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1. 야철수공업과 철광업
  • 3) 민간야철수공업의 성장과 철물수취제도의 개선
  • (2) 철장도회제의 폐지와 각읍채납제의 채택

(2) 철장도회제의 폐지와 각읍채납제의 채택

예종 원년(1469) 3월부터 전세·공물의 대납제가 혁파됨으로써 공철의 대납제도 동시에 혁파되었다. 공철의 경우 대납제를 혁파한다면 결국 斂鐵法이나 鐵場都會制를 적요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염철법과 철장도회제는 당시 농민들의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각기 나름대로의 이해가 상반된 수취제도였다. 염철법을 적용하고 대납제를 혁파한다면 농민들이 공철을 사서 바칠 수밖에 없으므로 각 읍의 부유한 농민들은 반대하지 않겠지만 빈농들은 원치 않을 것이며 반대로 철장도회제를 택한다면 빈농들은 대납가에 시달리기 보다는 고통스럽지만 철장역을 원할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성종은 농민들의 의사를 직접 타진해 보기 위하여 즉위 초에 入直軍士들에게 염철법과 철장도회제의 편부를 물었던 것이다. 이 때 염철법을 원했던 입직군사는 300명인데 비하여 철장도회제를 원한 입직군사는 1,300명에 달하였다. 이에 성종은 원년(1470) 3월에 戶曹로 하여금 철장도회를 다시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0400)≪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3월 무술.

이리하여 다시금 철장도회제가 복구되었지만 그 자체가 지닌 모순과 폐단이 갈수록 심화되었기 때문에 성종 17년(1486)에는 또 다시 철장도회제를 혁파하고 염철법을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때 염철법을 주장하게 된 배경과 그 주체는 뚜렷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우선 상정할 수 있는 것은 중소부농층의 입장이다. 성종 원년의 入直軍士중 빈농들을 대변한 1,300여 명의 요구로 철장도회제가 채택됨으로써 중소부농층을 대변한 300여 명의 염철법 주장은 배제되었었다. 따라서 이들 중소부농층의 불만과 요구가 수령들의 이해와 맞물려 염철법을 제안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중소부농층의 요구만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부역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빈농층도 중소부농층과 함께 철장도회제의 모순과 폐단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수취제도의 개선을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大司諫 李德崇 등이 지적한 부역농민들의 처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국가가 각 道에 冶場을 설치하고 각 읍민을 사역하여 吹鍊하고 있지만 농민들이 식량을 지고 왕래하는 데만도 열흘이나 달포가 걸리는데 기한을 조금만 어겨도 매질을 가했으며, 그들은 다투어 價物을 긁어모아 자진해서 방납하였다. 監冶官은 모두가 무식한 자들로서 貢鐵을 방납할 때면 財利를 착취하는데, 손톱만한 것도 쪼개고 나누어 糧價니 炭價니 人力價니 갖가지 명목을 붙여 착취하므로, 결국 농민들은 경제적인 파탄과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원성이 자자하다”0401)≪成宗實錄≫권 203, 성종 18년 5월 무오.는 것이었다. 곧 철장도회제 자체가 지닌 제도상의 결함뿐 아니라 세월이 갈수록 수령이나 감야관들에 의한 부역농민의 착취가 극심해지고 있었으므로 앞서 철장도회제를 원했던 대다수 농민들도 이제는 염철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성종은 동왕 17년(1486)에 철장도회제를 혁파하고 염철법을 복구하는 문제를 각 도 관찰사에게 문의하였다. 이 때 호조에서는 철장도회제를 혁파하고 염철법을 적용할 경우 국내의 철물생산이 중단되고, 동시에 농민들은 철을 생산하지 못하므로 자연히 농기구를 바치게 될 것이니 관·민의 철물이 탕갈할 것이라고 하여 이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동년 2월에 성종은 각 도 관찰사들에게 下書하여 민의를 수렴토록 하고 정부는 이를 상론하여 보고토록 지시했던 것이다.0402)≪成宗實錄≫권 188, 성종 17년 2월 정유.

