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2. 방직업
  • 3) 면의 전래와 면업의 발전
  • (2) 면업의 발달

(2) 면업의 발달

조선시대의 면업은 대체로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15∼16세기의 성장·발전기간이며, 2단계는 임진왜란 이후 17∼18세기의 정체·성숙기로 볼 수 있고, 3단계는 19세기의 쇠퇴기이다.

면업이 도입되어 성장·발전하는 1단계는 다시 다음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도입기로 문익점에 의해 면종자가 도입된 시기부터 고려 말까지의 27년 동안으로 설정할 수 있다. 고려 말기 면종자의 유입은 직물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방직업은 견직업과 마직업으로 양분되어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그런데 견직물은 대부분이 상류층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으며 고려 이전에 제직되었다는 罽·백첩포도 외국에 보내는 공물로 소량이 직조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서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麻·苧·葛 등의 靭皮 섬유에 의지하였다. 그러한 서민생활에서 따뜻한 솜과 무명의 원료가 되는 면종자의 도입은 의생활의 일대 혁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문익점에 의해 유입된 면종자는 그의 장인 鄭天益과의 협력으로 재배에 성공하였고 胡僧 弘願의 도움으로 綿布의 직조술을 익혀 婢女로 하여금 1필을 짜도록 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무명이 태동하게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시작된 면업은 그 지방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정치·사회적 혼란기로서 국가로부터 어떠한 권장정책의 시행도 없었으므로 면포의 생산은 극히 소규모로 이루어졌던 시작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0534)高承濟, 앞의 책(1990), 87쪽.
고려 말기를 면업의 준비단계로 보는 데는 일치되지만, 고승제는 시작단계의 하한선을 태종 원년(1301) 이전으로 설정하였으나 본 글에서는 좀 더 세분하여 고려 말까지로 하였다.
우왕 13년(1387) 2월에 명과의 교역에서 고려의 말을 수출하는 대가로 綿布와 段子를 받았는데0535)≪高麗史≫권 133, 列傳 49, 신우 13년 2월. 이 때는 면종자가 도입된 지 20여 년이 경과하였으나, 면포는 아직 수출품목이 아니었고 비단과 같이 명으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더욱이 공양왕 3년(1391)에 中郞將 房士良이 올린 시무 11조 가운데 제2조0536)≪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3월.에 의하면 목면은 아직 紬·苧·麻처럼 우리 토산물로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2기는 정착기로 태조 원년(1392)부터 태종 18년(1418)까지의 27년간이며 면포가 대중의 보편적 의료로 정착되는 시기이다. 국가에서도 면포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면업을 장려하면서 목면종자의 도입자인 문익점의 공덕을 높이 평가하여 파격적으로 우대하였다. 즉 문익점이 죽은 이듬해인 태조 7년(1399)에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參知議政府事藝文官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으로 贈職하였다.0537)≪太祖實錄≫권 14, 태조 7년 6월 정사. 또한 2년 후 태종 원년(1401)에는 그의 아들 中庸에게 정3품인 司憲監察을 수여하였으며,0538)≪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윤 3월 경인. 동왕 10년(1410) 司諫院이 올린 시무 8조 중에 위로는 卿士에서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上衣下裳의 의료로 쓰이는 무명을 보급한 문익점의 공로를 다시금 높게 평가하여 사당을 세우고 祭田을 지급하자0539)≪太宗實錄≫권 19, 태종 11년 4월 갑진.는 건의가 나오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문익점의 공로에 대한 뒤늦은 표창은 그 당시 비로소 목면이 널리 재배되어 국민 생활에 편리를 도모하고 국가에 많은 이익을 주었기 때문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아울러 면업을 장려하려는 국가정책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태종대의 적극적인 목면 권장정책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로서 태종 9년(1409)에 경상도 敬差官 韓雍이 올린 조목을 들 수 있다. 그는 綿布田에 대하여 쌀로 납세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을 주청하였으며, 태종은 그와 같은 특혜조치를 허락하였다.0540)≪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2월 임자. 이와 같은 국가의 권면정책이 촉진제 역할을 하여 면화재배는 서서히 정착되어 갔고 태종 10년 司諫院이 올린 바와 같이 위로는 卿士에서 아래로 서인에 이르기까지 上衣下裳의 의료로 보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면포의 생산은 충분하지 못하였고 외국과의 교역에서도 면포는 대표적인 수출품목이 되지 못하였다. 태종 원년 貢賦詳定都監의 啓에 의하면 收5升布田이 82,513결, 收苧布田이 1,265결인데 비하여 收綿田은 37결 밖에 안되어 당시의 면재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0541)權泰檍, 앞의 책, 35쪽. 따라서 태조·정종·태종 3대에 걸쳐 대외교역의 수출품목 구성에서 명·일본에 綿紬와 苧麻布가 주로 수출되었고, 여진과의 교역에서도 말의 수입대가로 紬·苧·麻·綿을 지불하였으나 綿의 수량은 매우 적었다.0542)≪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12월 정해와 권 10, 태조 5년 10월 임인 및 권 11, 태조 6년 1월 정유.
≪太宗實錄≫권 10, 태종 5년 10월 임인 및 권 11, 태종 6년 1월 정유.
게다가 태종대에는 명과의 교역에서 말 수출의 대가로 여전히 많은 양의 면포가 수입되었다.0543)≪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10월 무오와 권 3, 태종 2년 5월 계미, 그리고 권 20, 태종 10년 10월 임인 및 권 34, 태종 17년 8월 병술.

