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1. 야철수공업과 철광업
  • 3) 민간야철수공업의 성장과 철물수취제도의 개선
  • (1) 대납제의 적용

(1) 대납제의 적용

태종 7년(1407)에 정부는 염철법과 철장제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철장도회제를 적용하게 된 것이지만, 철장도회제의 성립은 한편으로 농민층에 의한 사적 철물생산을 자극하게 되었다. 철장의 취련군으로 얽매여 있었던 농민들은 철장제가 혁파됨으로써 점차 여가를 틈타 철광의 私採를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정부는 민간의 철광채취를 금하지 않았으므로「鐵匠」곧「正鐵匠」들에 의한 철광의 사사로운 채취가 이루어졌다.「철장」은 철제품을 제조하는 장인이 아니라 철제품의 원료철만을 생산하던 일종의 철광업자였다. 조선 초기에 정부는 이들 철장들에 의한 철광개발을 장려하기 위하여 철장세를 부과하지 않았다.0356)≪成宗實錄≫권 27, 성종 4년 2월 임신조를 보면 鐵物을 製鍊하여 器具를 제작하는 鑄鐵匠과는 달리 正鐵을 제련하기만 하였던 鐵匠에게는 課稅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 5년(1405)의 천도 후 동왕 7년에 철장도회제가 성립되어 철장들에 의한 철광채취가 활기를 띨 무렵에는, 신도 건설공사나 군기감의 무기제조 등으로 각종의「都監」과 선공감 및 군기감에 얽매였던 서울의 각 工匠들에게도 사적 생산의 겨를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의 공장들에 의한 원료철의 수요가 증가하자 철물 상인들은 직접 철산지의 철장들로부터 철물을 구매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멀리 충청도 등지에서 구입하기도 하지만0357)≪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윤 9월 계묘. 대개는 철산지가 많고 서울에서 가까운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황해도는 전술한 鐵所干 등 많은 철장들이 철물생산에 종사하고 있어서 철물상인들은 각종 상품을 싣고 이 곳으로 몰려 들었다.0358)≪端宗實錄≫권 3, 단종 즉위년 윤 9월 신미. 그렇다고 해서 철장들이 생산한 원료철의 판로가 서울의 공장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태종 6년(1406)부터는 鏡城·慶源貿易所를 통한 여진과의 水鐵貿易도 공인되었으며0359)≪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5월 기해. 일본으로도 정철을 수출하고 있었다.0360)≪世宗實錄≫권 61, 세종 15년 윤 3월 갑인.

어떻든 태종 7년 이후 철장들에 의한 철광채취가 활기를 띠고 서울의 공장들이 사적 생산에 종사하게 되자 동왕 10년(1410) 경에는 정부가 이들을 다른 공장들과 함께 당시의 京工匠案으로 보이는 과세대장에 올리고 매월 楮貨 1장씩을 匠稅로 부과하였다. 그러나 경공장들이 영업을 중단하고 납세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한때 징세를 중지하기도 하였지만0361)≪太宗實錄≫권 21, 태종 11년 정월 갑자·계유. 계속 실시되었고, 동왕 12년(1412)「行廊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착수한 鐘樓 일대의 행랑공사가 끝난0362)衫山信三,<麗末鮮初代の造營工事とその監董者について>(≪朝鮮學報≫2, 1951).
申榮勳,<太祖廟漢陽城建設監役官考>(≪鄕土서울≫43, 1985).
元永煥,<漢陽遷都와 首都建設考-太宗代를 中心으로->(≪鄕土서울≫45, 1988).
동왕 14년(1414)에는 오히려 저화 4장씩으로 증세하였다.0363)≪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12월 신미. 하지만 일률적인 과세는 중소규모 공장들의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이듬해에는 각 공장들의 수익액에 따른 分等收稅法을 적용하여 상등공장에게는 매월 저화 3장, 중등에게는 2장, 하등에게는 1장씩을 각각 부과하였다.0364)≪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기사.

