에 이른바 관무역이 행해지는 동시에 사행의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조선정부는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정권의 국제적 승인을 얻어 국내통일에 활용하는 동시에 관무역과 사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한편 명은 명목상의 종주국으로서 그 전래의 자존심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역시 조선과의 관무역과 사무역을 통해 경제적 욕망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정부는 태종대부터 금은 세공이 면제된 세종 12년(1430) 2월 이전까지 정조·성절 및 천추사 등 정기사행을 통해 다음과 같은 물품을 명에 조공으로 보냈다. 즉 金銀器皿·螺鈿梳亟·白綿紬·各色苧布·龍文簾席·各色細花席·豹皮·獺皮·黃毛筆·白綿紙·人蔘·種馬 등을 보냈다. 이상 정기사행에 따르는 조공품 이외에도 수시로 파견되는 사은·진하·주청사 등 각종 임시사행에게도 의례적 예물로서 여러 가지 물품을 명에 보냈다. 조선정부가 왕조 초기에 이상과 같이 정기 및 임시 사행을 통해 각종 물품을 조공으로 보내면, 명은 조공에 대한 답례물로서 賞賜 또는 賜與라는 명목으로 각종 綵段·자기·약재·예복·서적·악기·보석·弓材牛角·문방구 등을 조선에 보내왔다.

이상 조선정부가 명에 보낸 조공품 중 금은 세공은 그 당시 국내 금은 생산량으로 볼 때 과중한 부담이었다. 즉 매년 금 150냥과 은 700냥을 명에 보내기로 되어 있는 금은 세공은 조선정부로서 감당키 어려운 부담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금은 세공을 면제받기 위한 외교적 절충을 시도하여, 마침내 세종 11년(1429) 금은 세공을 우·마·포 등으로 대납하게 되었다. 이로써 세종 12년(1430) 2월 이후부터 명에 보내는 조공품 중에는 금·은이 포함되지 않는 반면, 白苧布 4필·麻布 254필·滿花席 23장·滿花方席 30장·黃花席 40장·彩花席 25장·人蔘 40觔이 증가되고 馬 84필·紬 100필 등이 새로 공물 품목에 들어가게 되었다.0242)姜聖祚,<初期 朝·明의 公貿易考>(≪關東大學論文集≫9, 1981). 국내에서는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은 세공을 면제 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 조선정부는 금·은생산을 통제하는 동시에 민간인의 금은 사용은 물론 대외유출도 엄금하였다. 그리고 금은 세공의 면제로 금·은의 중국유출이 금지되는 반면 중국으로부터 소량의 금·은이 국내에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0243)劉元東,<商業>(≪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313쪽.

세종 11년(1429)에 명에 대한 금은 세공이 면제된 이후 조선과 명 사이에 조공과 상사 등의 형태로 행해진 관무역이 별다른 잡음없이 지속되는 한편, 양국의 행사에 의한 사무역도 이루어졌다. 조선의 사행은 북경의 東平館에서, 또한 명의 사행은 서울 남대문안 太平館에서 각기 유숙하게 되었는데, 양국의 사행은 각기 동평단과 태평관을 중심으로 하여 사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조선정부는 태평관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명의 사행과 민간인과의 무역거래를 처음에는 허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의 사행이 가져온 다량의 값비싼 물품을 모두 관청에서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컸기 때문에 민간인의 사무역을 허락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한 예로서 세종 24년(1442) 1월에 명의 사행이 가지고 온 물품을 모두 팔아주기 위해 한성·개성의 부상들로 하여금 貿入케 했고, 그러고도 매진되지 않자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6도 인민에게 정포와 마포를 가지고 와서 貿入할 것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명의 비단류와 조선의 11승 이하의 苧布·麻布·豹皮·人蔘·丹木·白礬·胡椒 등이 태평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무역에서 거래되었다.0244)劉元東, 위의 글, 314쪽. 이상 관무역과 사무역 이외에도 조선 상인과 명의 상인들 사이에서는 양국이 법으로 금하는 潛貿易이 이루어졌다.0245)朴南勳,<朝鮮初期 對明貿易의 實際>(≪關東史學≫1, 1982).
延正悅,<朝鮮初期 貿易現況과 그 法規에 관한 硏究>(≪法史學硏究≫4, 1977).

흔히 조선 초기 명과의 관무역 및 사무역을 통해 명나라보다는 조선측에서 더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과 명의 무역에서 경제적 득실을 논할 때, 다음의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대체로 조선의 수출품 중에는 금·은·우·마 등과 같은 생산재 내지 자본재가 다량 포함되어 있는 반면, 조선의 수입품은 비단·약재·문방구 등 소비품이나 사치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명으로 보낸 물품에 비해 더 많은 품질 좋은 물품을 명으로부터 수입하여 일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조선이 명과의 무역에서 반드시 더 큰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으로 평가하기는 여러울 것 같다. 조선에서 수입한 명의 물품은 국내의 소비·사치풍조를 조장하는 동시에, 금·은·우·마 등 생산재 내지 자본재의 대량 국외유출은 궁극적으로 사회생산력과 상품·교환경제의 발전을 위축시켰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견해에 대한 논거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淸에 금·은을 주고 비단·털벙거지·약재·완구류 등 소비·사치품을 수입해 오는 대청무역을 국내의 소비·사치풍조를 조장하고 해당 수입품의 국내 생산력을 위축시키게 되는 등 국가의 크나큰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비단을 직접 수입할 것이 아니라 그 직조기술을 도입해 와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0246)元裕漢,<星湖 李翼의 商業制限論>(≪人文科學≫59, 延世大, 1988).
―――,<朝鮮後期 實學者의 鑛業論硏究-茶山丁若鏞의 鑛業國營論을 中心으로->(≪韓國近代社會經濟史硏究≫, 1985).
또한 조선 초기에 국내에서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은 세공을 면제받으면서, 조선정부가 금은광 개발을 통제하고 금은의 사용을 엄금했던 사실은, 금은 생산의 위축은 물론 사회생산력 내지 상품·교환경제발전을 저해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0247)金柄夏,<李朝前期의 貨幣流通-楮貨流通을 中心으로->(≪慶熙史學≫2, 1970).
元裕漢, 위의 글(1985).
이와 같은 사실로써 조선과 명과의 무역이 국내 사회경제발전에 끼친 부정적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