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2. 방직업
  • 2) 양잠의 보급과 견직물 생산실태
  • (2) 견직물의 제직실태 및 종류

(2) 견직물의 제직실태 및 종류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적극적인 권잠정책으로 농촌에 뽕나무를 의무적으로 심고 각 도에 잠실도회를 두어 운영하며 양잠관련 기술서적을 편찬하는 등 양잠을 확산하여 견직물 원료의 증산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훌륭하고 다양한 종류의 견직물을 제직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견직물 생산방식은 관부나 궁중의 수요와 깊은 관계를 갖고 官工匠 중심으로 발전한 관장제 수공업과, 독립 수공업자나 농촌 수공업자들을 포함한 민간 수공업으로 양분된다. 그러나 조선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는 민간인에게 견직물 사용을 제한하였으며 상업활동도 관청의 통제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15세기의 견직물 생산은 주로 관장제 수공업에 의지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16세기 연산군시대부터 각종 분야에서 서서히 관장제 수공업이 무너지고 민간수공업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과 흐름을 같이하여, 직조분야에서도 국가의 통제를 받는 京工匠 소속의 綾羅匠·紡織匠 등은 관장을 기피하고 사장의 독립수공업자로 전환하였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가에서도 부업으로 양잠을 하고 면주를 짜는 농촌수공업자가 확산되는 등 민간수공업의 강세를 나타내었다.

