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2. 방직업
  • 1) 방직업역사의 개관

1) 방직업역사의 개관

고려 말 목면 종사가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의료는 주로 견직물과 마직물이었고 그 외에 모직물과 면직물도 약간 생산되었지만 그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와 같이 견직업·마직업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직조수공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었다. 그러나 선초에는 면업이 급속히 발전 성장하여 오랜 전통의 마직업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고, 견직업과 함께 조선 전기 방직업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직물생산과 사용은 매우 선구적이었다.≪三國志≫·≪後漢書≫·≪晋書≫등에 의하면 기원 직후에 이미 三韓과 濊 등 한반도 전역에서 種麻와 양잠하는 법을 알았고 麻布와 緜布·縑布와 같은 견직물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0418)≪三國志≫魏書 東夷傳 弁辰·濊貊·夫餘.
≪後漢書≫東夷傳 韓.
≪晋書≫四夷傳 辰韓.
또한 부여에서도 이미 繪·繡·錦·罽를 착용했다고 하므로서 일찍이 고급견직물은 물론 罽와 같은 모직물까지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해당되는 국내외 문헌 중에 보이는 자료도 우리의 화려했던 직물문화를 잘 설명하고 있다.≪翰苑≫에는 고구려에서 紫色 바탕에 纈紋이 있는 錦과 五色錦·雲布錦 등의 각종 錦類와 白疊布를 직조하였다고0419)≪翰苑≫蕃夷部 高麗. 기록되어 있다. 여기의 錦은 여러 색의 견사를 사용하여 이중조직으로 무늬를 짠 견직물의 일종으로 고도의 직조기술을 필요로 하였으며 白疊布는 草綿을 원료로 한 치밀한 綿織物이다.0420)고려 말의 목면 전래 이전에 이미 삼국시대부터 백첩포라는 草綿의 면직물이 있었다. 백첩포에 관하여는 이 책의 2-3)-(1)면의 전래 항목에서 상세히 설명하겠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는 306년 吳織·穴織을 일본에 보내어 방직기술을 전파하였으니0421)≪日本書紀≫권 10, 應神 37년 2월 무오.
≪日本書紀≫에서는 吳王이 吳織 등을 일본에 보낸 것으로 말하지만 그 당시 중국에서는 吳가 없으며 吳는 ‘구레’로 음독되어 고구려(句麗)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고구려의 직조수공업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일본에 직조기술을 전파한 나라는 고구려 뿐만 아니었다. 백제 역시 織工 安定那가 일본으로 건너가 韓錦을 제직하여0422)≪日本書紀≫권 14, 雄略 7년 8월. 일본 錦部의 始祖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신라도 직조수공업의 수준이 매우 높아 진덕왕 4년(650)에 五言太平頌을 지어 무늬로 짠 錦을 당에 보냈으며, 성덕왕 22년(723)과 혜공왕 9년(773)에는 朝霞紬·魚牙紬를 경문왕 9년(869)에는 大花魚牙錦·小花魚牙錦·朝霞錦을 당나라에 수출하였다.0423)≪三國史記≫권 5, 신라본기 5, 진덕왕 4년 6월과 신라본기 8, 성덕왕 22년 4월 및 신라본기 9, 혜공왕 9년 4월 및 권 11, 경문왕 9년 7월. 그 밖에도 당시 일본이나 중국 등과의 교역에서 40升白氎布·30升苧衫段·金總布·氈·氍毹·毾㲪의 직물을 보냈으니0424)≪三國遺事≫권 3, 塔像 4, 四佛山 掘佛寺 萬佛山.
≪日本書紀≫권 19, 欽明 15년 12월.
≪三國史記≫권 11, 신라본기 11, 경문왕 9년 7월.
삼국시대는 견직물 이외에 면직물이나 마직물·모직물까지도 수출할 정도의 수준 높은 직조술을 보유하였다고 생각한다.

