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2. 방직업
  • 2) 양잠의 보급과 견직물 생산실태
  • (1) 잠업진흥정책

(1) 잠업진흥정책

잠업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의식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유사 이래로 농업과 함께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三韓과 濊 등 한반도 전역에서 밭에 뽕나무를 재배하였고 錦布·縑布 등의 견직물을 생산하였으며,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일본에 기술을 전파하고 송을 비롯한 인접국과 교역하는 등 견직물 제직이 활발하였고, 이에 따른 양잠이 꾸준히 실시되었음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 오랜 기간에 걸친 몽고의 침략으로 국토가 황폐되고 국내의 정치·사회가 불안하자 자연히 잠업은 침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흥사대부를 주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구축한 조선왕조는 다시 잠업을 다른 산업과 같이 관 중심으로 발달시키기 위해 진력하였다. 잠업은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많은 경험과 기술축적 및 뽕나무 栽植기간을 요하는 특수산업이므로 단시일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추진해 나갔다.0447)朴慶龍,<朝鮮前期의 蠶業硏究>(≪國史館論叢≫12, 국사편찬위원회, 1990), 96쪽. 먼저 잠업에 기본이 되는 뽕나무의 재배 및 확산에 역점을 두었으며 다음으로 전국 각 지역에 蠶室都會를 설치하여 양잠기술을 지도·보급하기도 하며 직접 양잠을 하고 繭絲를 생산하여 국가의 수요에 충당하였다. 그 밖에도 先蠶祭와 親蠶禮를 宗廟·社稷의 다음가는 中祀로 구분하여 역대왕들이 정기적으로 의식을 거행하여 백성과 신하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양잠기술을 습득하게 하고자 수차례에 걸쳐 잠서를 간행하였다. 이처럼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권잠정책으로 뽕나무의 재배면적이 늘고 양잠기술이 보급되었으며 16세기 무렵에는 민가의 부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 조선 전기 역대왕들의 구체적인 권잠정책을 살펴 보기로 하자. 태조는 원년(1392)에 농상은 의식의 근본이니 농상을 권장하여 백성을 잘 살게 하자0448)≪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임인.고 하였으며 정종 2년(1399)에는 조선 개국 후 최초로 先蠶祭를 지내어 양잠을 장려하였다.0449)≪定宗實錄≫권 3, 정종 2년 3월 기사. 先蠶儀式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뽕잎이 나기 시작하는 3월에 거행하며, 先蠶祭를 먼저 지내고 그 후에 親蠶禮를 행하였다.

태종은 전대의 六典에 있는 種桑之法이 지켜지지 않자 10년(1410) 種植之法을 제정하여 이 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등 전대의 정책을 강화하였다.0450)≪太宗實錄≫권 20, 태종 10년 11월 무자. 동왕 16년(1416)에는 양잠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加平의 속현인 朝宗과, 楊根의 속현인 迷原 두 곳에 처음으로 蠶室都會를 설치하여0451)≪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2월 정해. 효과를 보자,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난 17년(1417) 정월에 경기도 가평을 위시하여 충청도 淸風, 경상도 義城, 황해도 遂安, 전라도 泰仁 등 5개소에 蠶室都會를 각각 설치하고 감독관을 파견하였다.0452)≪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1월 무술. 蠶室이 설치되었던 첫 해에 朝宗에는 李迹이, 迷原에는 李士欽이 감독관으로 파견되어 첫해의 수확물로 각각 生繭 98石 10斗·繰絲 22斤·種連 200張·熟繭 24석·繰絲 102근·種連 140장을 진상하였다.0453)≪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정사. 또한 잠업기술의 개량 및 보급을 위하여 14년(1414)에 李行·郭存中에 명해 원 세조 때 편찬된≪農桑輯要≫를 이두로 번역하도록 하였다.0454)≪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12월 을해.≪농상집요≫에는 뽕나무를 재배하는 방법, 누에 기르는 방법, 고치를 삶아 실을 뽑는 방법 등이 폭넓게 기록되어 있어 매우 유용하였다. 그 후≪농상집요≫를 좀더 쉽게 적용하고 보급하기 위하여 그 내용의 일부를 취사선택하여 이두로 번역한≪養蠶經驗輯要≫·≪養蠶方≫0455)≪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5월 을유.을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세종대에≪양잠방≫의 방법에 따라 누에를 기른 결과 고치의 생산량이 두 배나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에는 이미 잠실도회가 설치된 5도 이외에 강원도·평안도·함길도에도 설치함으로써 면업과 같이 북방지역의 양잠을 장려하였다. 그러므로 세종 14년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에는 桑 생산자가 전국에 이르렀고(<표 1>), 특히 서북지방의 도시인 시흥·봉산·안악·곡산·수안·신은·재령·장연·풍천 등지의 풍속조에 ‘양잠과 뽕나무재배에 힘쓴다’ ‘주민들이 양잠을생업으로 한다’ ‘누에치기와 뽕나무재배를 숭상한다’는 기록이 있어 서북지방에 양잠이 성행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에 궁중에는 물론 서울지역에도 잠실을 설치하여 蠶種을 보급하였는데, 세종 5년(1423) 경복궁과 창덕궁 두 잠실에 각각 蠶種 21냥을 주어 기르도록 하였으며0456)≪世宗實錄≫권 19, 세종 5년 2월 정해. 동왕 8년(1426)에는 樂天亭蠶室이 설치되었다.0457)≪世宗實錄≫권 28, 세종 8년 4월 계미. 그 밖에도 세종은 누에고치를 많이 생산한 각 도의 잠실 책임자인 監考를 현직에 채용하기로 하며0458)≪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7월 기사 및 권 36, 세종 9년 5월 갑인. 잠실에서 사역하는 寺社의 노비들에게 身貢을 면제시키고0459)≪世宗實錄≫권 43, 세종 11년 3월. 蠶種을 宗親 및 2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등0460)≪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2월. 적극적인 권잠정책을 펼쳤다.

