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3. 제지업
  • 3) 종이의 종류와 공납

3) 종이의 종류와 공납

조선 초기에 사용된 종이의 명칭은 대단히 많다. 그것은 제조 국가 및 시대·원료·용도·색깔·품질의 고하·제조공정 등에 따라 다양하게 명명되었으며, 또한 이들 명칭이 복합되어 나타난 경우도 많았다.

먼저 제조국가 또는 시대에 따른 명칭으로는 고려지, 조선지, 華紙(중국종이), 왜지·純倭紙(일본종이) 등이 있다. 제지원료에 따른 명칭으로 보이는 것은 楮紙(닥), 藁紙·藁精紙·蒿節紙(짚), 蒲節紙(부들), 麰節紙(보리 짚), 柳木紙(버드나무), 柳葉紙(버드나무 잎), 麻骨紙(심대), 桑木紙(뽕나무), 竹葉紙(대 잎), 松葉紙(솔 잎), 水苔紙(이끼), 薏苡紙(율무), 蘆花紙(갈대), 眼紙(안자초), 雜草紙·草紙(풀), 薐花紙(마름) 등이 있다.

종이의 용도에 따른 명칭으로는 表紙·表箋紙·常表紙·咨文紙·進獻紙·書契紙·奏紙·奏本紙·常奏紙·啓本紙·副本紙·副本單字紙·批判紙·狀紙·書狀紙·楮注紙 등 사대교린과 국가의 각종 문서에 사용되는 종이가 있다. 그리고 저화를 만드는 데 쓰이는 楮貨紙, 과거 시험용의 名紙 혹은 試紙, 이미 과거 시험에 사용된 落幅紙, 제사 및 각종 의식에 쓰이는 祝文紙, 갑옷 제조에 사용되는 甲衣紙, 관리들이 전임할 때 예물로 바치는 堂參紙, 불경 인쇄용 經紙, 초상시 사용하는 賻紙, 비 올 때 쓰기 위해 두꺼운 油紙를 이어 붙인 油芚紙, 神機箭 등 각종 統筒의 放火에 사용되는 大小藥線紙·火藥紙, 폐지나 고문서 등을 재생시킨 還紙, 군적을 기록한 軍籍紙, 병풍 제조에 사용되는 屛風紙, 새해를 축하하는 뜻으로 궐내에서 그림을 그려 나누어 주었는데 이 때 사용되는 歲畵紙, 방목 또는 방문에 사용되는 榜紙, 겉 봉투에 사용되는 皮封紙 등이 있다.

복합된 명칭이지만 품질의 고하를 나타내는 것으로는 상품 표지·중품 표지·하품 표지·상품 白厚紙·중품 白厚紙·상품 擣鍊紙 등이 있다. 제조 공정에 따른 명칭으로는 다듬잇돌에 넣고 방망이로 두드려 반드럽게 만든 擣鍊紙가 있다. 색깔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는 白紙·純白紙·紅紙·白厚紙·紅厚紙·白奏紙·白色常奏紙·靑薄紙·黃色薄紙·白薐花紙·白注紙·黃藁紙·染色紙 등이 있으며, 또한 서리와 같이 희다는 뜻의 霜花紙가 있다. 그리고 고문서 등과 같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休紙, 기름을 먹인 油紙, 면죄의 대가로 납부하는 贖紙, 楮紙이나 비단과 같이 단단하고 두꺼우며 윤택이 난다 하여 붙여진 繭紙, 두꺼운 종이인 厚紙, 밀·백랍 등을 올려 방습용 또는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蠟紙 등이 있다. 이외에도 常紙·常用紙·金鸞紙·綵紙·燈心紙 등이 있다.

고려 이래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종이의 특질을 중국·일본산 종이의 그것과 비교하여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종이의 품질이 매우 우수하였다는 사실은, 중국 송나라 사람들이 고려종이를 천하 제일이라고 칭찬한 데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五洲衍文長箋散稿≫紙品辨證說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옛부터 繭紙라고 부르는 종이가 있는데 그 명성이 천하에 떨쳤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닥을 원료로 사용함으로써 종이의 ‘단단하고 두꺼우며 반드럽고 윤택함’이 마치 비단과 같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어어서 조선산 종이는「단단하고 두꺼우며 반드럽고 윤택함」을 특질로 하고 있는데 비해, 중국산 종이는「부드럽고 얇으며 또한 곱고 깨끗함」을 특성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조선의 종이가 이같은 특질을 가지는 특징은 닥을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과 기타 외국산 종이의 품질은 우리나라 종이에 미치지 못하며, 단지 일본 종이가 우리나라의 것과 비슷한데 이 또한 닥을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특질은 관점에 따라 단점으로 비춰지기도 했다.≪林下筆記≫에 의하면, “우리나라 종이는 무겁고 털이 일어나 일본 종이의 가볍고 윤택하며 정치함만 못하다”고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나라 종이는 그림 그리기에도 좋지 못하고, 방망이로 두드려 다듬지 않으면 거친 털 때문에 글씨 쓰기에도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도련을 하면 단단하고 반드러워져 붓이 잘 미끄러지고 먹이 잘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0604)徐有榘,≪林園十六志≫怡雲志 4, 文房雅製 紙.

