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3. 제지업
  • 2) 제지방법

2) 제지방법

먼저 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의 재배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숙종 때 洪萬選이 편찬한≪山林經濟≫, 정조 때 徐有榘가 편찬한≪林園十六志≫ 및 1905년에 金一濟가 편찬한≪農政新篇≫등의 사료를 참고하여, 닥나무 재배법에 관해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닥나무는 산골짜기에 심는 것이 좋고 비옥한 토지를 좋아하나, 척박한 곳·쓸모 없는 빈터·모래땅 등에도 부지런히 갈고 거름을 주면 잘 자란다. 그늘지고 습기찬 땅은 싫어하나, 한랭한 곳일지라도 양지바른 산자락이면 잘 자란다. 씨앗은 가을에 종자가 잘 익었을 때 수확하여, 물에 일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건조시켜 보관한다. 가을에 땅을 갈아 두었다가 2월에 다시 보습으로 갈아 삼 종자와 함께 흩어뿌린 후 흙을 덮는다. 가을과 겨울 동안에는 삼을 베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닥나무가 冬死하는 것을 방지한다. 그 다음해 정월에 지면 가까이에서 닥나무를 베어내고 그루터기에 불을 질러 태운다. 태우지 않을 경우는 잘 자라지 않는다.

이식하는 경우에는, 땅에 비스듬히 눕혀 심고 흙을 두껍게 덮은 후 그 위에 돌로 눌러 놓으면 잘 자란다. 점점 자라면 그 가지를 구부려 또한 흙으로 묻고 돌로 눌러 놓으면, 그 곳에서 새 뿌리가 돋아난다. 뿌리가 돋아난지 오랜 후에 뿌리 근처의 땅을 갈아 엎으면 뿌리가 노출되어 그 곳에서 순이 돋아난다. 이 때 짚으로 덮고 그 위에 소변을 주면 극히 무성하게 자라는데, 2월 중에 나쁜 줄기를 제거해 준다. 또 다른 방법은 흙을 잘게 부수고 거름을 주었다가 이른 봄에 다시 거름을 주고 쇠스랑으로 잘 긁는다. 춘분 전후에 닥나무 뿌리를 캐내어 1척씩 끊어 흙 속에 묻되, 그 머리 부분이 땅 위 5뼘 정도 나오도록 한 후 흙을 밟고 거름(糞水)을 준다. 그 위에 수초나 짚으로 덮어 두면 하지 이전에 발아하여 줄기가 자란다. 그러면 덮어 둔 것을 제거하고 거름을 주어 배양시킨다.

12월 동지 이전에 닥나무를 뿌리 위 5촌 정도 남기고 베는데, 벤 주둥이는 반드시 남향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해에 새 싹이 잘 돋지 않는다. 베는 시기는 12월이 가장 좋으며 4월이 그 다음으로 좋다. 만약 이 때 베지 않으면 나무가 말라 죽는 경우가 많다. 베어 낸 후에는 나무 방망이로 그루터기 부분을 두드려 주면 더욱 무성해진다.