태종 5년의 천도와 동왕 7년의 철장제 혁파로 서울의 신도 건설에 종사해 온 공장들도 점차 公役에서 벗어나 사적 생산에 종사하게 되고, 각 철장에 상시 부역하던 취련군들도 철장으로서의 부업을 갖게 되었다. 한편 앞에서 서술한 각 계수관·영·진의 무기제조장에 상시로 얽매었던「月課匠人」들, 곧 야장들에게도 정부가 동왕 15년(1415) 3월부터 7월까지 귀농토록 조처한데 이어 이듬해에는 다시 大司憲 金汝知의 상소로 군기감과 함께 계수관·영·진의 月課軍器役을 모두 정지시켰다.0365)≪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갑인·무오. 월과장인들에 대한 이러한 조처는 조선 전기 야철수공업의 성장에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당시 각 계수관과 영·진의 월과장인들은 兵船·火砲·弓矢·槍劍·衣甲 등 각종 무기의 제작과정을 통하여 철물을 다루어 온 장인들이었다.0366)≪太宗實錄≫권 14, 태종 7년 7월 무인 및 권 16, 태종 8년 12월 정유.
≪世祖實錄≫권 27, 세조 8년 2월 을미.
이처럼 다양한 무기제조기술을 닦았던 월과장인들이 公役에서 벗어나 사적 생산을 도모하게 됨에 따라 태종 15년 이후에는 점차 각종의 철물제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각종의 철물제조업 가운데에서도 역시「철장」들의 철광채취업을 통하여 널리 생산되던 정철과 수철을 소재로 한 제품생산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곧 당시의 철물제조업은 일반농민들의 수요에 응하여 정철로써 刀鎌類를 주조하던「鑄鐵匠」과 수철로써 釜鼎類를 주조하던「水鐵匠」들에 의한 야철수공업이 발달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지방의 鐵匠이나 鑄鐵匠·水鐵匠들은 그 곳 수령들의 새로운 착취대상이 되었다. 수령들은 이들로부터 현품을 착취하기도 하지만 수령이 직접 철물제 조장을 설치하고 장인들을 모취하여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태종 18년(1418)에 사헌부가 啓請한 내용을 보면 “判晉州牧使 柳琰이 3개소에 冶爐를 설치하고 선물용 칼(刀子)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낫(鎌)을 제조 판매해왔다”는 것이다.0367)≪太宗實錄≫권 35, 태종 18년 3월 신미.

그러나 이처럼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철물제조업자들은 독립된 자영수공업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수철장들은 10여 명 이상의 인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각 지방의 주철장이나 수철장들에 의한 철물제조업이 성장하게 되자 정부는 이들도 과세대상으로 지목하여 外工匠案에 등록하였던 것 같고 그 중 생산규모가 비교적 컸던 수철장들로부터 장세를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세종 7년(1425)에는 각 도 각 읍의 수철장들을 고용인 수에 따라 20명 이상을 大爐冶, 15명 이상을 中爐冶, 14명 이하를 小爐冶로 등급을 나누고 稅鐵이나 稅米·錢을 부과하였다.0368)≪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9월 무술.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지방의 철물제조업 분야에는 鍮器製造業도 성장하고 있었다. 세종 5년(1423)에 정부가 銅錢을 주조할 무렵 銅鑛에 종사한 장인들 중 많은 수가 鍮鐵匠으로 전화된 듯하다. 유철장에게도 匠稅를 부과하였다.0369)≪經國大典≫권 2, 戶典 雜稅. 이처럼 각 도 각 읍의 철장과 수철장·주철장·유철장 등은 각기 크고 작은 작업장을 갖추었고, 철장을 제외한 각 장인들은 호조에 정액의 장세를 납부하면서 각기 광산을 채굴하거나 제품을 생산하는 등 독립된 자영수공업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태종 15년을 전후하여 철장·수철장·주철장들에 의한 철광채취업과 철물제조업이 성장할 무렵 철장도회제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농민들의 철장도회제에 대한 불만의 요인은 일일이 상고할 수 없지만 우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정부가 농민들에게 계속 鐵場役을 강요해야 할 만큼 관청의 철물수요가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간 정부가 강력히 추진해 왔던 신도 건설공사는 세종 4년(1422)에 이미 도성의 석축공사마저 끝난 상태였고0370)≪世宗實錄≫권 15, 세종 4년 2월 경술. 무기제조업도 태종 16년(1416)에 경·외의 月課軍器를 중지할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세종 또한 동왕 11년(1429)에 말했듯이 ‘國家無虞’한 형편이었다.0371)≪世宗實錄≫권 45, 세종 11년 7월 기유. 둘째는 철장도회제 자체가 지닌 갖가지 폐단이었다. 철장도회제하에서는 철장소재지 읍의 경우에도 철장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농민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인근 제읍의 경우에는 수십 리 또는 백여 리가 넘는 곳을 왕래해야 하였다. 더구나 작업기간의 식량을 직접 지고 다녀야 하는 고통은 물론 빈농들에게는 식량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0372)≪世宗實錄≫권 39, 세종 10년 정월 신해. 거기에다 鐵鑛役 자체도 고역이었으며 특히 공철량을 충당하기 위해서 工期를 지연시킴으로써 생업에 대한 피해도 적지 않았다.0373)≪世宗實錄≫권 56, 세종 14년 4월 을사.