이상에서 조선 종이는「단단하고 두꺼우며 반드럽고 윤택함」을, 중국 종이는「부드럽고 얇으며 또한 곱고 깨끗함」을, 일본 종이는「가볍고 윤택하며 정치함」을 그 특질로 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실제로 문종 즉위년(1450)에 중국 황제가 조선의 표문지를 보고 그 단단하고 질김을 칭찬하였던 사실에서도 조선 종이의 특질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조선에서 특산되는 종이의 종류와 그 생산지를 대략 살펴 보면, 조지서의 자문지, 강원도 평강의 雪花紙, 전라도 전주와 남원의 扇子紙·簡壯紙·注油紙·油芚紙 등이 있으며 그리고 苔紙와 竹淸紙도 이름이 나 있었다. 실로 이들은 천하의 희귀한 명품으로 널리 알려졌으며,0605)위와 같음. 또한 전라도 순창에서 생산되는 종이도 진귀한 것으로 귀중하게 여겨졌다고 한다.0606)丁若鏞,≪牧民心書≫律己 6條 淸心.

종이는 그 용도 및 국가의 정책적 목적에 따라 각기 달리 사용되었다. 태조 7년(1398)에는 表箋을 제외한 書狀에는 표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태종 원년(1401)에는 공사 업무에 厚紙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동왕 7년(1407)에는 궁중용 및 국용을 제외하고 啓聞에는 白奏紙, 呈狀에는 常奏紙, 關牒과 公私 書狀에는 常奏紙와 狀紙를 사용하도록 보다 상세히 규정하였다. 이어서 동왕 14년(1414)에는 官敎旨는 관례대로 厚紙를 사용할 수 있으나, 각 도에서 올라오는 膳狀은 厚紙 대신 常紙를 사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치를 금하기 위한 방편으로, 각종 의식에서 국왕이 참고하는 笏記에 紅綾衣 대신 綾花紙를 사용하게 하였다.

세종 2년(1420)에는 외방에 출장가는 사신에 대한 公禮狀은 厚紙의 사용을 금하였고, 동왕 7년(1425)에는 진상 冊紙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綾段을 사용치 말고 白綾花紙를 사용하게 하였다. 세종 3년(1457)에 啓本紙는 민폐를 줄이기 위해 雜草紙를 사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名紙는 擣鍊白奏紙를, 堂參紙와 名銜紙는 白色常奏紙를 사용케 하고, 중앙 각 관청에 납부하는 表紙·擣鍊紙·擣鍊白奏紙는 국용으로 책정된 것을 제외하고는 白奏紙로 대용하게 하였다. 예종 원년(1469)에는 啓本紙를 비롯한 국가의 각종 문서는 모두 잡초지를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는 민폐를 제거하고 부족한 닥을 절약하기 위함이었다. 세종 25년(1443)에는 각종 啓聞과 膳狀에는 모두 백주지를 사용하고 표지를 사용할 수 없도록 六典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준수하지 않고 표지나 도련지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여 그 위반자를 처벌하게 하였다. 이같이 각종 종이의 용도에 대해 법규정으로 강제하거나 심지어 이를 준수하지 않고 위반한 자를 처벌하게 한 것은, 과중한 地役에 다른 민폐를 줄이고 사치를 금하며 또한 부족한 닥을 절감하기 위한 국가의 정책적 목적에서 취해진 조처라 생각할 수 있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 정부에서는 원료와 노력이 비교적 많이 소모되는 厚紙와 表紙의 사용을 금지하고, 민폐를 주릴 수 있는 잡초지·奏紙·狀紙 등의 사용을 권장하였다.

조선 초기에 지장들은 그들의 제조 활동에 국가로부터 많은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제조한 종이는 주로 사대교린용 문서나 조공품 및 관청과 왕실의 각종 수요에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지장의 부단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들 제품의 생산은 그들의 영리와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제지작업에 대한 세심한 배려나 애착·정성 등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같은 요인은 종종 지장의 태만과 종이의 조악성을 야기시켰다.