다음으로 제지에 적합한 환경적 요건에 대해 알아보자. 태종 때 조지소를 서울의 장의동 탕춘대에 설치한 이유로, 풍부한 물을 확보할 수 있는 긴 개울과 평평한 바위를 들고 있다.0591)≪漢京識略≫闕外各司, 造紙署. 숙종 39년(1713) 2월에 조정에서는 조지서를 탕춘대에서 문수산성 아래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동년 4월에 이 문제가 재론되자, 좌의정 李頣命은 제지는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환경적 요인을 들어 移設을 반대하였다. 이상에서 제지는 여러 요소의 자연적 환경이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제지에 필요한 환경적 요인을 살펴보면, 첫째 제지의 공정에는 맑고 풍부한 수자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사시 사철 맑고 풍부한 물이 흐르는 산간계곡의 개울 주변은, 닥나무의 재배나 자생에 적합하며 또한 제지 작업에 있어서 천혜의 장소라 할 수 있다.≪林下筆記≫에 의하면, 호남지방의 닥나무 품질이 천하 제일인 원인은 물의 성질(水性)에 있다고 하였다. 즉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닥의 품질에 대해 논하기를, 전주는 순박하고 매끄러우며, 순창은 순일하고 나약하며, 남평은 곧고 밝지 않으며, 남원은 색깔의 희기가 마치 응고된 기름같아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닥이 천하에서 가장 진귀한 품종이라 하였다. 이어서 그 원인은 물의 성질에 있다고 하였다.0592)李裕元,≪林下筆記≫권 32, 旬 1 篇 2, 楮産. 여기에서 水性이 좋다는 것은 물이 맑고 깨끗하며 알맞게 차가운 것을 뜻한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주변의 울창한 삼림으로 인해 여름에도 항상 맑고 적당하게 차가우므로, 제지에 적합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제지 작업에는 닥의 섬유질을 분해하기 위해 그것을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찧는 공정이 있다. 이 때 넓고 평평한 바위가 필요한데, 계곡의 개울 주변에는 넓고 평평한 자연석이 도처에 산재해 있어 이같은 여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셋째, 제조한 종이를 건조시키는 방법으로는 햇볕을 이용하는 자연건조법과 화력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경우 다량의 땔나무가 필요한데 산간 계곡은 이것을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자연적 여건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제지업은 이같은 환경적 요인을 두루 갖추고, 또한 닥나무 재배 및 자생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지닌 산록 혹은 산간지대에서 주로 행해졌다. 전라도 左峽 즉 중동부 산록 내지는 산간지대가 예부터「楮鄕」이라고0593)≪楮竹田事實≫(정조 20년) 병진 6월 초 7일. 불려진 것도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의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다.

조선시대 종이의 제조 방법은 원료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일본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며 손으로 걸러 제조하는 手灑法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의 제지법은 커다란 기술의 발전 없이 후기로 전승된 듯하다. 그 제조공정의 일단을 살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임진왜란 이전에 조지서의 屋舍가 去荊房·熟正間·紙筒間·擣砧間 등 10여 칸이 있었다는0594)≪承政院日記≫권 15, 인조 4년 8월 4일. 사실과 순조 27년(1827)에 통도사 승려들이 수군절도사에게 보낸 호소문에 熟正·打楮·浮取·乾取·擇塵·擣砧 등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제지공정은 去荊(닥의 불필요한 부분이나 표피 등을 제거하여 白楮로 만드는 과정)·熟正(白楮를 잿물과 섞어 가마솥에 넣고 삶는 과정)·打楮(삶은 후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질을 분해하는 과정)·浮取(분해된 섬유질을 큰 통 속에 물과 함께 넣고 휘저어 발로 종이를 뜨는 과정)·乾取(종이를 말리는 과정)·擇鹿(종이의 티끌·오물을 제거하는 과정)·擣砧(종이를 다듬잇돌에 올려 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단단하고 윤택이 나게 만드는 과정) 등의 순서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할 수 있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먼저 닥나무를 큰 가마솥에 넣고 쪄서 껍질을 벗긴 다음 표피를 제거한다. 이것을 며칠 동안 물에 담갔다가 햇볕에 표백시킨다는데 이를 白楮라 한다. 이 백저를 물에 다시 담가서 완전히 부드럽게 만든다. 백저 10관에 물 7말, 석회나 木灰 약 1말 2근의 비율로 큰 가마솥에 넣고 잘 휘저어 3 내지 4시간 가량 끊인다. 껍질이 부드러워지면 들어 내어 찬물로 깨끗이 세척한다. 그 이유는 백저에 붙어 있는 석회나 목회 또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든 원료를 다시 햇볕에 바래서 표백시키는데 겨울에는 2일, 여름에는 하루 정도 걸린다. 그 후 평평한 바위 위에 올려 놓고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섬유질을 분해시킨다. 이는 섬유질이 한 데 얽혀 있어 종이를 뜨기 위해서는 이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통 속에 분해된 원료와 물, 그리고 점착제를 함께 넣고 잘 휘저어 섬유소가 엉키게 한다. 이 때 접착제로는 닥풀(黃蜀癸) 뿌리에서 추출한 액체나 홰나무(槐木)·느릅나무(楡木)의 껍질 또는 뿌리에서 뽑아 낸 점액을 사용한다. 통속의 원료를 보통 대나무로 만든 발(簾)로 걸러 한 장씩 떠낸다. 떠낸 종이는 판(紙床)에 한 장씩 옮겨 포개어 놓고 수분을 빼기 위해 1일 작업량 단위로 쌓아 놓고, 다음날까지 그 위를 돌로 눌러 압착한다. 그런 후 종이를 한 장씩 떼어내 건조판에 붙여서 햇볕에 말린다. 마지막으로 말린 종이는 다듬잇돌 등 평평한 곳에 올려 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종이의 표면을 윤택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擣砧의 과정을 거치면 완제품이 되는 것이다.0595)全相運, 앞의 책, 293∼294쪽.
金錫禧,<李朝 後期 手工業硏究>(문교부 보고서, 1973) 참조.