이처럼 정부의 무절제한 착취와 철장도회제가 지닌 운영상의 갖가지 결함으로 말미암아 세종대에는 철장역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농민들의 철장역에 대한 이런 불만은 관찰사들에 의해 정부에 반영되고는 있었지만 철장도회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春等이나 秋等 또는 춘추 양등의 철장역을 일시 중단토록 요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철장역을 일시 중단할 것을 요청하는 관찰사들의 상소는 빈번해졌고 철장역이 중지되는 횟수도 늘어났다.

세종 즉위년(1418)에는 ‘旱荒’을 이유로 경상도의 그 해 공철이 감면되었고0374)≪世宗實錄≫권 1, 세종 즉위년 8월 신사. 동왕 원년 10월에는「東征」으로 이듬해의 각 도 공철을 감면하였으며0375)≪世宗實錄≫권 5, 세종 원년 12월 병신. 동왕 4년에는「都城役」이 끝남으로써 쓰고 남는 철물로 그 해의 공철을 代充토록 결정하였다.0376)≪世宗實錄≫권 15, 세종 4년 2월 경술. 다시 동왕 6년에는 ‘年儉’을 이유로 충청도의 春等貢鐵을 반감하였고0377)≪世宗實錄≫권 23, 세종 6년 정월 정해. 동왕 9년과 10년에는 ‘久旱失農’을 충청도의 양년 秋等貢鐵을 감면하였으며,0378)≪世宗實錄≫권 39, 세종 10년 정월 신해. 이어 동왕 11년에는 충청도의 철장도회 1개소를 폐쇄하였다.0379)≪世宗實錄≫권 45, 세종 11년 7월 기유. 동왕 14년 4월에는 ‘新都元備’를 이유로 경상도의 추등공철이 감면되었고0380)≪世宗實錄≫권 56, 세종 14년 4월 을사. 동왕 21년에는「歲斂」으로 충청도의 그 해 秋等과 이듬해의 春等貢鐵이 감면되었다.0381)≪世宗實錄≫권 86, 세종 21년 9월 무진.

이처럼 세종대에는 충청도와 경상도 각 관찰사들이 상소를 올려 都城役이 끝났다든지 新都가 완비되었다가 때로는 旱荒·年儉·久旱·歲斂 등을 이유로 鐵場役의 중지를 요구함으로써 그때 그때 철장역이 중지되었다. 그런데 관찰사들이 철장역 중지를 요구한 이유가 ‘新都完備’든 ‘久旱失農’이든 간에 그것은 대체로 관찰사들이 농민들의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는 관찰사들이 제시한 명분에 의지하여 농민들의 피역저항을 무마시켜 온 것이다. 이 때문에 문종은 동왕 2년(1452)에 承旨들에게 지시하기를 “요즘 정부가 철물을 사용할 곳이 많아 철장역이 고된 줄 알면서도 해마다 농민들에게 철장역을 지게 하여 매우 괴로웠다. 호조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관아의 鐵物實數와 매년의 所納·所用數를 헤아려 조정하고 수년 또는 1, 2년간 철장역을 중지토록 하되 불가능하면 농민에게 피해가 큰 春等을 폐지토록 하라”고0382)≪文宗實錄≫권 12, 문종 2년 2월 정축. 하였다. 그러나 단종 이후에도 춘추 양등의 철장도회역이 계속되어 관찰사들에 의한 철장역 중지를 요구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단종 2년(1454)에는 ‘連歲失農’을 이유로 함경도의 그 해 秋等과 이듬해 춘추 양등의 공철을 모두 감면하였고,0383)≪端宗實錄≫권 12, 단종 2년 8월 기축. 세조 원년(1456)에는 ‘久旱’을 이유로 함경도를 제외한 각 도의 秋等貢納이 감면되었다.0384)≪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8월 기유. 동왕 6년에는 단양 등 10개 읍만 ‘失農’을 이유로 그해의 춘등공철을 감면하였다.0385)≪世祖實錄≫권 20, 세조 6년 4월 정미.