제3기는 발전기로 세종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이다. 이 기간동안 면업은 장족의 발전을 보게 되어 염업·광업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기간산업의 하나가 되었다. 면업은 급속한 속도로 성장하여 남쪽지방에서는 물론 북방지역까지 확산되었으며 대외교역에 있어서 대표적인 수출품목으로 자리를 굳혔고 화폐의 대용으로까지 될 정도로 중요한 산업이었다.

세종 7년(1425)에 편찬된≪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경상도의 109개 군현 중에 88곳에서 전세로서 면포를 납부하였고, 83곳에서 목화를 납부하였을 정도로 15세기 초기에는 경상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목화·면포가 생산되었다. 그 후 7년 뒤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에 ‘土宜 木棉’(목화 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면의 산지명은 경상도 이외에 충청도·전라도까지 포괄하고 있어 면이 경상도 뿐만 아니라 남한 전역에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때에는<표 1>과 같이 면화 始培地인 경상도에서는 66개 지역의 府·牧·郡·縣 중 13지역이, 충청도에서는 55지역 중 5지역이 목면을 土宜로 기록한 데 반하여, 전라도는 총 55지역의 府·牧·郡·縣 중 13지역이나 설정되어 기후·지리조건이 더 적합한 호남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면화재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계속되는 면업의 확산으로 삼남지방 일대에서 면포는 기존의 전통 의료인 마포의 자리를 빼앗고 보편적인 의료로 정착되었다. 예종 원년(1469) 6월에 공조판서인 梁誠之는 공물을 지역별로 배정함에 있어서 각 지방의 토산에 따라 하3도에서는 면포, 평안·황해도에서는 綿紬, 함길·강원도에서는 常布, 충청도의 임천·한산에서는 生苧를 납부하게 하자0544)≪睿宗實錄≫권 6, 예종 원년 6월 신사.고 具申하였다. 경상·전라·충청도 등지에서 면포를 대표적인 貢租 대상물자로 책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종 원년 무렵에 이르러 면포가 남한 일대에 있어서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의료로 정착되었음을 알리는 지표로 볼 수 있는 것이다.0545)高承濟, 앞의 책, 88쪽.

이에 따라 오랜 전통을 이어온 삼남지방의 마직업은 15세기 무렵 면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면화 재배가 어려운 북부지방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16세기에 저술된≪동국여지승람≫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에 평안도에서는 42개 군현 가운데 39개 군현들이, 함경도에서는 22개 군현 모두에서, 그리고 황해도에서는 24개 군현들 가운데 14개 군현에서 마포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설명하여 준다(<표 1>).