「興德王 服飾禁制」에 의하면 귀족은 罽·錦·綾·羅·紬·絹과 같은 다양한 모직물이나 견직물들을 사용하였고0425)≪三國史記≫권 33, 雜志 2, 色服. 이러한 직물은 錦典·綺典·毛典·麻典·朝霞房 등의 官司에 母를 두어 생산하였으니0426)≪三國史記≫권 39, 雜志 8, 職官 中. 이미 전문상인에 의한 전업적 수공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한편 일반서민들은 絹·綿紬·絁 등의 평직으로 짠 견직물이나 마직물만을 사용하도록 허락되었는데0427)≪三國史記≫권 33, 雜志 2, 色服. 견·면주·시는 귀족의 것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그래도 일반서민까지 견직물을 의료로 사용할 정도로 그 생산이 충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와 비교하여 당시의 풍요로운 의생활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마직물은 신라의 가장 보편적인 직물로서 8월 한가위에는 연중행사로 한달에 걸쳐 길쌈(績麻)대회를 할 정도로 직조기술의 발전을 도모하였다.0428)≪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유리이사금 9년 7월. 그리하여 28升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麻布類가 생산되었고 평민도 15升布를 입었다.0429)≪三國史記≫권 33, 雜志 2, 色服. 한편 경문왕 9년에는 30升苧衫段도 생산하였는데 매우 섬세한 모시의 일종으로 생각된다.0430)≪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경문왕 9년 7월.
文武王條에 의하면 絹布의 길이는 7步 너비는 2尺을 한 필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는 魏尺을 사용하던 때이므로 조선의 직물 폭과는 달리 1尺은 24.12㎝였다. 그러므로 2尺은 48.24㎝ 정도로 생각되며 麻布도 동일한 직물폭이었다면 당시의 28升은 현재의 19升, 15升은 10升 정도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유물은 불국사 석가탑 舍利具 중에 수 편의 絹·羅·綾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일본 正倉院에 소장된 紫色氈과 花氈, 山水八卦背八面鏡의 뚜껑에 붙여진 寶相花紋高麗錦, 叡福寺에 소장된 獅咬連珠圓文剌繡佛幡 등이 남아 있는 墨書에 의해 신라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의 발달된 제직과 염색기술의 바탕 위에 송·요·금·원 등과의 활발한 직물교역, 거란·여진 귀화인들의 기술수용 등으로 더욱 발달된 직물생산이 가능하였다. 당시 직물생산방식은 중앙과 지방에 전문제직 기관을 두어 工匠 체제 하에서 전문장인에 의해 생산되거나 농촌의 가내수공업이나 사원수공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견직업과 마직업이 중심이 되었으며 모직물·면직물 생산은 극히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관영수공업은 御衣를 만들어 공급하는 尙衣局, 특별한 직물을 생산하는 掖庭局, 그 밖에 일반직물을 생산하는 雜織署, 직물의 염색을 담당하는 都染署 등을 중앙에 두어 직물생상을 담당하였는데 그들 관청에는 정6품의 奉御로부터 정9품의 丞에 이르는 관리들이 행정적으로 지휘하고 그 밑에 아전들을 배치하여 실무관리 및 장인을 감독하였다. 각 부서에는 錦匠·繡匠·綾匠·羅匠·罽匠 등이 있어 錦·繡·綾·羅의 견직물류와 罽와 같은 모직물을 각각 분업 생산하였다.

공장들에게는 일종의 녹봉과 같은 別賜가 지급되었는데 작업의 종류에 따라서 차별을 두었으며 직물공과 무기공류는 가장 높은 대우를 받았다. 직물공 중에서도 금장·교장이 능장·나장보다 높은 별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 錦·罽를 짜는 데 더 많은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0431)趙孝淑,≪韓國絹織物硏究≫(세종대 박사학위논문, 1992), 12∼14쪽. 이들 장인은 조선시대에 가서는 綾羅匠·紡織匠으로 단순화되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錦·罽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고대직물은 고려 이후 점차 쇠퇴되어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는 중앙제직기관 이외에도 각도에 직조수공업장이 있었으며 이곳에도 다수의 장인이 소속되어 錦·綺나 그 밖의 직물들과 피혁제품을 생산하였고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더 높은 이윤을 취하였다.0432)≪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현종 3년 3월. 그러나 이러한 수공업장은 고려 말에 이르면 직물생산 장소로서 기능을 잃고 甲坊만 남아 綾·羅를 저장하는 창고 역할만 할 뿐이었다.0433)≪高麗史≫권 107, 列傳 20, 權㫜. 또한 지방수공업장 중에는 천민들로 구성된 絲所·紬所가 있어 비단실이나 면주를 생산하여 중앙관사에서 필요한 실과 직물을 공납하였다.