이처럼 세종 즉위년(1417) 이래 세조 6년(1461)에 이르기까지 44년간 사료상에 나타난 貢鐵減免件數만도 11건이 넘었다. 각 도 단위로 감면되기도 하고 각 도의 공철이 모두 감면되기도 하였으며, 춘등이나 추등공철, 또는 춘추 양등의 공철이 감면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부가 각 도 관찰사들의 공철감면 요청을 받고 농민의 피역저항을 무마하기 위하여 철장역을 자주 중지시키기는 하였지만 그것으로 철장도회제가 지닌 폐단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철장도회제를 완전히 혁파해버리거나 아니면 농민들의 이해가 충분히 반영된 새로운 수취제도를 모색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세종·세조 연간에 철장역을 지속시킬 수 없을 만큼 농민들의 피역저항이 심화된 이면에는 철장도회제가 지닌 폐단만이 아니라 철장도회제를 폐지해도 고철을 수취할 수 있을 만큼 철물장인들에 의한 사적 철물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태종 연간에 철장역에서 벗어난 취련군이나 사적 생산의 기회를 얻은 각 계수관·영·진의 월과장인 중 무과세의 철장이나 納稅自營의 水鐵匠·鑄鐵匠으로 성장한 장인들은 이제 公役日을 제외하고는 야철수공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한편 일반농민들 중에서도 다소 부유한 농민들은 야철수공업자나 철물상인들로부터 자기 몫의 공철을 손쉽게 사서 바칠 수가 있었다. 야철수공업의 성장과 부민층의 공철 매납요구는 철물의 사회적 수요를 증대시킴과 도시에 수령이나 부상들의 대납행위를 조장하였다.

일찍이 수령들은 직접「冶爐」를 관내에 설치하고 제품을 생산 판매할 뿐 아니라0386)≪太宗實錄≫권 35, 태종 18년 3월 신미. 官鐵을 도용하거나0387)≪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7월 계묘. 농민들로부터 철물을 수탈하고 있었으며0388)≪世宗實錄≫권 32, 세종 8년 6월 무진. 마침내는 철장도회의 공철마저 대납하는 자들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세종 21년(1439)에는 철장도회인 산음·합천의 所納鐵器를 僧 惠會가 正鐵로 대납하기를 자원하자 세종이 이를 허락했다고 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번갈아 논박한 사실이 있었다.0389)≪世宗實錄≫권 85, 세종 21년 4월 기해. 그리고 문종 즉위년(1450)에는 철장도회관인 충주목사 林孝忠과 판관 林繼中이 군기감 所納貢鐵을 鄕吏·日守로 하여금「除役代納」케 하였고0390)≪文宗實錄≫권 5, 문종 즉위년 12월 기해. 단종 2년(1454)에는 역시 철장도회관인 龍宮縣監 李遇陽이 공철을 관비로 대납하고 농민들로부터 鐵價를 수취하여 파면당한 사실도 있었다.0391)≪端宗實錄≫권 11, 단종 2년 7월 신미.

이러한 수령들의 대납행위가 그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철장도회에 부역하는 일부 부민들의 이해도 일정하게나마 반영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세조 7년(1462)에「刊經都監」을 설치하고0392)≪世祖實錄≫권 24, 세조 7년 6월 을유.「전세」「공물」에 대한 대납제를 실시하면서 철장도회의 공철도 미곡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대납제는 대납인으로 하여금 공철가의 배에 상당한 미곡을 부역농민들로부터 수취토록 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부역농민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제도였다. 따라서 정부는「從民情願」의 원칙 하에 공철의 현물납부를 허용하였고 대납을 원하는 자에 한해서만 미곡으로 대납케 하였다.0393)≪睿宗實錄≫권 3, 예종 원년 정월 임오.