더욱이 세종대부터는 삼남지방에서 토착화에 성공한 면화의 재배를 기후 풍토가 잘 맞지 않는 서북지방에까지 전파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 때 북방지역은 심각한 흉년을 맞아 이 지역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집단 이동을 방지하고 안집시키기 위하여 세종은 농업을 권장하였고 특히 田作이 가능한 목면산업을 부업으로 권장하였다.0546)高承濟, 위의 책, 89쪽. 그 예로 세종 17년(1435) 함길도는 기후가 남방과 달라 旱田을 경작하고 있었으므로 하3도에서 면 종자를 거두어 함길도에 면화를 키우도록 하였고 다음 해 역시 함길도 감사에게 목면 종자를 보내어 재배법을 시달하고 먼저 관가에서 시범을 보여 일반 농민에게 알리도록 지시하는 등 북방 지역의 목면 재배를 시도하였다.0547)≪世宗實錄≫권 68, 세종 17년 9월 경진 및 권 71, 세종 18년 1월 임신. 그러나 기후가 한랭한 북방지역에서 면업을 확산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동왕 28년(1446)에는 평안·함길도 관찰사에게 재차 목면경작을 장려하고 평안·함길도 내에 거주하고 있는 하삼도인으로 하여금 목면을 경작하게 하였으며 차츰 원주민들에게도 면업을 보급시키도록 하는 등0548)≪世宗實錄≫권 113, 세종 28년 8월 임인. 국가의 계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성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동왕 6년(1475) 서북도에 목면 재배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永安·平安·黃海 三道에 목면 종자를 分送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힘써 경작토록 함으로써0549)≪成宗實錄≫권 54, 성종 6년 4월 기사. 북방지역의 목면 보급을 위해 일관된 국가 정책을 폈던 것이다. 중종 25년(1530)≪신증동국여지승람≫에 면의 특산지로 경기도·경상도·강원도·평안도가 기록되어 면 재배가 평안도까지 확대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더욱이 선조 28년 임진왜란을 겪고 있던 때에 황해·평안·함경도 巡察使에게 ‘군량에 보충할 물자를 징수하는 농수산물 중 면포와 미곡이 징수 비율을 책정하여 보고하라’는 牒文을 보낸 데에서 면포가 이제 서북지역에서도 징수의 대상이 될 정도로 보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0550)柳成龍,≪軍門謄錄≫선조 28년 11월 15일.

이와 같이 면업이 조선 전기에 빠르게 성장·발전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면포가 조선시대 의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물로 사용되었다. 면포는 견직물처럼 아름답지는 못하나 실용적이었다. 苧麻 직물이 하복재료로서, 견직물은 동복재료로 적합한 데 반하여, 면직물은 사계절 통용할 수 있는 의료였다. 그 외에도 흡습성이나 보온성이 뛰어나 내의·버선·침구까지도 주로 면직물이 사용되었으니 면포의 국내수요는 실로 막대하였다. 둘째, 면포는 조선 전기 대외무역에 있어서 수입에 대한 지불수단의 주종을 이루는 수출품이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수요가 급증하였다.