민간수공업은 농민이나 사원에 소속된 전문장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당시 사회에서 화폐대용이 되었던 5升布를 가내수공업으로 생산하였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수준 높은 특산물을 생산하여 稅貢하였다.0434)예를 들면 함경도 지방에서는 주로 麻布를 공납하였고, 안동·청주에서는 眞絲와 雪錦子를, 안동·성주·경주·진주 등지에서는 綾·羅·紬·黃麻布, 해양에서는 白紵布를 특산물로 공납하였다.≪東文選≫에 의하면 경주와 안동에는 뽕나무가 우거졌으며 羅·綃·綾·縑·縛·縠·錦·綺·繡·纈 등의 다양한 견직물이 제직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원에서도 女僧·僧妻·奴婢 등이 직물을 생산하여 자체 사용이나 왕실에 헌납 또는 조공품용으로 충당하거나 때로는 상품으로 판매하기도 하였다.0435)趙孝淑, 앞의 책, 15쪽.

고려는 송·요·금·원 등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는데 교역품 중에서 직물은 중요한 품목이었다. 고려에서 수출한 직물의 종류는 錦·綾·羅·紗·絹·紬·苧布·麻布·罽 등이다. 그런데 송과의 직물교류에서 알 수 있는 점은 고려 중기 이전까지는 고려의 직물기술이 송과 대등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점이다.0436)예를 들면 문종대에 고려에서 수출한 직물은 羅·綾·罽·紗·布類이고 宋에서 보내온 것은 羅·綾·綃·錦類이다(≪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5·34년).
수량을 비교해 보면 고려에서는 色羅 100필·生羅 300필을 보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금박찍은 羅, 매화무늬 羅도 보냈는데 이는 송에서 보낸 色羅 100필의 4배분량이며 綾도 고려에서 300필을 보냈음에 반하여 송에서는 200필을 보냈을 뿐이다. 그 밖에 罽·幞頭紗·布類는 고려에서만 보냈고 錦·紗·綃는 송에서만 보냈다. 이러한 관계는 명으로부터 다량의 고급필단류를 수입한 반면 소량의 錦紬만을 수출하였던 조선시대 견직물 교역과 비교해 볼 때 고려 중기의 발달했던 견직물 제직수준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몽고의 침입 이후 모든 경제가 침체됨에 따라 사치품인 견직물 생산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원과의 교역에서는 송에 비하여 고급 견직물의 수출이 줄고 白苧布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몇 차례에 걸쳐 紫羅를 예물로 보내기도 하였으나0437)≪高麗史≫권 25, 世家 25, 원종 3·5년 및 권 31, 世家 31, 충렬왕 20·22년. 그 수량은 몇십 필 정도였으며 반면에 많은 苧麻布가 수출되었고 특히 紋苧布·白苧布는 원 간섭기동안 원에서 요청한 대표적인 직물이었다. 원의 유명한 노래「漁樵記」에서도 불리워질 만큼0438)閔泳珪,<청양 장곡사 고려철불 복장유물>(≪人文科學≫15·16 延世大, 1966), 241쪽. 고려 저포는 몽고인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공무역 이외에도 고려 말기 민간교역의 상황을 말해주는≪老乞大≫에 의하면 고려에서 毛絁布·黃布를 중국 북경에 팔고 각종 비단류를 구입하였다.0439)≪朴通事·老乞大諺解≫(영인본, 아세아문화사, 1973), 23∼25쪽. 그러므로 고려 말기에 들어서 견직업은 쇠퇴하였고 마직업은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을 만큼 민간수공업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직물관계 유물은 불상의 내부에 腹藏되었던 錦·織金·羅·綾·紬·段·麻布·苧布의 조각들이 300여 점 있으며 탑 속에 납입되었던 錦·絹·羅가 10여 점, 寫經을 쌌던 錦經帙 1점, 공민왕 유물로 전해지는 綾·段 5점, 그 밖에 佛畵의 바탕천으로 사용되었던 수십 점의 絹·紬가 있다.0440)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長谷寺 鐵造藥師佛腹藏織物.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1302년 阿彌陀佛腹藏織物.
동국대박물관 소장, 文殊寺 金銅如來坐像腹藏織物.
일본 佐賀縣立博物館 소장, 錦經帙.
安東 太師廟祠堂 소장, 공민왕 유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鳳棲里塔 織物.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직조술이 발달하여 다양하고도 섬세한 각종 직물을 제직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 100여 년간 몽고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방직업 특히 견직업은 쇠퇴하였다. 조선 초기 역대 왕들은 쇠퇴일로의 방직업을 복구하고자 적극적으로 잠업과 면업의 권장정책을 펼쳐 많은 발전을 보았다. 그러나 직물생산 방식은 조선 초기 중앙관서의 관장제 수공업에 의한 견직물생산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농촌의 민간수공업으로 전개되어 영세 경영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구나 후반기로 내려가면서 조선정부는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직물생산의 모순을 해결하기 보다는 貢物로서 징포정책만을 계속하여 외국에 비하여 직물발전의 기회를 점차 잃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견직업을 살펴보면 다양한 종류의 견직물을 제직할 수 있었던 전 시대의 수준에 비하여 퇴보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조선 전기에는 정부의 권장속에서 관장제 수공업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가서는 관장제 수공업은 붕괴되고 농가부업으로 이루어졌던 명주만이 대표적인 견직물로 남게되었으며 그 이전에 생산되었던 고급견직물은 점차 쇠퇴되었다.