이에 동왕 17년 5월에 戶曹判書 李德良·參判 金升卿·參議 林壽昌 등이 전년에 반포한≪經國大典≫(乙巳大典) 鐵場條의 규정의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만 그 규정 중 ‘관찰사가 공철량의 다소에 따라 인근 각 읍의 인부수를 分定한다’고만 하고 정수가 없기 때문에 수령들이 많은 인부를 뽑아 보냄으로써「贏糧往來」하는 폐단이 생겼다고 하면서 “정부가 유능한 朝官을 현지에 파견하고 京匠으로 하여금 吹鍊토록 하되 正鐵 몇 근을 취련하는 데 인부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시험한 뒤 본 읍과 부근 읍민을 뽑아 취련군을 삼고 잡역을 면제하여 취련역을 전담케 함으로써 부역농민들이 식량을 지고 왕래하는 괴로움도 없애고 국용의 철물도 풍부하게 할 수 있다”0403)≪成宗實錄≫군 191, 성종 17년 5월 병오.고 제안하였다. 이는 곧 수령들에 의한 농민의 과다한 징발과 식량을 지고 왕래하는 폐단을 막고 철광채굴을 지속시키려는 의도에서 강구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인근의 읍민들까지 취련군에 충당한다거나 잡역만을 면제하고 철장역에 항상 복무토록 할 생각이었으므로 개국 초의 철장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동년 9월에 나주목사 尹孝孫이 제시한 방안은 앞선 방안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곧 “철장소재읍에 거주하는 주민들 가운데는 男女父子가 대대로 吹鍊業에 종사하면서도 각기 신역을 지고 있다. 이러한 철장 소재읍의 양민과 公賤들에게 한결같이 신역과 신공을 면제하고 적정인원을 吹鍊軍으로 삼되 이를 법령으로 제정한다면 다른 읍의 농민이 식량을 지고 왕래하는 폐단도 없어질 것이므로 공사간에 편할 것이다”0404)≪成宗實錄≫권 195, 성종 17년 9월 신미.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철산지에서 전업적으로 철광업에 종사하던 양·천민들, 곧「鐵匠」들을 취련군으로 삼고 신역이나 신공을 면제하고 공철생산을 전담토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성종은 이 윤효손의 건의안을 대신과 호조 당상관들의 연석회의에 올렸다. 韓明澮·尹壕·洪應 등은≪경국대전≫에 명시된 철장도회제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특히 홍응은 취련군을 두면「保人」을 두어야 하고 철장 소재읍에 閑丁이 없으면 다른 읍민으로 충당해야 하는 폐단이 생긴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心懷·尹弼商·李克培·盧思愼과 호조판서 이덕량·참판 김승경·참의 韓堰은 윤효손의 건의안을 시행토록 주장하였다. 이처럼 윤효손의 건의안을 찬성한 대신들이 많았고 특히 주무관서인 호조의 당상관들이 모두 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경국대전≫상의 규정을 지키고, 취련군제를 비판한 대신들의 명분도 뚜렷했기 때문에 결국 성종은 결말을 짓지 못한 채 윤효손의 건의안을 承政院에 유치하도록 지시하였다.

윤효손의 건의안이 철장도회제를 고수하고 취련군제를 거부하는 대신들에 의하여 승정원에 유치되자 이듬해인 동왕 18년(1487) 5월에는 大司諫 李德崇 등이 다시 민의를 수렴하여 전술한 바의 철장도회제 자체의 결함과 감야관들의 착취 행위를 지적한 뒤 “철장도회제를 혁파하고 각 읍으로 하여금 공철을 채납토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0405)≪成宗實錄≫권 191, 성종 17년 5월 병오. 이「各邑採納制」에 대해 성종은 領敦寧 이상의 대신들로 하여금 논의토록 하였는데, 앞서 철장도회제를 지지하였던 한명회·윤호·홍응 등은 물론 윤효손의 건의안에 찬성했던 심회·윤필상·이극배·노사신마저도 이덕숭 등의 疏議가≪경국대전≫의 규정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이덕숭 등의 소의가 거부되자 正言 朴喜孫은 “철장도회가 비록≪경국대전≫에 기재되어 있지만 농민들이 식량을 가져가 부역할 뿐 아니라 원거리를 왕래해야 하는 등 폐단이 막심하므로 蠶室例에 의거 이를 혁파하고 군현으로 하여금 각자 준비하여 바치도록 허락하라”고 하면서「각읍채납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종은 철장도회제가 일찍이 대신들의 의논을 거쳤을 뿐 아니라 농민들의 청원에 따라 실시한 것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0406)≪成宗實錄≫권 203, 성종 18년 5월 신유.