먼저 조선 전기 면포 사용의 실례로서 태종 10년에 문익점의 공덕을 기리면서 “위로는 경사에서 아래오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上衣下裳의 의료로 면포의 보급 공덕을 높이 기리어…”라고 한 것을 들 수 있거니와 당시 의생활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태종대까지 목면이 상류층의 의료로 쓰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여진의 사신들에게 몇 차례에 걸쳐 약간의 목면의를 주었다는 기록을 살필 수 있다. 태종 16년(1416)에는 席子의 緣을 두를 때 잠실의 공력이 매우 어려우니 이제부터 목면으로 대신하고, 各殿의 자리에 두르는 緣도 紫紬를 쓰지말고 鴨頭綠 7승 목면을 사용하며, 동왕 18년(1418)에는 예조에서 혼인하는 사람의 衾枕을 토산인 紬와 綿布로 하라는 事宜를 올리기도 하였다.0551)≪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임진 및 태종 18년 5월 임자. 이에 상류층에서는 의복보다 침구와 같은 생활용품으로부터 목면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며, 서민들의 경우 이미 목면을 의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조에 들어서면서 면포는 상류층 의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세종 27년(1445)에는 여섯명의 승지에게 鴨頭綠綿布와 紅紬를 1필씩 하사하여 중국 體樣의 의복을 만들어 입도록 하였고0552)≪世宗實錄≫권 107, 세종 27년 3월 병자. 다음해에는 集賢殿으로 하여금 服色詳定條件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제1조에 工·商·賤隷·鄕吏는 8승 이하의 木綿·綿紬·苧布를 쓰도록 명시한 점0553)≪世宗實錄≫권 112, 세종 28년 5월 임진.으로 미루어 보아 일반 서민들에게 목면이 일반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8승 이상의 고운 목면도 많이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규정이 설정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단종대에 명황제의 칙시를 가지고 온 중국사신들과 그 당시 최상의 권위를 가졌던 수양대군에게도 면포로 만든 각종 袍類를 하사하였다고 한 데서0554)≪端宗實錄≫권 8, 단종 즉위년 10월 신유·임진·계사 및 단종 3년 4월 정유. 면포는 관리나 왕족의 의료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5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면포는 왕족으로부터 천예에 이르기까지 이미 보편적인 의료로서 자리잡았다고 하겠다.

현존하는 임진왜란 이전의 복식유물 중에 무명이 있는데 주로 안감이나 내의류에 사용되었다. 16세기 壁珍 李氏墓 출토복식의 경우에는 무명 액주음포, 絲綿紋織袍도 수 점이 있다.0555)단국대학교 부속 석주선기념 민속박물관 소장.
현존하는 임란 전 유물은 관의 보공품으로 넣어졌던 출토복식이므로 여기에 넣어진 의류는 본인이 입었던 의복 중 좋은 견직물 옷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실제로 입었던 무명옷은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 시기에 목화솜을 넣은 누비옷이 나타난 것은 전 시대와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유물이 다시 분류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사망한 사람의 출토품에서는 무명옷이 견직옷에 비하여 적게 나타나며, 대부분 겉옷보다는 속옷에, 겹옷인 경우에는 안감에 무명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매장인의 출토품에는 겉옷인 袍類도 거의가 무명이었다. 예를 들면 임란 중에 전사한 金德齡 장군(1567∼1596) 출토복식0556)소재지:광주직할시 동구 충효동 1023번지.이나 金涵(1568∼1598) 출토복식0557)단국대학교 부속 석주선기념 민속박물관 소장. 등은 무명이 대부분인데, 이는 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실용적인 무명옷이 더욱 확산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5∼16세기 출토유물을 통해서 본 당시의 무명 너비는 가장 좁은 것이 31㎝, 넓은 것은 39.5㎝이며 33∼35㎝가 일반적이었다. 밀도는 8승 무명이 많았고, 가장 고운 것은 鄭休復 出土服飾0558)위와 같음. 중 14승 무명으로 된 솜직령포이다.

