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1. 야철수공업과 철광업
  • 1) 신도 건설공사와 무기제조 공역
  • (1) 한양의 신도 건설공사

(1) 한양의 신도 건설공사

조선은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고 외침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초부터 신도 건설과 무기생산에 주력하였다. 한양의 신도 건설공사를 위해「太廟造成都監」,「京城修築都監」,「新都宮闕造成都監」,「都城造築都監」,「離宮造成都監」,「開川都監」,「行廊造成都監」,「京城修補都監」,「都城修築都監」등의 여러 權設衙門을 태조대부터 세종대에 걸쳐 설치하고 신도 건설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태묘조성도감」은 태조가 신왕조를 개창한 후 한양으로의 천도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왕조개창의 권위를 갖추기 위하여 우선 개경에 종묘를 세우려고 설치한 것이다.0260)≪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10월 정사. 태조 3년(1394) 8월에 한양이 신도로 결정되자 신도의 궁궐을 조성하기 위하여「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였다.0261)≪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9월 무술. 승도들을 모집하여 宗廟役事를 시작하였고,0262)≪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12월 기사. 도감이 설치된 지 1년만에 태묘와 궁궐이 완성되었다.0263)≪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9월 경신. 이어 도성을 축조하기 위해 동왕 4년(1395) 윤 9월에「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하고,0264)≪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윤 9월 갑술. 경상·전라·강원·서북면 안주 이남의 民丁 118,070명을 징발하여 도성을 축조하였으며,0265)≪太祖實錄≫권 10, 태조 5년 1월 무진. 동왕 5년(1396) 8월에는 다시 경상·전라·강원도의 築城役夫 79,400명을 징발하였다.0266)≪太祖實錄≫권 10, 태조 5년 8월 신묘.

그러나 태조 4년 이후부터 계속된 축성작업으로 민력이 고갈되자 京都의 營繕役을 쉬게 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태조는 동왕 5년 윤 5월에「신도 궁궐조성도감」을 혁파하고 그 사무를 繕工監에 귀속시킨 뒤 京外工匠들을 방환하였다.0267)≪太祖實錄≫권 10, 태조 5년 7월 병인·병자 및 권 13, 태조 7년 윤 5월 병술.

그러나 태조 7년(1398)에 일어난 왕자의 난과 정종의 즉위 및 개경으로의 환도 등 일련의 정치적 변화는 한양신도건설을 한동안 중단케 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한양으로의 천도논의는 다시 일어났지만 毋岳으로 천도하자는 신하들과의 의견대립으로 태종 5년(1405) 경에야 천도가 가능하였다. 그런데 태종은 태조가 지은 경복궁은 왕자의 난 등 많은 재난이 발생한 궁궐이라고 하여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가재정의 낭비, 백성들의 괴로움을 이유로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자 새로운 궁궐을 축조하려고 설치하였던「이궁조성도감」을「궁궐수축도감」으로 바꾸고 경복궁을 수습하여 천도하였다.0268)≪太宗實錄≫권 8, 태종 4년 9월 신해. 이후에 신하들의 반대상소가 뜸해지자 도감의 명칭을 다시「이궁조성도감」으로 바꾸고 창덕궁을 건조케 하여 동왕 5년 10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0269)≪太祖實錄≫권 10, 태조 5년 10월 신사. 도성 축조를 위해서는 동왕 13년(1413) 8월에「경성수축도감」이 설치되었고,0270)≪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8월 정미. 다시 동년 11월에「경성수보도감」이 재설치되었며,0271)≪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11월 신묘. 동왕 16년(1416)에 다시「도성수보도감」이 설치되었다.0272)≪太宗實錄≫권 32, 태종 16년 10월 신미. 도성수축공사는 세종대에 와서 활발해졌다. 세종 3년(1421)에「도성수축도감」을 설치하여 도성 중에 붕괴된 곳을 보수하고, 토성으로 축조된 곳은 석성으로 교체하였다. 都城役에는 각 도의 봉족 및 잡색군 중에서 役軍 322,400명과 工匠 2,211명이 징발되었고,0273)≪世宗實錄≫권 13, 세종 3년 10월 무오 및 권 14. 세종 3년 12월 기해. 도성수축공사가 끝나자 다시「城門都監」을 설치하였다.0274)≪世宗實錄≫권 15, 세종 4년 2월 신해.

시가지의 건설공사는 市廛行廊工事가 주였는데 태종 12년(1412) 2월에「개천도감」을「市廛行廊都監」으로 개칭하고 役徒 2,035명을 동원하여 시전행랑을 건축하였다.0275)≪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2월 경오. 이 공사는 동년 3월에 끝나 거기에 동원된 각 도의 목공 200여 명을 모두 방환하였다.0276)≪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3월 무신. 동왕 12년 7월에는 다시 시전행랑의 조성공사를 위하여 목공 200여 명이 각 도에서 징발되었고,0277)≪太宗實錄≫권 24, 태종 12년 7월 경인. 동년 10월에 행랑조성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이듬해 2월에 다시 재개되었다. 여기에는 役丁 2,141명이 동원되었고,0278)≪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2월 을묘. 그 중 장인은 200명이었다.0279)≪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4월 계축. 동년 5월에 행랑조성공사가 끝나기까지 총 2,641명의 역군이 동원되었다.0280)≪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5월 갑오. 이와 같이 신도건설에 동원된 인력은 工曹의 官匠도 있지만 주로 기술있는 승려나 지방 농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작업의 숙련도에 차이가 있었고 공역 중 미숙한 공장은 방환되기도 하였다.0281)≪太祖實錄≫권 13, 태조 7년 5월 기유. 그러나 신도 건설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태종 15년(1415)에 이르러 정부는 신도 건설에 동원된 공장들을 중앙관서의 관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公役이 끝난 목수 중 솜씨가 뛰어난 100명을 선공감에서 木手籍을 작성, 등재하였다.0282)≪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정축. 그리하여 이들은 이후 선공감의 관장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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