전세·공물의 대납권은「刊經都監」이 조종하고 있었다.「간경도감」은「納分制」를 적용하여 대납인으로 하여금 대납가의 1/3을 都監에 미리 납입토록 한 뒤 대납을 허가하였고 대납인이 공물을 모두 납부한 후에「納貢文牒」을 발급하였다. 이 때 공철의 대납은 각 읍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각 읍은 공철의 대납미를 수렴하여 官庫에 쌓아 두었다가 대납인이 오면「납공문첩」을 확인한 후 대납미를 지불하였다. 이 때 정부가 상정한 공철(正鐵)의 대납미가는 풍년에는 공철 1량에 價米 3승, 흉년에는 2승으로 책정하였다. 그러나 다른 공물가에 비하여 다소 높게 책정된 편이었으므로 세조 10년(1465) 12월에0394)≪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12월 별술. 대납가미를 풍년에는 공철 1량에 1승 5합, 흉년에는 1승으로 감가 책정하여 이듬해부터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공철의 대납미가가 반감되었던 세조 10년(1464)에는 각 도 각 읍의 공철량도 반감되었다.0395)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303쪽. 공철량이 이 때에 이르러 반감된 이유를 상고할 수는 없다. 다만 정부의 대납제 실시는 사실상 부역농민들에게 공철의 부담을 두 배로 늘린 셈이기 때문에 공철을 대신 반감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공철량의 감액된 총량이 얼마였는지도 사료상에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경상도의 경우를 살펴볼 때 앞의<표 1>과 다음의<표 2>에서 단종 2년(1454)의≪世宗實錄地理志≫에 명시된 공철량이 56,879근인데 비하여 예종 원년(1469)의≪慶尙道續撰地理志≫에는 21,132근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도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각 읍 명 세 공
정철량
비 고
<경주도>
慶 州 府
密陽都護府
大邱都護府
淸 道 縣
梁 山 郡
興 海 郡
蔚 山 郡
迎 日 縣
長 鬐 縣
機 張 縣
東 萊 縣
彦 陽 縣
慶 山 縣
玄 風 縣
昌 寧 縣
靈 山 縣
淸 河 縣

920근
570근
409근
409근
409근
409근
479근
409근
360근
290근
360근
409근
339근
339근
353근
339근
339근

府東史等伊川産沙鐵





郡北達川山産水鐵




沙鐵産縣西石南山




 
<안동도>
寧海都護府
醴 泉 郡
永 川 郡
豊 基 郡
義 城 縣
盈 德 縣
眞 寶 縣
軍 威 縣
義 興 縣
仁 同 縣
河 陽 縣
比 安 縣
新 寧 縣

430근
360근
360근
360근
290근
339근
290근
339근
209근
339근
339근
339근
290근










 
<상주도>
尙 州 牧
星 州 牧
善 山 府
陜 川 郡
金 山 郡
龍 宮 縣
聞 慶 縣
知 禮 縣
開 寧 縣

50근
500근
479근
500근
409근
360근
339근
360근
339근

*550斤인 듯함


冶爐縣心妙里産沙鐵




 
<진주도>
晉 州 牧
金海都護府
昌原都護府
咸 陽 郡
昆 陽 縣
宜 寧 郡
三 嘉 郡
河 東 縣
南 海 縣
泗 川 縣
居 昌 郡
安 陰 縣
固 城 縣
鎭 海 縣
漆 原 縣

550근
479근
479근
479근
409근
339근
360근
339근
290근
360근
409근
36?근
339근
209근
339근


沙鐵産府東甘勿也
府南吹無山産沙鐵



縣西黃山産沙鐵




*360斤인 듯


 
歲貢正鐵
합 계
20,632근(*安陰縣을 360근으로,
尙州牧을 550근으로 가산하면
21,132근)