다음으로 면포가 대외교역에 있어서 지불수단의 주종을 이루는 수출품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면포의 수요가 급증하였던 실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먼저 여진과의 교역에 있어서는 여진인이 조선에 가져온 물품 중 중요한 것은 馬匹을 위시하여 土豹·海靑·鹿皮 등이며, 조선에서 그들에게 회사한 물품은 金·銀·紙物·苧布·麻布·綿布 등인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면포였다. 태조 2년(1393)에 여진의 사신에게 면포의를 사여한 것은 시발점으로 하여 동왕 5년(1397)에는 면포 20필을 사여했고 바로 다음해에도 10명의 사신들에게 사여한 직물 품목에 綵紬絹 綵苧布와 함께 綿布도 있어 비록 그 양은 적지만 면포는 건국 초기부터 저포·마포와 함께 외국에 보내졌던 중요 수출품목 중의 하나였다.0559)≪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12월 정해와 권 10, 태조 5년 10월 임인 및 권 11, 태조 6년 1월 정유.
≪太宗實錄≫권 10, 태종 5년 10월 임인 및 권 11, 태종 6년 1월 정유.
태종대 역시 5년(1405)에 土物을 바친 수십 명의 여진사절에게 면포 120필·백저포 30필을 사여하였고, 두 달 후 여진의 두목 만호·백호에게도 면포와 목면의를 하사하였다.0560)≪太宗實錄≫권 9, 태종 5년 2월 기축·4월 임오. 그러나 이 때까지는 아직 면포교역이 태조 때와 비슷하여 본격적인 수출품이라기 보다는 토산물을 교환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세종대부터는 여진과의 목면교역이 본 궤도에 접어들어 명실공히 수출품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세종 8년(1426)에 호조에서 야인들이 말을 바친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에 대하여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이며, 중질 말은 상등의 경우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 작은 말은 상등이 15필 중등이 10필 하등은 6필을 지급한다고 정하였다.0561)≪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정월 임인. 그러므로 여진으로부터 수입한 말에 대한 지불은 모두 면포에 의존하였고, 이에 따라 수출품으로서 면포의 수요는 매우 컸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실정은 일본과의 교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 일본은 조선과 서로 원해서 교역이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왜인들이 綿布·綿紬·苧布·곡물·서적 등의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데서 일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왜인이 가장 선호하였던 것은 면포로서, 일본은 硫黃·蘇木·金銀·胡菽 등을 바치고 막대한 양의 면포를 요구하였다. 조선 초기 태조·정종·태종의 3대에 걸친 대일무역은 남양에서 생산되는 물자를 수입한 데 대하여 면주와 저마포를 주로 수출하였으나,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조선 면업의 성장과 더불어 수출품목에 변화가 있었다. 즉 세종 즉위년(1418)에 유구·일본 등에서 硫黃·蘇木 등을 납부한 데 대하여, 回奉으로 면포 1,539필을 사여한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원년에는 412필을, 2년에는 2,280필을, 3년에는 5,430필을, 5년에는 2,640필을 보냈다.0562)金 新,≪韓國貿易史≫(도서출판 石井, 1991), 187쪽. 이는 태종 10년(1410)에 토산물을 바친 왜인에게 흑마포를 사여한 경우와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세종 연간 면포가 일본과의 교역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는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다시 한번 입증된다고 하겠다. 세종 20년(1438)에 일본인들이 가지고 온 銅鐵을 수송하기 위하여 민간의 노동력과 우마를 동원하는 폐해를 제거하려고 대일교역이 이루어지는 浦所에 면포를 직송하는 제도를 세웠으며0563)李鉉淙,<對日貿易>(≪韓國史論≫11, 국사편찬위원회, 1982), 334쪽. 동왕 32년(1450) 1월에는 일본사신이 가지고 온 丹木과 銅鐵의 대가로 1만 필의 면포를 浦所에 직송하였다.0564)≪世宗實錄≫권 127, 세종 32년 윤정월 경신.

그러나 조선 초 면업의 생산능력은 여진·명·일본 등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수입한 것에 대한 모든 지불을 충당할 만큼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세종 21년(1439)에 일본의 면포요구를 무제한으로 충족시킬 수 없다는 뜻을 일본에 통고한 바가 있었다.0565)高承濟, 앞의 책, 92쪽. 즉 면포의 대일수출을 억제하고 국내 수요의 충족을 우선하는 정책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은 얼마 안되어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퇴색되고 말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세종 32년에도 일본에 보낼 1만여 필의 면포를 항구에 직송하였으며, 문종·단종·세조에 이르기까지 1회에 수천 필씩의 면포수출이 이루어졌다. 성종대에 와서는 면포수출이 더욱 증가하여 1회에 만여 필 이상의 경우가 많아졌다. 즉 성종 7년(1476) 11월 戶曹啓에 의하면 성종 6년 1년간에 서울과 경상도에서 지급한 면포는 27,000필이었고 7년에는 37,421필이었으며 17년 경에는 倭人回奉이 연 500,000필 이상에 달하였으니0566)김병하,<이조전기의 직물생산과 대일수출>(≪경희대학교 논문집≫6, 1969), 715쪽. 그 규모는 고려 때에 비하여 엄청나게 증가된 것이었다.