관장제수공업은 궁중이나 양반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공조소속의 尙衣院과 호조 소속의 內資寺·內贍寺·濟用監 등의 관사에 직조시설을 설치하고 관련 장인을 두어 관원의 감독하에 우수한 제품을 생산하였다. 직조와 관련된 관사 중에 가장 대표적인 곳은 尙衣院이었다. 조선시대 상의원은 왕을 비롯한 왕족의 의복과 궁중에서 소용되는 물품을 제조·공급하던 관사로서, 고려의 尙衣局 체계를 이어받았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2년(1393) 상의원에 관한 사료가 처음으로 보이며, 그 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성종 2년(1471)에≪經國大典≫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조선 말기까지 큰 변화없이 계속되다가 고종 32년(1895) 관제개편으로 宮內府 소속의 尙衣司로 개칭되었고, 그 후에 다시 尙方司로 바뀌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상의원에 소속된 공장은 597명으로 조선 초기 30개 관사 중 軍器寺의 644명 다음으로 규모가 큰 관사였다. 건국 당시 상의원의 공장 종류와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종 21년(1439)에 공조에서 올린 내용에 의하면 기존의 401명의 장인에 66명을 증가시켜 467명의 장인이 있었으며0476)≪世宗實錄≫권 84, 세종 21년 정월 22일. 세조 6년(1460)에 장인의 수가 801명까지로 확대되었으며 그 중에 綾羅匠도 126명으로 증원되었다고 한다.0477)≪世祖實錄≫권 21, 세조 6년 8월 갑진. 그러나≪경국대전≫에서는 597명으로 축소되었고0478)≪經國大典≫권 6, 工典 工匠. 성종 23년(1492)에 편찬된≪大典續錄≫에서는 다시 75명이 증가되었다.0479)≪大典續錄≫工典 工匠. 연산군 때 소속관원을 18명이나 늘렸다는 기록0480)≪燕山君日記≫권 58, 연산군 11년 5월 경술·6월 경진·11월 갑진.으로 미루어 보아, 관원이 관리해야 되는 장인의 수도 이에 상응하여 많이 증가하였다고 짐작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 초기 관장제 수공업의 강화를 말해주고 있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상의원 소속 597명의 공장 중 직물생산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장인만을 분류하면 모두 264명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 장인의 종류 및 작업분야는 다음과 같다. 合絲匠 10명과 練絲匠 75명은 실을 정련하고 合絲하는 등 제사관련 작업을 하며, 紅染匠 10명·靑染匠 10명은 염색작업을 하였으며, 綾羅匠 105명과 紡織匠 20명은 綾·羅·段·紬등의 직물을 제작하였고, 이 때 10명의 筬匠이 직기의 바디를 만들고 수리하였다. 그 밖에 裁金匠 2명, 絲金匠 4명, 金箔匠 4명 등은 金線緞 제직에 필요한 金絲와 金箔을 만들었고, 擣砧匠 14명은 제직된 직물을 다듬이질하여 정리하는 과정에 종사하였다.0481)≪經國大典≫권 6, 工典 工匠. 그러므로 이들 11종의 장인을 통하여 綾·羅와 金線段 등의 고급 직물이 제직되었으며 직물생산에 있어서 분업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대전속록≫에 “상의원의 능라장이 짠 제품의 질이 중등 이하일 경우에는 織匠의 근무일수 25일을 삭감하며, 引紋匠은 20일, 緯奉足은 각각 15일씩의 근무일수를 삭제한다”0482)≪大典續錄≫工典 雜令.는 기록으로 보아 능라를 짤 때에 능라장 내부에서도 최소한 씨실낳이·무늬놓기·천짜기로 세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의원에 속한 공장들은 다른 장인에 비하여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 관부에서는 관공장에게 소정의 직을 지급하였는데 상의원에는 종7품의 工製 4명, 종8품의 工造 1명, 종9품의 工作 3명으로 다른 관사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직급이 많았다. 또한 대부분의 공장은 2번으로 나뉘어 仕滿 900일에 加階되고 종6품에 그치게 되어 있으나 능라장은 紙匠과 함께 3번으로 나뉘어 6개월씩 복무하기로 되어 있으며 사만 600일에 가계되었다.0483)≪經國大典≫권 1, 吏典 雜職. 이와 같이 다른 장인에 비하여 능라장에 대한 우대는 당시에 능라생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제직 기술상의 어려움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상의원 이외에 직조와 관련된 관사로는 호조 소속의 內資寺·內贍寺·濟用監이 있다. 내섬시·내자시에는 각각 방직장 30명·잠장 2명씩 있으며 濟用監에는 방직장 30명·홍염장 10명·청염장 20명·도침장 6명 등이 있어 직물생산을 담당하였다.0484)≪經國大典≫권 6, 工典 工匠. 태종 17년 내자시에서는 잠실에서 공납한 실로사와 릉 각각 3필과 지방의 眞絲로 짠 段子 1필을 바쳤다고0485)≪太宗實錄≫권 34, 태종 17년 8월 을사. 한 데서 잠실에서 공납한 繭絲를 사용하여 내자시에서 사·능·단의 고급 견직물을 제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조에는 내자시·내섬시에서는 능·나를 짤 수 없게 하고 그 능라장을 상의원에 이속시킴으로써 능라의 직조는 상의원에서만 전담케 하여0486)≪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0월 을미. 내자시·내섬시의 활동을 축소하였다. 또한 문종대에는 방직장이 20승의 세마포와 면포를 짰다고0487)≪文宗實錄≫권 3, 즉윈년 8월 신묘. 하는데, 이로써 견직물 이외에 섬세한 면·마직물도 여기에서 제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전기에는 상의원·내자시·내섬시·제용감 등의 관사 이외에도 대량의 직물공급이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의 직물생산기구를 설치 운영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태종 16년(1416)에 관복용의 직물을 짜기 위하여「段子織造」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였는데0488)≪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을해. 태종 원년(1401)에 이미「織造色」이 있었으나 16년 뒤에 이를 설치한 것은 특별히 段子의 생산을 활성화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 12년(1430)에는 직물의 질과 규격을 통일하기 위하여 직조에 종사하는 織造婢를 모아다가「織造司」를 설치하자는 논의도 있었다.0489)≪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9월 11일. 그 밖에 연산군 10년(1504)에는「通織」을 설치하고 監織官을 두어 織造匠·引紋匠·執經匠·執緯匠·染匠 등의 전문 장인들로 하여금 고급 紋織物을 직조하게 하는 등, 관 중심으로 궁중 수요의 견직물을 자체 생산하고자 노력하였다.0490)≪燕山君日記≫권 53, 연산군 10년 5월 을유.