세조 역시 양잠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조대의 권잠정책을 집약시킨 것으로는 동왕 5년(1459)에「養蠶條件」을 제정하여 널리 반포한 것이다.0461)≪世祖實錄≫권 16, 세조 5년 6월 무인. 이것은 그 동안의 관 중심의 권잠정책을 민간에게 확대시킴으로써 양잠이 농가에까지 확산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를 들면 민호를 대호·중호·소호·잔호·잔잔호의 5등급으로 세분하여 대호는 300그루, 중호는 200그루, 소호 및 잔호는 100그루, 잔잔호는 50그루의 뽕나무를 의무적으로 심도록 하며 묘목을 잘 가꾸지 못하면 문책하였다. 즉 이 때까지의 植桑政策이 잠실운영을 위한 公桑에 중점을 두었던 것에 반하여 세조대에는 公桑 이외에 민가용의 뽕나무 재배를 강력히 추진하였던 것이다. 또한 동왕 7년(1461)에는 함길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북도의 여러 지역에 오디를 보내어 심게 하고 뽕나무를 가꾸도록 장려하는 등 세종대에 이어서 북방지역의 양잠도 적극 강화하였다.0462)≪世祖實錄≫권 23, 세조 7년 3월 신유. 그 밖에도 민간의 양잠기술의 보급과 개선에 큰 몫을 하였으니 이제까지 이두로 쓰여진 양잠관계 서적을 한글로 풀이한≪諺解蠶書≫를 간행하여0463)≪世祖實錄≫권 23, 세조 7년 3월 을사. 한문을 모르는 일반 농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양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도록 하였다.

성종대에는 세조가 권잠정책을 널리 펼친 영향으로 민가에 양잠열이 나타나던 시기였다. 성종 재위 중에 편찬된≪傭齋叢話≫에 의하면 ‘서울의 한강 남쪽 圓壇洞에 신잠실을 새로이 설치함으로써 기존의 衍禧宮을 서잠실로, 樂天亭·峨嵯山을 동잠실이라고 하여, 서울에 3곳의 잠실도회를 두어 잠사를 생산하여 官司에 바치도록 하였다. 이에 옛날 서울에는 큰 집의 서너 집만 누에를 쳤는데 이 당시에는 여염집 부인과 작은 상점에서조차 양잠을 할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0464)成 俔,≪傭齋叢話≫권 10, 諸詞.고 한다. 동잠실의 아차산 잠실은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으로, 원단동의 신잠실은 서울 서초구 잠원동으로 각각 추정되며, 현재의 잠실동·잠원동의 이름도 이러한 유래에 따른 것이다.0465)朴慶龍, 앞의 글, 107∼108쪽.