중종대에도 대일무역 통제를 여러 차례 단행하였으나 끊임없이 國王使가 도래하여 면포교역을 간청하였고 그들은 공무역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역과 밀무역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종 18년(1523)에는 10만 필의 면포가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중종 20년(1525)에는 85,000필이, 23년에는 81,500필이, 37년(1542)에는 60,000필이, 38년(1543)에는 45,000필이 공무역 대가로 지급되었는데0567)김병하, 위의 글, 718∼719쪽. 이것은 면포가 대량 수출되는 대표적인 사례만을 든 것이고 그 이외에도 수천 필씩의 공무역 사례나 사무역에서 지급되었던 면포까지 합하면 훨씬 많았음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37년 4월의 日本國王使安心東堂이 취득한 면포는 쌓아서 산과 같았고 왜선 3∼4척을 가지고는 수송이 어려워 대마도선까지 동원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이 무렵 일본인들이 공무역에 의하여 1년간 받은 면포만도 선박으로 60∼70척이나 된다0568)위와 같음.고 한 사실에서 당시 면포 수출상황을 잘 알 수 있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세종대에 면포의 공무역이 시작될 때에 비하여 그 수량이 수십 배에 달하였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세종대 이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면포 수요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면업을 장려하였고 면업은 계속 성장 발전하였다. 그러나 면포의 양적인 성장·발전의 뒷면에는 국가의 지나친 징포정책으로 말미암아 민간의 직포기술이 열악해짐으로써 綿布·麻布가 추포화되는 문제점을 나타냈다. 다시 말하여 조선 중기에 이르러 면포 생산은 양적성장과 더불어 질적 퇴보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면포 생산방식은 견직물이 관 주도에 의한 관장제 수공업 중심으로 발전해 왔던 것과는 달리 농촌의 민간수공업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앞에서 분류한 2기, 즉 정착기까지 면포의 생산은 국가의 장려 속에서 농촌수공업자들에 의해 농민의 자체 수요와 토산으로서 공물을 충당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3기, 즉 발전기부터는 자급자족 및 조세의 납부를 위해서만 생산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극히 소량이지만 점차 상품생산과도 연관되어 진행되었다. 세종대에 접어들어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하는 군역 또는 직역 부담자가 번상입역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대신 입역하게 하는 대역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세종 21년(1439) 11월 安純의 상서에 따르면 이 시기에 경외의 都府外·其人·補充軍·皁隷·選上奴子·船軍에 이르기까지 대역이 일반화되고 1개월 간의 대역가가 면포 3필, 1년에 30필에 이르러 役丁이 토지와 牛馬를 팔고 파산하는 사태가 일어났다0569)≪世宗實錄≫권 87, 세종 21년 11월 11일.고 한다. 즉 그들 중 면포를 자체 생산하여 충당한 경우도 있겠으나 대다수는 면포를 생산할 수 없었고 면포를 사들이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생산자들에게서 구하여 납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면포생산자를 자체 수요의 목적을 떠나 상품생산자로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더욱이 15세기 후반기에는 면포가 단순한 상품이라기보다는 화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楮貨와 鑄貨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폐로서의 기능을 잃고 현물화폐제로 되돌아가 면포는 상품교환에 쓰이는 유통수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27년에는 모든 매매에 있어 반드시 면포로서 定價를 삼도록 하였고0570)≪世宗實錄≫권 110, 세종 27년 10월 11일. 동왕 29년에는 노비의 신공을 면포로 받았으며0571)≪世宗實錄≫권 115, 세종 29년 정월 10일.≪經國大典≫에 규정된 종래에 저화로 받던 수철장·주철장의 匠稅도 저화에서 면포와 쌀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농촌수공업으로 발전한 면업이 이처럼 조선 전기의 대표적 기간산업의 위치까지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수공업으로서 경영주체인 농촌경제를 호전시키는 역할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정부가 면포를 조세의 징수 수단으로만 이용하게 되고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들이 시장에서 매매하는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면화재배 농민들이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는 수량이 격감되는 사태가 거듭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면업은 경제정책 수단으로서 촉진된 것이 아니라 국가세입의 보충수단으로서, 즉 재정정책의 수단으로 촉진되었던 것이다.0572)高承濟, 앞의 책, 89∼90쪽. 그리하여 임란 이후 더욱 과중한 조세에 시달린 농민들은 상품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려는 의지보다는 조세납입을 위한 양적충당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이에 租貢으로서의 면포는 계속되는 麤布제직 금지에도 불구하고 열악화의 길을 밟아 정5승포조차도 추포화되는 등 면포 기술이 낙후되었고 면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18세기에 이르러 면포가 상품생산을 위한 농민들의 농촌부업으로 정착되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면포생산의 질적 향상에 많은 관심이 대두될 때까지 임란 이후의 면업은 정체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지역구분 참 고 문 헌 생 산 품 목
모 시 삼 베 목 면 목 화 뽕나무 비단실
경기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36
9