이리하여 성종 17년(1486) 2월부터 만 1년 3개월간 끌어왔던 철장도회의 치폐논의는 대신들의 주장대로≪경국대전≫철장조에 규정한 철장도회제를 그대로 준수하기로 결정된 셈이다. 그러나 이후의 사료에서는 철장도회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철장도회에 관한 기사가 사료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곧 철장도회제가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준수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동왕 18년 5월 경에 이미 철장도회제가 혁파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것은 대신들이 비록 철장도회제를 고수하려 했지만 호조와 사간원 및 각 도의 감사나 수령들이 반대하였고 특히 철장역을 지고 있는 부역농민들이 이를 모두 싫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철장도회제가 혁파된 기록을 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장도회제가 혁파된 이후 정부가 어떤 형태의 공철수취제도를 채택하였는지에 관한 자료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성종 17년 2월 이후에 제기되었던 갖가지의 개선방안 중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철장도회의 치폐문제가 거론되는 동안에 철장도회제나 염철법이 모두 농민들의 실정에 맞지 않는 제도로서 재인식되었고 이에 대한 개선안으로 제기된 호조와 나주목사 윤효손의 철장제와 유사한「吹鍊軍制」도 保人制의 폐단으로 시행될 수 없었다. 이처럼 철장도회제나 염철법 및 취련군제가 모두 나름대로 제도상의 결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금 민의를 수렴한 사간원에서 각 읍으로 하여금 공철을 채납토록 하는,「各邑採納制」를 건의한 것이다. 사간원이 제안한 이「각읍채납제」도 대신들이≪경국대전≫의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 때 대신들의 반대는 그 제도가 가진 공철수취제도로서의 결함때문이 아니므로 철장도회제를 혁파하는 한 정부는「각읍채납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부는 이 무렵에「任土作貢」을 원칙으로 한 공물수취제도를 정비하기 위한≪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기 위하여 각 읍의 토산물을 재조사하고 있었다. 따라서「각읍채납제」도 이를 토대로 하여 적용되었을 것이다.

당시「각읍채납제」가 적용되었던 사례로는 충청도 태안과 경상도 고성을 들 수 있다. 성종 21년(1490)에 侍講官 趙之瑞가 농민들로부터 철을 사취한 泰安郡守 宋傑의 죄상을 열거한 가운데 ‘郡有鐵場’이라고 하였지만0407)≪成宗實錄≫권 236, 성종 21년 정월 정사. 태안군은 단종 2년(1454)의≪世宗實錄地理志≫에 철장이 명시된 곳도 아닐 뿐 아니라 철산지도 없던 곳이었다. 다만 중종 25년(1530)에 증보한≪東國輿地勝覽≫의 토산조에 ‘鐵出多修山串’이라 하여≪동국여지승람≫편찬 무렵에 철장이 개설되었던 듯하다.0408)위와 같음. 고성읍의 경우도≪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철장은 물론 철산지도 명시되지 않은 곳이었다. 다만 예종 원년(1469)에 완성된≪慶尙道續撰地理志≫의 공철조에 철산지는 명기되지 않은 채 당해 읍의 歲貢 正鐵 할당량 339근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동국여지승람≫에는 철산지가 명시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겠지만, 성종 18년 경에는「任土作貢」의 원칙하에 철광을 보유한 읍에만 부과하는「각읍채납제」가 적용되어 매년 춘추의 농한기에 본읍민이 철장에 부역하였다.0409)≪中宗實錄≫권 98, 중종 37년 윤 5월 을묘. 이 때「각읍채납제」가 적용된 읍이 전국에 몇 개소나 되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기된 철산지가 정부의 토산물 조사시에 각 邑에서 보고한 곳이라고 할 때, 정부가「任土作貢」의 원칙을 준수하였다면 중종 25년(1530) 현재의「각읍채납제」의 적용 읍은 다음<표 3>에 나타난 83개소에 가까웠을 것이다.

도·읍명 토산 산 지 명
<경기도>
永 平 縣

水鐵

縣北倉洞
<충청도>
忠 州 牧
淸 風 郡
堤 川 縣
沃 川 郡
大 川 縣
懷 仁 縣
報 恩 縣
公 州 牧
全 義 縣
定 山 縣

恩 津 縣

懷 德 縣
尼 山 縣
石 城 縣
洪 州 牧
瑞 山 郡
泰 安 郡
海 美 縣


水鐵

水鐵

水鐵
水鐵
水鐵





石鐵






周連里
郡東平登山
縣北未古介
安邑縣枝內洞
山方川
老城山
熊峴及車衣峴
馬峴
縣東西房里
縣南五里水牀里
(有鐵冶)
縣南鵲旨熊田吐串
等地
縣北稷洞
縣南泉洞
縣南三山里
生天浦
郡南馬山里
多修山串
生天浦
<황해도>
黃 州 牧
平山都護府
瑞興都護府
鳳 山 郡
安 岳 郡
載 寧 郡
遂 安 郡
新 溪 縣
牛 峯 縣
長 連 縣
海 州 牧