조선의 견직업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단계는 태조부터 성종까지로 관의 주도 아래 권잠정책이 행하여졌으며 관장제 수공업에 의한 견직물 생산에 관심과 노력이 기울여졌다. 당시 민간수공업은 주로 공물을 바치기 위한 蠶絲·錦紬를 생산할 뿐이었다. 2단계는 연산군 때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로 잠업이 정착하고 국가경제가 안정됨에 따라 민간에 의한 양잠이 활발하였고 상품으로서 견직물 생산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연산군에 의한 견직물 생산 및 장려는 직조 기술의 발달과 저변확산에 기여하였다. 중종대에는 점차 관장제 견직업이 쇠퇴되고 私匠에 의한 紗·羅·綾·段의 생산도 가능해졌으며 이러한 견직물은 상품의 가치를 갖게 되는 등 조선 견직물이 가장 발달했던 시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임란을 겪으면서 극도로 어려워진 경제로 사치성 직물인 견직업은 다시 침체국면에 접어 들었으니 이때부터 3단계로 볼 수 있다. 영조를 비롯한 역대 왕들은 강력한 사치금지 정책을 펼쳐 고급견직물 생산을 금지하였으며 그나마 관부에서 생산되던 고급 견직물도 계속되는 紋織物의 사용금지로 점차 쇠퇴하였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영세한 농촌수공업에 의한 명주와 같은 단순한 견직물만이 남게 되었으며 고급견직물은 대부분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토록 견직물이 쇠퇴한 원인을 정리하면, 첫째 유교적 관념체계의 심화로 장인을 천대하였고 또한 계속되는 사치금령으로 평민들의 견직물 사용이 불가능하여 직물생산 의욕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고급견직물에 압도되어 경쟁력이 약한 우리의 것은 점차 쇠퇴하였다. 셋째 실용적이고 손쉬운 면업의 발달로 많은 민간수공업의 노동력이 면업에 충당되었다.