2

36
36

9
충청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11
13
8
6
2
3
21
22

1
경상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3
4
31
9
13
1
2
3
25
3
0
1
전라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22
18
50
2
0
31
41
33

황해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2
1
11
14


17
2

15
강원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2
3
24
7


3
24
6

평안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42
39

3

42
7

40
함길도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15
22


8
1

14

<표 1>조선 전기 직물 및 원료 생산 실태

출처 견직물 명칭 연도
권 36 鴉靑色紵紗 5匹, 白色紵紗 3匹, 黃柳靑色 紵紗 5匹 6년 2월 정미
권 39 鴨頭綠色紵紗 2匹, 藍色紵紗 4匹, 茶褐色紵紗 2匹 6년 10월 무자
권 46 唐織 無紋草綠紵紗 1匹, 鄕織 花紋草綠紵紗 1匹 8년 10월 갑인
권 48 鴉靑色段·白色段 各 4匹 9년 1월 정해
권 53 各色 無紋紗 各 7匹 10년 5월 기미
권 55 七寶細花花紋藍匹段 滿金線 10년 8월 신유
권 55 紵紗 多紅色 2匹, 紫色 1匹, 鴉靑色 1匹, 茶褐色 1匹,
紗 紫色 3匹, 黃色 2匹, 多紅色 2匹,
羅 多紅色 2匹, 紫色 3匹, 鴉靑色 1匹…染色
10년 8월 경진
권 56 紵紗 綃 雜色 各 5匹 10년 11월 임인
권 57 四樣花紋紵紗 滿金線 30尺 11년 2월 임술

<표 2>연산군 시대에 제직된 견직물의 종류

(≪燕山君日記≫) 

명 칭 古 貝 古 終 木 棉 吉 貝 桐 華 木 棉 白 疊
株 形 木狀 藤狀 樹狀 小桑과
같음
木狀 樹狀 草狀
株 高     7·8尺     高丈  
纖維의
形 態
거위털과 같고
가늘기가 絲綿
과 같음
거위털과
같음
茸의 흰색
솜털과 같음
거위털과
같음
백색으로
비단실과
같음
백색으로
누에고치의
綿과 같음
백색으로
가는 실과
같음
織物名 五色斑布 斑布 吉貝布 桐華布 毛布(白緤) 白疊布
産 地 南州 桂州 閩廣 廣州/海南 永昌 永昌 高昌
引 用
資 料
三國
<南州異物志>
南北朝
≪南越志≫

≪泊宅編≫

≪諸蕃志≫

≪蜀都賦≫

≪吳錄≫

≪梁書≫

<표 3>고대 중국에서 생산되었던 綿種(元代 이전)

(陳有稷, 앞의 책, 150쪽) 

<趙孝淑>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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