그러면 이들 중앙관사의 직조와 관련된 장인들은 어떠한 종류의 견직물을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제직하였을까. 사·나·능·단은 본국산이 아니므로 사용을 금지하고 본국산인 면주를 사용하라는 규제는 조선 건국 초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산 직물을 선호하는 풍토에서 그 폐해를 근원적으로 단절하고 근검 절약하여 사치를 금하자는 목적을 과장되게 강조한 문장으로 볼 수 있으며, 면조와 같은 손쉬운 평직물만을 제직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생산량이 많지는 않지만 사·나·능·단·금선과 같은 고급 견직물이 경공장에 의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상의원에 소속된 능라장이 105명이나 있는 점으로 보아 능과 나가 제직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능은 紬에 비하여 지질이 치밀하고 탄력성이 좋은 紋織物로 綾織(Twill weaves)으로 짜여져 직물표면에 사선을 나타내게 된다. 無紋織보다는 주로 구름·꽃·칠보 등의 무늬를 넣어 짰다. 나는 2∼4올의 인접한 경사를 교차시켜 고추모양의 구멍이 뚫린 透孔織物로 경사·위사가 성글게 搦組織으로 짜여 반투명한 효과가 있다. 대부분 능과 같이 구름·꽃·칠보 등의 무늬를 넣은 有紋羅로 짰다. 세종 6년(1424)에 일본 국왕에게 보낸 회사품 중에 大紅羅袈裟·紫羅掛子·藍羅長衫과 같이 羅로 만든 의복을 선물로 보냈으며,0491)≪世宗實錄≫권 23, 세종 6년 2월 계축. 연산군 9년(1503)에는 상의원에 명하여 有紋鴉靑羅와 白羅 4필씩을 품질 좋게 짜서 들이게 한 점, 다음해에 다홍색·자색·아청색의 나를 제직하기 위하여 상의원으로 하여금 실을 염색하도록 한 점0492)≪燕山君日記≫권 48, 연산군 9년 1월 정해 및 권 55, 연산군 10년 8월 경진. 등은 조선 전기에 나가 제직되었던 실례이다.

조선 전기에 제직된 견직물 중 육안으로 나와 비슷하게 반투명하지만 좀더 얇고 단순하게 제직된 옷감인 紗가 있다. 일반적으로 가늘고 꼬임이 강한 경위사를 매우 성글게 평직으로 짜거나, 위사를 튼튼히 고정하기 위하여 인접한 2올의 경사를 교차시켜 方型의 구멍이 생기도록 짜기도 하였는데, 후자도 육안으로는 성근 평직과 같아서 전자와 구별이 어렵다. 사의 생산 예로는 태종 16년 내자시에서 제직하였던 기록이 있으며,<표 2>에서와 같이 연산군 10년(1504) 상의원에 명하여 각종 無紋紗를 7필씩 짜게 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0493)≪燕山君日記≫권 53, 연산군 10년 5월 기미.

둘째 段이 제직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태종 16년에는 특별히「단자직조색」을 설치하여 관복용 段子를 제직하였음을 알 수 있고, 같은 시기에 내자시에서는 잠실에서 공물로 바친 繭絲를 사용하여 사·능·단을 짜서 바쳤다는 기록에서 조선 초기 단의 제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연산군 10년에는 상의원의 능라장을 綾段匠이라고 하여0494)≪燕山君日記≫권 53, 연산군 10년 5월 을사. 나 대신 단의 제직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단의 생산을 강화한 이유는 고려시대에는 의복용으로 능라가 유행하였던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에는 나 대신 단이 더 유행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0495)趙孝淑, 앞의 책, 35∼52쪽.

단은 繻子직물로서 일반적으로 經繻子織을 바탕으로 하고 무늬는 緯繻子織으로 제직된다. 능보다 조직점이 흩어져 있어 표면이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고급 견직물이다.≪訓蒙字會≫에 의하면 단은 비단을 뜻하며 속칭 紵絲로 불리워졌다.0496)崔世珍,≪訓蒙字會≫布帛.<표 2>에서와 같이 저사는 이미 연산군대에 상의원에서 제직이 가능하였으나 좀더 좋은 품질을 생산하기 위해 연산군 8년(1502)에도 북경에 가는 사행 중에 능라장을 보내어 大紅과 草綠 등 여러 색깔의 저사 제직법을 배워 4∼5척씩의 저사를 견본으로 짜 오도록 하였다.0497)≪燕山君日記≫권 53, 연산군 8년 1월 을유. 연산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紋紵絲를 제직하기 위하여 각별한 노력을 하였다. 동왕 10년(1504) 5월에 전교하기를 “저사 등의 물품을 우리나라에서도 중국 것과 같이 짤 수 있는가. 무늬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에 누구나 못한다고 하는데 지금 관에서 직기와 공역하는 사람을 능라장에게 주고, 조정관원들로 私織하여 관청에 들인다면 저사 생산은 널리 퍼질 것이다”라 하였고, 다음날 “저사 직조 해당 관원에게 능단장과 畵員을 거느리고 五色線을 가지고 들라”고 하여 능단장과 화원으로 하여금 직물의 무늬에 관하여 논의케 하였으며 다음날에는 중국 사·나·능·단의 束腰紙에 기록된 감직관과 장인의 성명을 내리며 이르기를 “따로 局을 설치하고 감독하여 관장하되 저사를 짤 때마다 이 見樣에 의하여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20일에는 “사·나·능·단은 우리나라 소산이 아니어서 재상들도 입기 어려웠는데 특별히 한 관청을 설치하고 織造하여 온 나라가 같이 쓰게 하였다. 그러므로 제직된 저사에 속요지를 달아 그 관청의 監織官·織造匠·引紋匠·執經匠·執緯匠·染匠의 성명을 쓰고 년·월·일을 적도록 하며 그 관청이름은 通織이라고 한다”0498)≪燕山君日記≫권 53, 연산군 10년 5월 갑진·을사·병오·무신.라고 하였으니, 명나라로부터 저사의 기술을 습득한 후 2년에 걸친 연산군의 노력 끝에 조선에서도 문저사 제직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4년 후인 중종 3년(1508)에는 知事 宋軼이 아뢰기를 “이제 상의원에서는 능·단을 잘 짜고 있으므로 국용의 무역도 정지하면 통사들도 반드시 사사로이 무역하지 못 할 것입니다”0499)≪中宗實錄≫권 7, 중종 3년 11월 경자.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상의원에서 국용의 능·단을 훌륭히 제직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향상되었던 것이다.