관 주도의 잠실이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각 도 단위에서 각 읍 단위로 늘어남에 따라 양잠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잠실 관리자에 대한 직무능력을 잠사 생산량에 따라 평가하는 등 잠실제도에 여러 가지 운영상의 허점이 들어났고 이에 따른 폐해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지방의 잠실에서 그 해에 공납할 잠사량이 부족할 경우에 잠실 관리자들은 책임량을 채우기 위해 민가로부터 금품을 거두어 잠사를 사서 바치거나, 잠실에서 사용하는 기구와 소모품을 민가에서 차용하고 민간인을 역에 동원시키며, 잠실 주변에 公桑이 부족하면 민가의 뽕잎을 채취하는 등의 여러 가지 민폐를 끼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미 민간에 양잠이 널리 보급되어 더 이상 여러 곳에 관영잠실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성종은 종래 각 읍마다 설치되었던 잠실을 줄이고 큰 도에는 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에 2개소, 작은 도에는 1개소만 남겨둠으로써0466)≪成宗實錄≫권 8, 성종 원년 12월 정묘. 관 주도의 잠실을 축소시키고 공물의 수량도 줄여 민폐를 없애도록 하였다. 그 후 각 도의 1∼2개소에 설치된 잠실의 운영마저도 폐해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의 정지를 거쳐0467)≪成宗實錄≫권 181, 성종 16년 7월 을유 및 권 131, 성종 12년 7월 을유. 서울과 지방의 모든 잠실을 폐지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중종 4년(1509) 잠실을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면서 ‘잠실의 폐단을 제거·개혁하여 이를 다시 세운다’고0468)≪中宗實錄≫권 7, 중종 4년 2월 임오.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성종이 잠실을 파하는 등의 잠업 억제정책만을 쓴 것은 아니었다. 민폐를 줄이려고 관 주도의 잠실은 축소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권잠정책으로 민간 중심의 양잠을 장려하였다. 먼저 동왕 3년(1472)「桑木培養節目」을 제정하여0469)≪成宗實錄≫권 15, 성종 3년 2월 무인. 사회문제까지 되었던 뽕나무의 부족을 없애고자 桑木增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동왕 8년(1477)에는「親蠶應行節目」을 제정함0470)≪成宗實錄≫권 77, 성종 8년 윤 2월 계해.으로써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는 親蠶禮를 국가적인 행사로 성대하게 치르도록 하여 양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 밖에도 姜希孟이 농가에 있어서 사계절의 작물재배법을 저술한≪四時纂要抄≫를 편찬하여 蠶桑에 관한 지식을 전하기도 하였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15세기 잠업은 역대 왕들이 잠실도회를 설치하여 이를 중심으로 전국에 양잠기술을 전파하고 누에 종자의 보급과 뽕나무 재배를 확산한 점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잠실이 관 주도로 경직되게 운영되었고 후에는 궁중에 잠사를 제공하는 데에만 주력하였기 때문에 양잠업의 민간보급이라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폐단이 나타나게 되어 폐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중종은 그 동안 폐지되었던 잠실을 다시 설치하고「農桑敎書」를 반포하였으며 농서를 편찬하는 등 강한 권잠의지를 표명하였다. 중종 원년(1505)에 서울의 동·서잠실을 다시 설치하였고, 4년(1509)에 그 밖의 잠실을 복구하였다.0471)≪中宗實錄≫권 1, 중종 원년 9월 신사 및 권 7, 중종 4년 2월 임오. 중종은 잠실을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잠실에 근무하는 관원에 대한 특혜를 베풀기도 하였고 동왕 5년부터 관료들에 의해 잠실의 폐단이 지적되어 잠실을 폐지하자는 수차례의 啓에도 불구하고 잠실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5년부터 12년까지 계속되는「잠실폐지론」에 어쩔 수 없이 12년(1517) 8월 신잠실을 폐지하게 되었다.0472)≪中宗實錄≫권 29, 중종 12년 8월 임술.

중종은 잠실 폐단의 여론에 밀려 신잠실을 폐지하였으나 그의 권잠정책은 계속되었다. 동왕 12년(1517)과 13년(1518)에는「농상교서」를 발표하여0473)≪中宗實錄≫권 27, 중종 12년 2월 임신 및 권 32, 중종 13년 3월 병오. 농업에 힘쓰면서 잠업을 발달시켜 농민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농상교서」는 잠실의 監考나 지방의 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일반 농민층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편 것으로서, 양잠의 전 과정에 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농가의 생산증대를 꾀하고자 한 점에서 민간 중심의 권잠정책을 확립하였다. 그 밖에도 동왕 13년(1518)에는 세조 때에 편찬한≪諺解蠶書≫를 수정·보완하여 金安國에게 이를 발간하도록 하여0474)≪中宗實錄≫권 32, 중종 13년 4월 기사. 농민들이 쉽게 양잠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중종의 권잠정책은 그 당시 조성되었던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잠업을 농가의 부업으로 정착하게 하였다.

잠업의 발달과 밀접한 16세기 사회현상으로 먼저 市廛과 場市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장시의 발달은 지방 유통경제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특히 직물류는 중요한 유통품목으로 양잠은 단순히 중앙에 공납하는 목적을 떠나서 농가에 이익을 줄 수 있는 부업으로 등장하였다. 더구나 당시 농촌은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농업생산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양잠에 노동력을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연산군 이후 만연된 의복의 사치풍조이다. 이러한 의복사치는 중종대에 와서도 만연하여0475)이의명,<15·16세기 양잠의 발달과 권잠정책>(≪육사논문집≫19, 1985), 235∼236쪽. 견직물 수요를 증대시켰고, 이러한 의복의 원료를 조달하기 위하여 잠업이 성행하였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