豊川都護府

松 禾 縣
殷 栗 縣
長 淵 縣






石鐵



石鐵

石鐵



石鐵

鐵和縣

食岾
白邊
郡北慈光洞
大棗毛老山
見造山
縣東杻田里
觀音山
小金山
鐵出沙串
石鐵出黃谷里
府東六十餘里殷栗
縣境金山
殷栗縣境金伊山
金山浦
冬羅串吉串兩處
<경상도>
慶 州 府
蔚 山 郡
梁 山 郡
永 川 郡
彦 陽 縣
安東大都護府
醴 泉 郡
山 陰 縣

沙鐵
水鐵






府東八助浦
達川山
火者浦
郡東乾川
石南山

多仁縣東大谷灘
尺旨山
<전라도>
錦 山 郡
珍 山 郡
光 山 縣
咸 平 縣


務 安 縣
昌 平 縣
茂 耒 縣
光 陽 縣
同 福 縣
和 順 縣




水鐵








橫川
郡西月外里
無等山長佛洞
水鐵出縣西海際里
兩班橋海岸, 鐵出
縣西沙乃浦瓮岩浦
縣東鐵所里
無等山
大德山
縣東十一里木谷
無等山下
冷川
<강원도>
三陟都護府
襄陽都護府
旌 善 郡
寧 越 郡
橫 城 縣
洪 川 縣
金 城 縣
金 化 縣
安 峽 縣
丹 城 縣
金海都護府
昌原都護府
盈 德 縣
禮 安 縣
龍 宮 縣
尙 州 牧
陝 川 郡
三 嘉 縣



石鐵
石鐵

石鐵
石鐵
石鐵
石鐵









府西稷岾
西禪寺東峯下
熊前山
郡北加乙峴
縣西金掘伊
縣東末訖洞
岐城里也浦坪
方洞川
縣東奴隱洞
尺旨山
府東甘勿也村
佛母山
無芚山
縣東上里
修正灘
松羅灘
冶爐縣深妙里
黃山
<함경도>
永興大都護府
文 川 郡
北靑都護府
端 川 郡
利 城 縣
鏡城都護府
吉 城 縣