당시 단(저사)에는 일반적으로 무늬를 많이 넣었다. 예를 들면 연산군시대에는 白七寶細花紋段·四樣花紋紵絲·雲紋有靑色紵絲와 같이 꽃·칠보·구름무늬를 넣어 저사와 단을 상납하였으며 이러한 무늬는 전술한 상의원의 능단장에 속한 引紋匠이나 통직이라는 제직기관의 인문장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종 11년(1516)에 상의원에 전교하기를 “평소에 초록·유청·대홍색의 필단을 짤 때에 반드시 무슨 무늬를 짤 것인가를 아뢰어서 하느 법이니 이제 아청색의 사·나도 예대로 다시 아뢰도록 하라”0500)≪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 11월 을묘.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상의원에서 사·나·단의 직물에 각종 무늬까지 넣을 수 있었으며 무늬의 종류는 국가에 중대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향상된 제직기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 차례 침체되었고 영조 이후 강화된 사치금제 때문에 더욱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현종은 상의원에서 錦의 직조를 금지하였고0501)≪秋官志≫제4편, 掌禁部 申章. 영조는 사치풍조를 개혁하기에 힘써 스스로 근검절약하여 모범을 보이도록 노력하였다. 즉 동왕 10년(1734)에는 상의원의 직조기를 철거해 버리고 冕服用 緞子를 짜는 기계도 창고에 봉해 두도록 하여0502)≪英祖實錄≫권 37, 영조 10년 2월 신해. 고급 필단의 제직을 엄금하고 冕服에 사용되는 後綬用 직물도 이제까지의 有紋段 제직을 자제하고 단지 赤·靑·玄·縹·綠色의 無紋段을 제직하도록 하였다.0503)≪英祖實錄≫권 57, 영조 19년 4월 정유. 이는 결과적으로 직조기술의 퇴보를 가져오게 하였다. 동왕 23년(1747)에도 호조판서 金時炯이 紋段을 금지한 뒤로 大妃殿과 宮中殿에서 착용하는 의복에 맞지 않는 물품이 많았기 때문에 尙方에서 직조하는 일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0504)≪英祖實錄≫권 65, 영조 23년 2월 을사. 또한 34년(1758)에는 법복과 예복 이외의 鄕織 紋段을 금지하며 공적인 직조기를 제외하고 사직기는 즉시 철거하라는 더욱 강력한 금지령을 내렸다.0505)≪秋官志≫제4편, 掌禁部 申章.

이처럼 사직은 물론 궁중 안에서부터 고급 필단의 제직을 억제하고 심지어는 國婚 때조차 면포를 사용하고 紬·段을 금하였으므로 연산군 때부터 향상되기 시작했던 고급직물의 제직기술은 다시 퇴보하였고 필요한 필단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침체 속에서도 비록 규모는 작으나 조선 말까지 궁중 수요의 직물 생산을 위하여 경복궁 내에 鄕織院을 두고≪尙方定禮≫·≪國婚定禮≫등에 적혀있는 妃嬪 및 왕 실용 의복에 필요하였던 鄕織을 소량씩 생산함으로써 조선 전기 관장제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고급 필단류 생산기술은 겨우 명맥을 이어 나갔던 것이다.