국가는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으로 양질의 종이를 공급받기 위해서, 지장에 대한 통제와 조악품을 만든 자에 대한 처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장을 올바로 감독하지 못한 관리들까지 처벌하였다. 더 나아가 조잡품을 만든 지장에 대한 처벌은 물론이고, 종이의 규격까지 법전으로 성문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즉 성종 때 편찬된≪大典續錄≫에서 楮注紙는 長 1척 6촌·廣 1척 4촌 이상, 楮常紙는 長 1척 1촌·廣 1척 이상의 규격화된 제품만을 公私에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지나치게 얇거나 흠이 있는 불량품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있다. 또한≪大典後續錄≫에서는 자문지 제조에 태만하여 조악품을 제조한 장인에 대한 처벌을 처음에는 杖 80대, 1회씩 증가할 때마다 10대씩을 가산하며 100대에 이르면 그친다고 규정하였다. 이같은 제품에 대한 규격화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더욱 세분화되어 종이의 길이와 너비는 물론 무게까지 법전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종이의 長短·廣狹·중량 등을 법전으로 규정하고 조악품을 만든 지장에 대한 처벌을 점차 강화시켜 나간 것은, 지장의 근무 태만과 관리의 감독 소홀을 방지하여 양질의 종이를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공급받고 또한 공납에 따른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다.

종이의 수량을 계산하는 단위로서는 長·卷·束·軸·貼·塊 등이 있다. 20張이 1卷이며 卷·束·軸·貼은 동의어이다. 그리고 1塊는 100卷, 즉 2,000張이다.

조선 시대의 공물 제도는 고려의 유제를 답습한 것으로, 태조 원년(1392) 10월에 貢賦詳定都監을 설치하고 공물을 상세히 정하도록 하였다. 즉 태조는 고려의 제도적인 폐단을 제거하고 토지의 산물에 따라 등급과 차례를 정하여 국가 재저의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土貢(종이)읍 읍수 土宜
(닥나무)
읍수
비 고
충청도 忠州, 丹陽, 淸風, 陰城, 廷豊, 堤川, 淸州,
天安, 沃川, 文義, 木川, 竹山, 稷山, 牙山,
永同, 報恩, 公州, 韓山, 舒川, 庇仁, 鴻山,
恩津, 連山, 懷德, 扶餘, 尼山, 洪州, 泰安,
沔川, 唐津, 禮山, 靑陽, 保寧, 結城, 大興
35 13  
경상도 慶州, 密陽, 梁山, 蔚山, 淸道, 大丘, 慶山,
東萊, 昌寧, 彦陽, 機張, 靈山, 玄風, 淸河,
安東, 寧海, 順興, 醴泉, 榮川, 永川, 靑松,
義城, 盈德, 禮安, 河陽, 基川, 新寧, 尙州,
星州, 善山, 陜川, 草溪, 高靈, 聞慶, 知禮,
晋州, 金海, 咸安, 咸陽, 固城, 居昌, 河東,
珍城, 漆原, 安陰, 三嘉, 宜寧, 鎭海   
48 4  
전라도 全州, 南原 2 35  
경기도   0 1 厥貢:
蘆花紙
황해도 谷山, 新恩, 長淵, 平山, 牛峯 5 4  
강원도   0 17 厥貢:
紙·休紙
평안도   0 32  
함길도   0 0  

<표 4>전국의 종이 공납 읍

(≪世宗實錄地理志≫土貢 土宜條에 의함)

조선 초기에 종이를 공납하는 도와 읍, 그리고 그 종이의 종류 등에 대해서는≪세종실록지리지≫각 도의 厥貢條와 각 읍의 土貢條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정리하면 위의<표 4>와 같다.