함경도에서는 귀리·밀·보리 등의 짚을 원료로 하여 종이를 조하였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짚을 가마솥에 넣고 석회를 체로 쳐서 뿌려 잘 섞는다. 그리고 약간의 잿물(灰汁)을 넣고 2, 3일 밤낮을 삶아 잿물이 점차 줄어들면, 또 다시 아래 위로 잘 섞고 푹 삶아 낸 후 광주리에 담아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잿물을 씻어낸다. 물을 제거하고, 이것을 방망이로 3∼4일간 두드려 가루와 같이 가늘고 부드럽게 만든다. 짚가루 3말에 미리 찧어 놓은 故紙 1근 5량을 통 속에 함께 넣고 닥풀(楮膠)을 첨가하여 종이를 떠낸다. 또 다른 방법은 짚을 잘게 썰어 잿물과 섞어 6일간 삶아 낸 후 맷돌로 갈아 가루와 같이 만든다. 여기에 닥을 섞어 종이를 만드는데, 닥 1근에 짚 2근을 섞어 만든다.0596)徐有榘,≪林園十六志≫怡雲志 4, 文房雅製 紙. 이렇게 하여 제조된 종이는 麥藁黃紙 또는 黃藁紙라 불려지며, 쉽게 찢어지고 잘 망가지는 등 품질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생산된 종이는 거의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고 있었다. 이 밖에 짚, 대나무 잎, 뽕나무·소나무·버드나무의 잎이나 껍질, 삼대, 두들, 율무(薏苡) 와 각종 초목이 종이의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주로 닥나무 껍질과 일정한 비율로 혼합되어 그 제조에 이용되었다. 雜草紙 제조에는 풀 또는 나무껍질 1근에 닥 3량을 섞어 만든다.0597)≪端宗實錄≫권 11, 단종 2년 6월 임인. 그리고 각종 짚, 대나무 껍질, 삼대 등으로 종이를 제조할 때에는, 이들 원료 5분마다 닥 1분의 비율로 섞어 제조하기도 하였으나,0598)≪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임진. 그 제조 방법은 전술한 제지법과 대동소이하다. 조선의 제지업 중 특이할 만한 것은 중종 때 개발된 水苔紙의 제조법이다. 그 제조법은 물속의 이끼를 채취하여 며칠간 햇볕에 말려 색깔이 희게 되면 잘게 부수어, 이끼 6분에 닥 2분을 혼합하여 만든다. 이 때 이끼가 어리면 닥을 비율보다 더 많이 넣고, 완전히 자란 것이면 더 적게 넣어 제조한다. 종이의 색깔은 미청색으로 중국의 靑花牋과 비슷하며 지질이 견고하고 윤택이 난다고 한다. 또한 이끼는 재배할 필요가 없이 자연산을 그대로 채취하여 쓰기 때문에 노력이 적게 드는 한편, 그 이익됨이 넓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0599)金正國,≪思齋集≫4, 摭言. 기타 못쓰게 된 돗자리·베·地衣 등도 종이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원료로 하여 제조한 종이는, 닥을 원료로 하여 제조한 것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종이의 제조공정에서 용해와 표백에 사용되는 잿물(猛灰)은 처음에는 나무를 태워서 만든 木灰가 주로 사용되었다. 조지서의 종이 제조에 사용되는 목회는 서울의 각 戶와 성 밑 10리 이내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하여금 공납케 하거나, 이들을 차역시켜 생산·조달하였다.0600)≪成宗實錄≫권 38, 성종 4년 12월 갑신. 그러나 세종 때에는 서울의 각 호가 공납하는 灰는 반 이상이 현물 대신 쌀로 납부하고 있었으므로, 삼각산 근처에 있는 것으로써 사용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경기도와 황해도의 厥貢條에 蠣灰·藜灰·黃灰 등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종이의 제조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세조 3년(1457) 경부터는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여회를 사용하도록 국가에서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제조에 노력이 많이 드는 목회보다 값싼 여회가 보다 많이 사용되어진 것 같다. 실제로 용해나 표백에는 목회에 비해 생석회의 일종인 여회가 더 좋았다.0601)李光麟, 앞의 글, 8쪽.

