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4. 무역
  • 3) 여진과의 무역

3) 여진과의 무역

조선정부가 교린정책으로 대응한 여진은 제반 사회생산력의 미숙으로 주요 생활 필수품을 조선과 명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여진은 의식주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면 종종 북방 변경에 침입하여 소요를 일으켰다. 이에 조선정부는 침략해 오는 여진을 방어, 소탕 내지 정벌하는 한편 회유무마책을 썼다. 회유무마책으로서는 여진의 귀화를 권장했으며, 조선의 명예관직을 받은 여진인은 일정한 규정에 따라 1년 또는 수년에 몇 차례씩 서울에 와서 進上과 回賜·賞賜 형태의 관무역을 할 수 있었다. 이상 조선과 여진 사이의 진상과 회사·상사는 앞에서 살펴본 바 명과 조선 사이의 朝貢과 賞賜·賞與와 본질적으로 성격을 같이 하는 관무역이라 할 것이다.

조선과 여진 사이에서는 관무역 뿐만 아니라, 여진인이 유숙하는 동대문안 北平館을 중심으로 일반 상인이 참여하는 사무역도 이루어졌다. 북평관의 사무역은 사무역에서 어떤 종류의 물품이 교역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금·은·보석·12승포·마포 등의 교역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그 이외의 물품의 거래는 묵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 북평관의 사무역은 진상과 회사·상사 형태인 관무역의 부속적 활동이었지만, 관무역 이상의 교역성과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0248)李仁榮,<鮮初女眞貿易考>(≪震檀學報≫8, 1937).

그리고 여진은 관무역과 사무역을 통해서는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국경교역을 위해 貿易所의 설치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정부는 태종 5년(1450) 5월 공식적으로 鏡城·慶興 두 곳에 무역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두 곳에 무역소를 설치 운용하게 된 동기는 여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 필수품인 염·철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함으로써 변방의 소요를 예방하려는 데 있었던 것 같다.0249)李仁榮, 위의 글.

이처럼 조선 초기에 조선과 여진 사이에 관무역·사무역 및 무역소 교역이 이루어졌고, 이같은 무역을 통해 쌍방간에 여러 가지 토산물들이 교환되었다. 즉 조선은 馬·土豹·土豹皮·熊皮·鹿皮·海靑·鷹·魚膠 등 주로 천연산물을 여진으로부터 수입하고, 여진에게는 금·은·보석·저포·마포·면포·鍮鐵農具·식기·紙物·米豆·鹽醬 등 가공품과 식료품을 수출하였다. 이상 조선과 여진간의 거래 품목의 내역으로 미루어 보아서, 대체로 목축과수렵에 의해 획득한 조잡한 모피류 등 천연산물을 조선에 수출하고 의료·식료 등 생활 필수품과 철제농기구 등을 수입해 간 여진쪽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게 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0250)李相佰,≪韓國史-近世前期篇-≫(震檀學會, 1962), 134∼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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