위 표를 참고하면, 전국의 종이를 공납하는 도와 읍은 충청도 35읍, 경상도 48읍, 전라도 2읍, 황해도 5읍, 그리고 강원도·경기도 등 6도에 걸쳐 총 90읍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라도의 경우이다. 전라도는 35곳의 닥나무 생산읍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종이를 공납하는 읍은 전주·남원 2읍뿐이다. 조선 8도 중에서 가장 많은 닥나무와 가장 품질이 좋은 종이를 생산하고 있는 전라도에서, 단지 전주·남원 2읍만이 도 전체의 종이를 공납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아마 전라도의 경우 닥나무 생산읍이 곧 종이를 공납하는 읍이라는 혼효된 동일 의식 속에서 이같이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세종실록지리지≫에 전주와 남원만이 종이를 공납하는 읍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은, 단순히 종이를 공납하는 읍임을 명시하기 위한 의도에서라기보다는 이들 읍이 공납하는 종이의 종류와 그 품질의 우수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른 지방 각 읍의 土貢條에는 단순히 ‘紙’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데 비해, 전라도 전주의 土貢條에는 表箋紙·奏本紙·副本紙·咨文紙·書契紙 등 공납하는 종이의 명칭과 도내에서 전주와 남원 두 읍의 종이 품질이 우수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역시 남원의 토공조에도 표전지라는종이의 명칭만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같은 추측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전라도의 경우 닥나무 생산읍 35읍에 전주를 포함한 36읍이 실제로 종이를 공납한 읍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국에서 공납한 종이의 종류를 각 도별로 보면, 전라도의 表箋紙·咨文紙·副本單字紙·奏本紙·皮封紙·書契紙·祝文紙·表紙·擣鍊紙·中幅紙·常表紙·甲衣紙·眼紙·歲畵紙·白奏紙·火藥紙·狀紙·常奏紙·油芚紙·油芚, 경상도의 進獻表紙·國用表紙·擣鍊紙·眼紙·白奏紙·常奏紙·狀紙·油芚, 경기도의 蘆花紙 등이다. 그리고 충청·강원·황해도는 공납하는 종이의 세부 명칭은 생략하고 단순히 ‘各色紙’ 혹은 ‘紙’라고만 기록하고 있으며, 기타 油芚·休紙 등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공물은 국가가 개별적 民戶를 대상으로 부과한 것이 아니고 지방 각 읍을 단위로 分定하는 것이 상례였다. 국가로부터 공물을 분정받은 각 읍은 그것을 읍 자체에서 조달하기도 하고, 혹은 民戶에 직접 분정하여 징수하기도 했다. 조선은 국초부터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을 공물로서 각 읍에 분정 징수하였다. 따라서 지방 각 읍은 국초부터 관청에서 닥나무 밭을 개설하여 공물인 닥의 납부에 충당하였다.≪經國大典≫戶典 徭賦條에는 지방 각 읍에서 닥나무를 배양하여 그 소출을 공납하도록 규정하였다. 따라서 각 읍은 닥나무 밭을 개설하여 그 곳에서 생산된 닥의 표피를 제거한 白楮로써 공납하고 있었는데 주로 최상품의 것만을 바쳐야 했다. 상납된 백저는 중앙의 조지서에서 表箋紙·咨文紙를 비롯한 각종 종이를 제조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와 더불어 각 읍 또는 각 도는 완제품의 종이를 중앙에 공납해야 했다. 이것 역시 民戶에게 직접 부담시키지 않고, 각 읍이 官楮田 소출의 닥을 원료로 하여 자체적으로 종이를 생산·공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를 官備貢物이라 하는데, 그 품목으로서는 종이를 비롯하여 옻칠·꿀·버섯·밤 등이 있었다.0607)≪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경자. 그러나 각 읍의 자체 조달 원칙은 철저히 준수되지 않고 민호에게 부담시키는 것이 다반사였다. 매년 정례적으로 중앙에 상납하는 것을 상공이라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서 문종 즉위년(1450) 이전에 각 도에서 1년에 진상하는 冊紙는 경상도 6,500권, 전라도 4,500권, 충청·강원도 각 2,000권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정부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상납케 하는 별공이 있었다. 중국에 대한 조공품으로서의 進獻紙와 각종 서적 인쇄용 冊紙 등을 비롯한 각종 종이들이 별공으로 수시로 분정·징수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태종 8년(1408) 정월에 각 도로 하여금 진헌지 1만 장을 상납할 것을 명하였고, 세종 16년(1434) 7월에는≪資治通鑑≫인쇄용 종이로 조지소에 5만권, 경상도에 10만 5천 권, 전라도에 7만 8천 권, 충청·강원도에 각각 3만 3천 5백 권씩, 도합 30여만 권을 배정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그리고 세조 3년(1457) 6월에 대장경 50건의 인쇄에 소용되는 종이 40만 6천 2백 권을 충청도에 51,126권, 전라·경상도에 각각 99,004권, 강원도에 45,126권, 황해도에 51,126권씩 배정하고, 그 제조한 종이를 해인사로 수송하게 하였다. 이같이 각 도에 분정·상납하게 하는 별공으로서도 막대한 양의 종이가 공납되었다. 불시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책정되는 별공은 주로 긴급을 요하였고 또한 그 폐단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관청에서 그 대가를 지급하여 민폐를 방지하였다.0608)≪端宗實錄≫권 9, 단종 원년 11월 병진. 실제로 관청에서 종이를 제조할 때 사용되는 닥을 민간에서 구입할 때에는, 쌀·콩 등 대가를 지급하라는 중앙 정부의 빈번한 지시와 더불어 이를 위반할 때에는 관리를 처벌한다는 강경한 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