그리고 조선은 종이의 품질을 개량하거나 혹은 국가의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닥을 다른 초목으로 대체하기 위해, 외국의 제지법 전래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실제 이를 추진시켰다. 즉 태종 12년(1412)에 중국종이(華紙)를 만드는 기술자인 遼人 申得財를 불러 종이를 제조하여 바치게 하고, 지장으로 하여금 그 기술을 전수받아 습득케 하였다. 또한 조선에 온 중국 사신에게 제지법을 물어 배우기도 하였다. 세조 10년(1464)에 朴元亨이 중국 사신에게 제지법을 묻자, 중국에서는 黃紙를 사용하고 있는데 어린 대나무 잎과 뽕나무 껍질을 섞어서 만들며, 조칙에 사용되는 白紙는 순전히 뽕나무 껍질만 사용한다고 대잡하였다. 이에 국왕은 조지소에 명하여 이 방법에 의해 시험삼아 종이를 제조하게 하였다.

중국의 제지법을 전습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행길에 지장을 동행시켜 중국의 제지법을 직접 견문하고 배워 오게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종 6년(1475) 謝恩使 파견에 紙匠 朴非曾이 동행하여 중국의 麻紙, 奏本紙, 冊紙 제조법을 보고 배워서 돌아 왔다. 그 중 마지와 책지 제조법에 대해 알아 보자. 마지는 生麻를 잘게 썰어 물에 담갔다가 석회를 섞어 삶아 낸 후 포대에 담는다. 그리고 잘 휘저어 석회를 깨끗이 제거한 후, 맷돌로 잘게 갈아 대바구니에 담아 깨끗이 씻는다. 이것을 맑은 물과 함께 나무 통 속에 넣어 종이를 만든다. 요동 지방의 책지는 생마와 뽕나무 껍질로 만드는데 먼저 眞木灰와 水石灰를 섞어 삶은 후 햇볕에 말리고,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표피와 석회를 제거한다. 이어 이것을 잘게 썰어 대광주리에 담아 깨끗이 씻은 다음 잘게 부순다. 다시 이것을 깨끗이 씻어 내고 滑條水를 섞어 종이를 만든다. 이 책지 제조법이 바로 거란인 신득재가 만들어 바친 책지 제조법이 아닌가 한다. 또한 조선은 일본의 제지법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세조 10년(1464)에 일본 종이가 단단하고 질기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그 제조법을 배워 와 전습토록 하였다.

외국 기술의 전수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의 제지법을 배워가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세종 7년(1425)에 중국 황제는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제지법을 알아 오게 하였다. 따라서 중국 사신의 요청에 따라, 세조는 전라도 감사로 하여금 전주의 지장에게 역마를 지급하여 급히 서울로 올려 보내라는 傳旨를 내렸다.0602)≪世宗實錄≫권 27, 세종 7년 2월 을묘. 이것은 아마 전주의 지장을 중국에 파견하여 조선의 종이 제조법을 전수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로 중국 황제가 조선에서 진헌한 표문지를 보고 그 질기고 단단함을 크게 칭찬하였던 사실에서,0603)≪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기묘. 조선 종이의 품질이 중국에까지 널리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조선·중국·일본 동양 3국의 제지법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이 대동소이하며, 다만 조선·일본은 닥을 주원료로 하였고, 중국의 경우는 삼·뽕나무·죽순 등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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