셋째 織金織物을 제직하였다. 연산군 11년(1505) “迓祥服 제조인으로 公私賤을 막론하고 栽制人 20명, 縫造人 100명을 간택하여 置簿케 하고 織錦人의 예와 같이 근면·태만을 살펴서 그 급여를 주라”고 전교한 내용에서,0506)≪燕山君日記≫권 57, 연산군 11년 1월 무신. 당시 급여를 받고 錦을 짜는 織錦人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은 여러 색상의 실을 경사 혹은 위사에 이중으로 걸어 다양한 색의 무늬를 표현한 일종의 이중문직물이다. 금은 삼국시대부터 제직했고 고려시대에도 錦匠을 두어 제직하였음은 앞 절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는 원의 영향으로 金銀絲를 이용한 직금직물이 유행하였으며 이를 織金錦 혹은 金線이라는 호칭을 일컬었다.0507)趙孝淑, 앞의 책, 123∼124쪽.

<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연산군대 상의원에서 직조하여 바친 직물 중 四樣花紋紵絲滿金線·金線이 있는데 이것 역시 일종의 직금직물이었다. 여기에 사용된 金絲는 상의원의 裁金匠이나 絲金匠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며 앞의 직금인에 의해 제직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연산군 10년에는 “胸背金線은 공정이 세밀하여 만들기 어려우니 織工 및 針線婢로 하여금 많이 익히도록 하여 능한 자는 우대하여 상을 주고 능하지 못한 자는 벌을 주라”0508)≪燕山君日記≫권 56, 연산군 10년 11월 신묘.고 하였듯이 흉배용 금선도 제직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금선의 제직에 관해서는 시대가 좀 내려가기는 하지만 인조 때에 편찬된≪嘉禮都監儀軌≫에서도 都監織造한 직금 혹은 금선을 嬪宮衣襨에 사용하였으니 조선 중기까지 직금직물의 생산기술이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그 밖에도 조선 전기에는 중국사신에게 하사한 평직바탕에 능직이나 불규칙한 浮織으로 무늬를 넣은 交綺, 經絲에 絹絲를 걸고 緯絲에 綿絲를 사용하여 평직으로 제직한 絲綿交織衣, 꼬임이 많은 生絲를 성글게 평직으로 제직한 綃 등도 제직하였으나 사·나·능·단·금선보다도 문헌 기록이 많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관장제 수공업 영역에서는 그다지 일반화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현존하는 조선 전기 유물 중 다수의 의복이 雲紋·花紋의 사·나·능·단으로 이루어졌다. 이제까지는 일반적으로 무늬있는 고급견직물은 중국에서의 수입품으로만 생각하였으나 이상의 문헌에 나타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의 장인들에 의해 생산된 것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高陽의 丁應斗(1508∼1572)墓 출토복식에 붙은 孔雀胸背나 楊平에 있는 洪係江(15세기 추정)墓 출토복식 중 蓮花童子紋이 織金된 스란치마, 果川 李彦雄(16세기 추정)墓 출토복식 중 葡萄童子紋이 직금된 스란치마 등0509)단국대학교 부속 석주선기념 민속박물관 소장.도 우리나라에서 제직된 금선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이상 조선 전기의 견직물은 사·나·능·단·금선의 고급직물들이 관부나 궁중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관장제 수공업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반면에 농촌이나 독립수공업자에 의한 민간차원의 견직업은 관장제 수공업에 눌려 미약하였고 더구나 선초 면업의 대중적 확산은 민간의 견직업을 더욱 위축시켰다.

