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4. 무역
  • 4) 일본과의 무역

4) 일본과의 무역

조선정부가 여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교린정책으로 대응한 일본은 조선과 명으로부터 침탈행위나 평화적 교역을 통해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의 일본에 대한 교린정책은 여진에 대해서 그러했듯이, 왜구침탈을 무력으로 응징하는 한편 회유책으로서 관무역이나 사무역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양면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태조는 즉위 이전에도 왜구를 토벌하는 데 힘썼지만, 그 이후에도 海防을 엄히 하는 한편 일본막부에 사람을 보내 왜구의 금압과 동시에 무역거래를 촉구하였다. 이에 일본도 回禮使를 보내는 등 조선에 대해 성의를 보이기 시작함으로써 양국의 교통은 점차 활발해졌다. 일본 서해안의 대호족들은 조선에 사절을 보내 왜구금압을 약속하고 俘虜를 쇄환하는 대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얻어갔고, 그 뒤에는 대호족을 비롯해 서부 각 지방의 소토호들까지 매년 使船을 보내 무역거래를 시도하였다. 그 중에서도 조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대마도 宗氏였다. 대마도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조선과 일본간의 중개 역할을 맡게되는 특수한 사정도 있지만,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하지 않고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대마도는 이미 고려 말부터 朝貢과 동시에 미곡을 回賜받는 관계에 있었다. 또한 조선정부도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라 하여 가장 우대했고, 대마도는 통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대마도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중앙정권인 足利幕府와의 관계도 호전되어 막부의 사절과 조선의 報聘使·回禮使·通信使 등 사절의 왕래가 빈번하게 되었다. 한편 이들 일본인에게는 여진의 경우처럼 회유무마책을 써서 受職倭人이라 하여 관직을 주어 우대했고, 귀화한 向化倭人에게는 토지와 집을 주어 국내 거주를 허락하였다. 또한 조선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興利倭人에게는 국내에 체재하고 있는 동안과 귀환하는 데 필요한 식량을 지급하였다.

이상 조선정부의 회유무마책은 본래 왜구 방지를 위한 것이었음에도 왜구가 庇仁·海州 연안을 침탈하는 등 창궐하자 왜구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조선정부가 세종 원년(1419)에 대마도를 정벌하는 강경책을 쓰게된 것은 왜구의 창궐이 그 소굴인 대마도 도주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세종은 다시 회유무마책을 써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교역을 통제하고 海防도 공고히 하는 등 和戰 양면책을 썼다. 이같은 정책이 점차 효과를 거두어 세종대 이후로는 왜구의 침략회수가 격감되고, 그 지역도 남해안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정부가 일본인의 교역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은 그들의 교역 활동지역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태종대부터 조선정부가 지정한 일정한 포구에만 興利倭船의 출입을 허락하고 그 곳에 倭館을 두어 교역과 접대장소로 삼게 하였다. 그 이유는 교역의 특수권익을 허용받은 일본인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는 일이 번거롭고 재정소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태종 초에 이미 지정했던 동래의 富山浦·熊川의 乃而浦, 그리고 세종 8년(1426)에 추가로 지정한 울산의 鹽浦 등 3포에만 일본인의 왕래를 허락하고, 교역과 고기잡이가 끝나면 곧 돌아가도록 하였다. 또한 조선정부는 세종 25년(1443)에 대마도주와 癸亥約條를 맺고 일본 歲遣船의 수와 歲賜米의 양을 제한하였다. 즉 진상무역선인 세견선의 수를 제한하여 대마도주 종씨의 세견선은 50척, 기타는 대개 1내지 3∼4척으로 하였고, 대마도주에게 사급하는 세사미도 미·두를 합해 2백석으로 제한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일본과의 외교 내지 무역거래는 대체로 왜란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상에서 교린을 표방한 조선 초기의 일본과의 관계는 왜구를 방지하기 위해 회유무마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고, 일본은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양국관계의 진전과정을 대강 살펴보았다. 이같은 양국관계의 진전과정에서 주로 일본인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무역거래로서는 우선 일본의 진상과 조선의 回賜 형태로 행해지는 官貿易이 있다. 또한 浦口와 星州 花園縣 및 서울의 倭館·東平館·亞平館 등의 장소에서 사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가가 불법적 무역거래라 하여 금지하였던 潛貿易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0251)李鉉淙,≪朝鮮前期對日交涉史硏究≫(韓國硏究院, 1964), 126∼216쪽.

대체로 조선 초기의 일본 진상품 중에는 銀·銅·鉛·硫黃·刀劒·蘇木·丹木·白礬·甘草·砂糖·胡椒·水牛角·象牙 등이 있고, 진상에 대한 조선정부의 回賜品은 綿布·米를 비롯해 苧布·麻布·人蔘·花文席·豹皮·書籍 등이었으며, 서적 중에서도 대장경에 대한 일본측의 욕구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 진상과 회사 형태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관무역 이외에도, 사무역이나 잠무역을 통해서 관무역보다 훨씬 더 많은 수량의 물품이 조선상인과 일본상인 사이에 거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0252)李鉉淙, 위의 책.

흔히 조선 초기 일본과의 교린외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양국간에 이루어지는 관무역·사무역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무역거래에서 주로 일본측이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조선은 손실을 감수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조선정부가 일본에 수출할 면포·마포·저포 및 미곡 등 생활 필수품을 대량 조달하는 과정에서 애로가 적지 않았고, 또한 일부 수입품이 사치품에 속했다고 하는 등 조선과 일본간의 무역거래가 가지는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은·동·연·유황·수우각 등 일본에서 수입하는 상당부분의 물품은 동전·유기·무기 및 각종 공산품의 중요한 원료로 사용되었음은 물론, 그 중 특히 은은 칭량은화로 국내에서 사용되고 중국과의 무역결제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주로 소비재를 수출하고 생산재 내지 자본재를 수입하는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거래는 국내의 사회생산력과 상품·교환경제 발전을 증진시키는 등 거시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조선측이 얻은 경제적 이득 역시 작게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0253)李鉉淙, 위의 책.
宮原兎一,<朝鮮初期の銅錢について>(≪朝鮮學報≫2, 1951).
韓相權,<16世紀 對中國私貿易의 展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元裕漢,<朝鮮後期 銅錢原料의 供給形態>(≪人文科學≫32, 연세대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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