<표 2>≪慶尙道續撰地理志≫의 慶尙道 各 官 貢鐵額

어쨋던 세조 7년에는 정부가 부역농민들의 이해를 일정하게나마 반영하여 철장도회제를 혁파하고「從民情願」의 원칙 하에 현물을 바치거나 미곡을 대납토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官·商이 결탁하여 부역농민들에게 대납을 강요하였고 갖가지 형태로 농민들을 착취하였다.0396)≪世祖實錄≫권 37, 세조 11년 11월 기미. 세조대의 대납제 실시로 야기된 갖가지 폐단은 당시의 한 史官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이 때 豪家巨室 중에도 대납행위를 좋아한 자들이 많아 富商大賈와 승도들은 勢家나 僧 信眉·學悅·學祖에게 청탁하기 위해 다투어 붙좇았다. 그러나 代納法이 농민의 情願에 따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대납하는 무리들은 반드시 먼저 세가에 요청하여 그 읍의 수령에게 부탁하도록 하는 한편 많은 뇌물을 갖다 바쳤다. 수령은 세가의 위세도 두렵고 또 사리를 탐내어 대납을 강요하였고 농민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 이미 대납케 되면 수령은 吏卒들을 풀어 徵納하였고 공세의 경우에는 농민들로부터 倍徵한 뒤 다시 민간에 貸米하고 가을에 綿布로 갚도록 약속했는데 빈민들은 이를 다투어 받았다. 기한이 되면 무리들을 이끌고 곧바로 민가에 들어가 토색하였고 만일 제때에 갚지 못하면 의복이나 잡물을 겁탈하였으며 값의 고하를 임의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督徵한다 해도 승도들처럼 비행을 저지를 수가 없기 때문에 老商大賈들은 항상 승도들을 먼저 뇌물로 유인하여 그들로 하여금 비행을 조장토록 하였다. 승도들이 농민에게 독징할 때는 언제나 ‘大君을 대신하여 왔다’고 하거나 ‘信眉·學悅·學祖의 제자’라고 하였고 조금이라도 뜻대로 안되면 사정없이 매질을 가했으므로 농민들은 감히 쳐다 보지도 못하고 손을 내저으며 서로 경계하기를 ‘욕심대로 가져가게 내버려 두라’고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갖고 싶은 대로 다 갖고, 하고 싶은 대로 다했다. 이런 일이 해마다 계속됨으로써 농촌은 고통스럽고 농민은 살 수가 없는 데도 위에서는 그것이 농민들의 情願에 따른 것으로만 여겼을 뿐 그 피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알지 못하였다(≪睿宗實錄≫권 3, 예종 원년 정월 임오).

권력층과 결탁한 부상대고나 승려들은 수령들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농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대납을 강요하였으며 심지어 대납미로서의 고리대적 착취도 감행하였다. 이처럼 官·商간의 결탁으로 빚어졌던 대납의 폐단은 貢鐵과 더불어 다른 모든 貢物에도 발생하여 세조 12년(1467)에 大司憲 梁誠之는 당시의 대납공물 중 가장 농민들에게 피해가 컸던 물품으로 紙芚·油蜜·白楮·正鐵·竹木·貢布·貢炭·燒木·吐木·不等方木·豹皮·船隻 등을 들고 있었으며 靑草는 어디서나 채취할 수 있었는데도 농민들이 현물납부를 두려워할 정도였고 田稅마저도 대납인이 있다고 하였다.0397)≪世祖實錄≫권 40, 세조 12년 11월 경오. 이상과 같이 세조 7년(1462) 이후 동왕 13년(1468)에 이르기까지 6∼7년간 전세·공물에 대한 대납제의 폐단으로 대다수 농민들의 저항을 받게 되자 예종은 즉위년 10월에 承政院과 六曹에 傳旨하기를 “앞으로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실을 막론하고 극형에 처하고 家産을 몰수하며 비록 公事로 인한 범법자라도 마땅히 논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예종의 전지는 都承旨 權瑊의 건의로 “비록 公事로 인한 범법자라도 마땅히 論罪한다”는 내용을 “공사간 모두 금한다”로 수정하였고0398)≪睿宗實錄≫권 1, 예종 즉위년 10월 임인. 이듬해 정월에 戶曹의 건의에 따라 3월부터 시행키로 결정하였다.0399)≪睿宗實錄≫권 3, 에종 원년 정월 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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