會寧都護府
鐘城都護府
慶興都護府
富寧都護府






沙鐵

沙鐵




山倉洞
頭里山
聖代山
吐羅山
羅下洞

鐵出多信浦
≪新增≫沙鐵出西齋洞
府東六十里闊洞
府東海汀
鹿屯島海汀穿串
多曷洞
<평안도>
价 川 郡

水鐵
石鐵


皆出巾之山
총철산지;83개읍

<표 3>≪新增東國輿地勝覽≫중의 각 도 각 읍 철산지 일람표

이처럼 鐵場都會制를 혁파하고「各邑採納制」를 적용한 성종 18년(1487) 무렵부터≪大典續錄≫을 완성한 동왕 23년(1492)간에 정부는「각읍채납제」를 채택한 사실 외에도 철물 수취제도 전반에 걸쳐 과감한 시책을 단행하고 있었다. 첫째는 각 도의 무기제조에 필요한 철물의 수취를 규정한 것이었다. 태종 7년에 철장도회제가 성립되면서 각 계수관·영·진의 月課軍器에 필요한 철물에 철장도회에서 일부 분납되었지만 주로 각 포 수군의 사철채취에 의존하였는데, 이 때 각 도별로 철물 수취규정이 확정되었다. 곧 충청·경상·전라·황해·평안·영안도는 각각 그 도에서 채취토록 하고, 강원도는 水軍으로 하여금 채취토록 하였으며, 경기도는 각 포의 月課鹽으로 철을 구입해서 사용토록 하였다. 그리고 각 도에서는 철물의 출납량을 會計하여 연말에 啓聞토록 하였다.0410)≪大典續錄≫戶典 支供. 이에 따라 충청도 등과 같이 철물채취를 그 도에 일임한 경우에는 결국 철물이 필요할 때마다 도 내의 군사들이나 군역 의무자들을 사역하여 조달하였다. 더욱이 경기도와 같이 각 포의 月課鹽으로 구입토록 한 경우는 철장이나 수철장들에 의한 철광업 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둘째는 성종 16년(1485)의≪經國大典≫(乙巳大典)에서도 과세대상에서 제외하였던 철장들에게 정부가 장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성종은 동왕 2년에≪經國大典≫(辛卯大典)을 반포한 뒤 동왕 4년(1473)에 院相들로 하여금 철장들에 대한 장세의 징수문제를 논의토록 하였다. 원상들은 철장이 주철장·유철장과 같이 철제품을 생산판매하는 자들이 아니고 원료철을 생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경국대전≫(신묘대전)에도 수세규정을 두지 않았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성종도 철장을 과세대상에서 제외키로 하였다.0411)≪成宗實錄≫권 27, 성종 4년 2월 임신조를 보면 鐵物을 製鍊하여 器具를 제작하는 鑄鐵匠과는 달리 正鐵을 제련하기만 하였던 鐵匠에게는 課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성종 23년(1492)의≪大典續錄≫에서 歸厚署에 필요한 철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황해도 각 읍의 철장들에게 大冶 50근·中冶 40근·小冶 25근씩을 분등 과세토록 하였다.0412)≪大典續錄≫戶典 支供. 철장들에게도 수철장들과 같이 分等收稅法이 적용되었다는 사실은, 그간 세종대의 잦은 공철 감면조처나 세조대의 대납제 실시로 인하여 철장이 크게 성장하고 또 그들 상호간에 생산규모의 차등이 표면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철량으로써 본다면 철장의 경우에, 인부수 20명 이상의 大爐冶 100근, 15명 이상의 中爐冶 90근, 14명 이상의 小爐冶 80근씩 분등 부과한 데 비하면 거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지방의 철물생산업계에서 철장들의 철광채굴업은 수철장보다는 못하지만 주철장이나 유철장보다는 생산규모가 훨씬 컸던 것으로 여져진다.0413)≪經國大典≫戶典 雜稅.

이상과 같이 성종 18년∼23년간에 걸쳐 정부가 단행한 일련의 철물 수취체제 정비 과정에서 공철도「任土作貢」을 원칙으로 한「各邑採納制」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각읍채납제는 이후 조선 전기 내내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각읍채납제 자체도 철산지를 보유한 각 읍의 수령이 농민들에게 공철을 분정하고 현물을 채납케 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의 폐단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흉년을 맞는 등 농민들의 철광채취가 불가능할 때에도 정액의 공철을 바쳐야 했던 점이다. 이 때문에 중종 8년(1513)에 侍講官 韓效元은 “함경도는 철물이 희귀한 데다 요즘은 흉년을 만나 취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농민들이 농기구나 문짝에 붙은 철물까지 관아에 바치는 등 고통이 막심하다. 만약 각 읍이 수년간 조달할 수 있는 철물을 저장하고 있다면 이를 감면해 주는 것이 옳겠다”0414)≪中宗實錄≫권 18, 중종 8년 8월 계묘.고 하여 철장도회제하에서와 같이 공철감명을 정부에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공철을 부과했을 때는 철이 생산되었다가 뒤에 광맥이 단절되는 읍이 있었다. 한 사례로서 전술한 고성의 경우에는 중종 37년(1542)에 호조가 “任弼亨의 啓文에 ‘고성은 綠礬과 철물이 옛날에는 산출되었으나 요즘에는 나지 않아 민폐가 크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貢案에 올려져 있어 가볍게 고칠 수 없다”0415)≪中宗實錄≫권 98, 중종 37년 윤5월 을묘.고 하고 공안을 수정하지 않았다.

위와 같이「任土作貢」을 원칙으로 한 각읍채납제도 불가피한 사정으로 농민들이 철광을 채취하지 못하거나 당해 읍의 철산지가 광맥의 단절로 폐쇄되어 공철의 현물납부를 실현할 수 없게 되는 등 여건이 날이 나빠졌다. 이리하여 16세기 후반에는 각읍채납제도 점차 무너져 갔고 철장·수철장 등 철물 수공업자의 성장을 기반으로 한 대납제가 보편화되었으며,0416)≪火器都監儀軌≫광해군 7년 7월 26일조. 정부도 철물이 필요하면 鐵商들로부터 米·布로써 구입, 사용하였던 것이다.0417)≪明宗實錄≫권 18, 명종 10년 5월 을묘 및 권 21, 명종 11년 12월 병오.

<柳承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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