당시 민간수공업에서 견직물의 생산은 上供을 위한 조세용이 대부분이었으며 생산주체는 주로 농민이고 그 밖에 약간의 立役匠人들이었다. 농민들은 부업으로 농사일 틈틈이 영세한 환경에서 제직하였으며 중앙의 입역장인들은 번차의 실시로 관부에 동원되지 않은 기간에는 생계유지를 위하여 사적 제조를 하였다. 예를들면 상의원의 능라장들의 번차는 세 번으로 나누어 6개월씩 교대로 복무케 하여0510)≪經國大典≫권 1, 吏典, 雜職 工曹. 나머지 기간에는 사적 생산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자기경영에 대하여 차등있게 공장세를 바치도록 하였던 것이다.0511)≪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을미. 그러나 엄격한 계급사회를 이루었던 조선시대에서 신분에 따른 직물의 사치금제는 민간인들의 견직물 생산이나 사용은 물론 상품으로서의 판매도 규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민간수공업은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관장제 수공업장에서와 같이 생산과정에서의 분업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제직한 직물의 종류도 사·나·능·단과 같은 고급직물이라기 보다는 평직으로된 면주가 주종을 이루었다. 건국 초기부터 계속되는 권잠정책으로 전국 각 도에 잠실도회를 설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잠의 많은 부분은 관부나 궁중에서 쓰이는 蠶絲나 면주를 공급하는 데 급급하였으며 개인의 경제활동을 위한 견직물 생산은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견직물 제직술은 발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민간견직업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만연해진 사치풍조와 지방 장시의 발달 등 사회경제적 영향으로 15세기보다는 발전하였다. 연산군은 궁중의 사치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견직물 생산에 노력하였다. 견직물의 품질관리를 철저히 감독하면서 이제까지의 사·나·능·단의 고급직물에 대한 금지와는 달리 모든 관직에 있는 관리들도 고급의 능·단 의복을 허락하였고 심지어는 권장까지 하였으며 비단의 직조기술을 모든 백성이 익혀 널리 전습케 하도록 노력하였다.0512)≪燕山君日記≫권 53, 연산군 10년 5월 갑인 및 권 60, 연산군 11년 12월 신미. 비록 폭군으로 알려지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연산군의 정책은 조선 전기 견직업의 기술적 발달을 가져왔고 저변확산에 기여하였다.

더욱이 16세기는 잠업이 농가에서도 성행하여 잠사의 생산량이 늘었고 면주로 상품화되어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농가에서 짠 면주는 그 지방의 장시를 통해서 거래되거나 경상들에 의해 구매되기도 하였다.0513)≪瑣尾錄≫下, 권 7, 을해 9월 초4일. 이러한 과정에서 면포나 마포에 잠사를 사용하여 좀더 부드럽고 따뜻한 직물로 제직되기도 하였는데 잠사와 면사·마사·저사를 섞어 짠 絲綿交織, 絲麻交織·絲苧交織 등이 널리 생산 판매되었으며, 명종 11년(1556)에 이르면 사면교직은 구하기가 쉽기 때문에 사대부가에서 의복으로 널리 착용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0514)≪明宗實錄≫권 22, 명종 11년 6월 병오. 16세기 유물인 漆谷의 碧珍 李氏(?∼1585)墓 출토복식0515)경북대학교 박물관소장. 중에 사면문직이 3점이나 발견되어 그 당시 교직의 유행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私織의 상품유통은 생산증대와 더불어 직조기술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당시 민간수공업에서 평직으로 짠 면주 이외에 고급 필단까지도 제직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예를 들면 중종 9년(1514)에는 중국 능·단의 품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자가에서 私則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 났다.0516)≪中宗實錄≫권 20, 중종 9년 2월 임술. 동왕 11년(1516) 5월에도 ‘중국의 白絲를 수입하여 각 색으로 물들여 능·단을 짜는 자가 사대부가에도 있으므로 이를 금지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부녀자들이 鄕織匹段을 입느라 傾家破産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녀자들의 향직필단의 사용이나 사직과 능라장의 私賣를 법으로 세워 일체 금지해야 한다’고까지 하였는데, 결국 얼마 후에 사직금지 조치가 내려졌다.0517)≪中宗實錄≫권 25, 중종 11년 5월 기유 및 권 26, 중종 11년 10월 무신·갑술·병자.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의 두 가지 실정을 알 수 있다. 먼저 중종대에는 사장에 의해 능·단 등의 고급필단을 짤 수 있을 정도의 제직기술은 발달되었으나 아직 繭絲의 생산량이나 기술은 미흡하여 부분적으로 중국 백사를 수입하여 원료를 충당하였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견직물의 상품화가 촉진되면서 경공장으로 등록된 능라장까지도 관장을 기피하고 대부분 사장으로 활동하게 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른 수공업 분야에서와 같이 견직업에서도 조선 초기에 지배적이었던 관장제 수공업은 16세기부터 약화되고 민간 수공업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민간수공업으로의 발전은 잠시뿐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퇴보하였고 더욱이 영조의 사치금지 정책은 궁중에서조차 고급 필단생산을 억제하여 사장에 의한 고급필단 생산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관장에 의한 고급 紋織物의 생산조차 그 전 시대에 비해 쇠퇴하였다. 이로써 조선후기에는 영세한 민간수공업에 의해 생산된 면주만이 우리의 전통직물로서 명맥을 어어나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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