중앙정부로부터 일정량의 종이를 분정받은 지방 각 읍은 이를 민호에게 분정하여 징수하거나, 혹은 도회소를 설정하고 이곳에서 지장·농민 등을 사역시켜 제조하였다. 즉 각 읍에서 직접 종이를 조달할 경우, 도회소를 설정하고 官楮田 소출의 닥이나 매입한 닥을 원료로 하여 이곳에 지장·농민·군인·入番人吏·日守·관노비0609)≪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경진. 혹은 승려 등을 동원시켜 제조하였다. 농민의 경우 1년에 일정 기간 동안 국가의 각종 役에 종사해야 했다. 각 읍은 입역 기간 동안 이들을 사역시켜 종이를 제조하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正朝에는 지방의 향리들도 궐문에 숙배하고 예조에 종이를 상납하는 것이 상례였다.0610)≪成宗實錄≫권 183, 성종 16년 9월 기미. 기타 家舍·전답·노비에 관한 소송이나 전세·공물 수납 때에 수수료로서 종이를 바쳤음은 물론이고, 노비공으로서 종이를 납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종이를 상납하는 경우, 각 읍의 향리 중 유식하고 부유한 자를 선임하여 그 수송과 중앙 관청에의 납입을 담당시켰는데, 이를 담당하는 향리를 貢吏라고 하였다. 공리가 종이를 상납하기 위해 상경할 때에는 반드시 종이의 명칭·수량·납부 관청·상납 기일·공리의 성명 등이 기재되어 있는 陳省을 수령으로부터 받아 공물에 첨가하여 중앙 각 관청에 납부하였다. 상경 후 이들은 주로 당해 읍의 경재소에 머물면서 이 일을 담당했다. 공물의 수송시에는 수운에 의한 경우도 있고, 육운시에는 역마를 이용하여 수송하였다. 그러나 각 역의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농민을 동원하여 운반함으로써 여러 가지 폐단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상경한 공리는 납부할 종이의 卷端에 납부 연월일을 쓰고 해당 관청에 납부하였는데, 이 때 감찰이 제품을 검사하여 하자가 없을 경우 印信을 찍어 수납하였다.0611)≪成宗實錄≫권 284, 성종 24년 11월 을사. 정해진 기일 내에 공물을 상납하지 못한 수령은 처벌을 받았다. 공물 납입이 끝나면 공리는 관청으로부터 납입 완료 증명서인 准納帖을 받는데, 이로써 공물 납입이 완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품에 하자가 있다던가 혹은 정해진 규격에 맞지 않으면 수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공물 납입시 관원의 심사는 거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고 실제 업무는 소속 下吏 또는 관노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자의에 의한 斥退가 성행하였다. 이같은 이유 등으로 정해진 기일 내에 공물의 납부가 어렵게 되면, 그 틈을 타서 관인·중앙 각 관청의 吏奴·승려·상인 등이 민호를 대신하여 종이를 상납하고 그 대가를 받아내는 代納 또는 防納이 성행하였다. 강원도 평강 등 읍은 장흥고에 종이를 공납하는 읍이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는 닥나무가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色吏가 백성들에게 그 대가를 받아 상경하여서 종이를 구입·상납하는 대납이 연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0612)≪端宗實錄≫권 5, 단종 원년 정월 기묘. 세조 때의 대사헌 梁誠之는 공물의 대납 중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큰 폐해가 되었던 것으로 紙芚·白楮·油密·正鐵 등을 들었다. 그리고 문종 즉위년(1450) 司諫院 右司諫大夫 崔恒 등의 상소에 의하면, 원래 종이는 수령이 관청에서 직접 조달하였으나, 지금은 승려들이 모두 방납하여 백성들이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조선 초기에는 백저·종이·지둔 등의 방납 또는 대납이 보편화되었으며 그에 따른 폐단 또한 막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가에서는 방납 또는 대납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종종 이를 금지하기도 하였으나,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는 계층의 이같은 행위는 근절되지 않고 대동법이 시행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河宗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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