조선의 면업은 견직업과는 달리 농촌의 민간수공업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衣料産業이었다. 조선 면업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면, 1단계는 고려 말 문익점에 의한 면종자 도입부터 15·16세기까지인데 빠른 속도로 정착·성장·발전하였으며 대외교역에서 대표적인 수출품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면업을 경제정책 수단으로 연결시키지 못하였고 단지 국가세입의 보충수단으로만 인식하였기 때문에, 과중한 조세에 시달리는 농민은 면포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고 양적 증가만을 꾀하게 된 결과 면포는 점차 추포화 되었다. 2단계는 임진왜란 이후 17·18세기까지로, 면포는 租稅辨納 수단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場市가 발달함에 따라 점차 보편적인「농민의료상품」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0441)방기중,<17·18세기 前半 金納租稅의 성장과 전개>(≪東方學志≫45, 1984), 194쪽. 이로써 기존의 면작이나 면포 생산방식은 조금씩 개량되어 면업은 성숙기를 맞이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면작은 평안도·황해도 지방까지 보급되어 결국 함경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면작이 이루어졌다. 19세기 초 전국 장시에서의 거래 물종을 보면 쌀을 거래하고 있는 군현 수가 253곳이었는데 비해 면포가 거래되고 있는 곳은 258곳으로 더 많았으며, 명주와 저포·마포를 거래하고 있는 곳은 각각 73곳, 175곳으로 이에 훨씬 못미치고 있어0442)權泰檍,≪韓國近代錦業史硏究≫(一潮閣, 1992), 35쪽. 당시 면포의 상품성을 말해주고 있다. 3단계는 19세기 후반 이후로서, 기계에 의해 생산되는 값싼 면포가 유입되고 그동안 발전·성숙되었던 재래면업이 외국상품에 밀려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마직업은 古來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기간적인 의료산업이었다. 태종 원년(1401) 貢賦詳定都監이 貢賦之數를 올린 바에 의하면 正5升布田과 苧布田은 면포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넓어0443)≪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5월 신묘. 당시 麻織物 생산의 보편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표 1>의≪세종실록지리지≫土宜條에서도 목면(목화 포함)은 경상·전라·충청도의 51곳에서 생산되었던 것에 반하여 麻는 8도 전역에 걸쳐 217곳에서 생산되었다. 각 도에서 전세로 바치는 布貨 중에서도 錦紬·錦布의 징수는 충청·경상도에 국한되어 있으나 마포는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어, 조선 초 마와 마포생산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세종 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한 면업은 마포의 자리를 점차 침식하였고 마침내 세종 27년에는 모든 거래에서 면포를 가치척도의 기준으로 삼게 되어0444)≪世宗實錄≫권 110, 세종 27년 10월 임자. 마포는 그 동안 물품화폐로 사용되었던 正布의 위치를 잃게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재배되었던 마포는 면의 재배가 어려운 북쪽지방으로 밀려났으니 예종 원년(1469)에 지방별로 공물을 배정함에 있어서도 하3도에는 면포, 서북도에는 면주를 납부케 하고 함경·강원도에는 常布를 납부하도록 하는 논의가 이루어졌던 바와 같이 마포는 보편적인 의료로서의 지위를 빼앗기게 되었다.0445)高承濟,≪韓國社會經濟史論≫(一志社, 1990), 88쪽. 조선 후기에는 함경도의 北布, 경상도 일부의 嶺布, 안동의 安東布, 강원도의 江布 등이 보편적인 의료로서가 아닌 지방의 특산물로 정착되어 생산되었다.

苧布는 옛부터 의료는 물론 중요한 수출품으로서 고급 직물의 위치를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보편적인 의료로 생산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원료생산지의 제한성 때문에 널리 재배되지 못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저포의 산지는 충청도·전라도 해안지역에 집중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林川의 모시가 유명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계승되어 조선 후기에도 재배지역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林川·庇仁·舒川·藍浦·定山·扶餘 등지를 소위 ‘苧布七處’로 일컬어 섬세한 모시제품 및 麻苧絞織品의 특산지로 남게되었다.0446)徐有榘,≪林園十六志≫展功志. 둘째 저포 역시 농촌수공업으로 발전되어 왔던 과정에서 많은 노력과 섬세한 직조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쁜 농가부업으로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방직업에서 마직업은 전시대에 비하여 점차 생산규모가 축소되었고 한정된 지방의 특산물로서 정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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