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4. 조선업
  • 2) 조선 전기의 조선업
  • (1) 민간조선업

(1) 민간조선업

조선시대의 선박은 그 규모나 수에 있어서 관선이 압도적으로 많고 우세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부문에 있어서도 관부가 주관하는 관선의 건조가 그 중심이 되었다. 그래도 조선 전기부터 私船이 수운과 해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았다. 조선 초기부터 정부에서 조운을 주관하고, 그것을 위한 漕船을 보유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조운에 사선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사선조운의 실례 몇 가지를 들어보면, 태종 3년(1403)에는 경상도 세곡의 陸運 여부가 논의되었는데, 이 때 경상도의 세곡은 전라도 연안을 통하는 해운을 피하고, 忠州 金遷까지 육운하여 그 곳에서 조운선과 사선으로 경창에 운반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며,0622)≪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신해. 태종 12년(1412)에도 전라도의 1년 세곡 7만 석 중 2만 석을 사선으로 운반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고,0623)≪太宗實錄≫권 24, 태종 12년 11월 갑신. 태종 15년(1415)에는 사선을 조운에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하여 사선으로 쌀을 나르고 군선으로 호송키로 한 일이 있었다.0624)≪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6월 임오. 그 후 조운 문제 자체에 변화가 많았지만, 조운에 있어서의 私船賃用은 조선 후기에도 계속되었으며, 조운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사선을 전투용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0625)≪中宗實錄≫권 48, 중종 18년 6월 을축.

조운에서의 사선 임용은 조선시대 사선업이 그만큼 발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조운 이외에도 사선 경영은 많았다. 조선 초기에 露梁津·三田渡·楊花渡 등에 설치하였던 官營津船이 느리고 무겁다 하여, 도강인들이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대신 운임이 더 비싸지만 경쾌한 私津船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나,0626)≪世宗實錄≫권 102, 세종 25년 10월 경인. 왜구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사선이 바다로 나갈 때는 3, 4척 혹은 6, 7척을 한 떼로 하여 소재 관아가 발급하는 文引을 소지토록 한 기록0627)≪世宗實錄≫권 38, 세종 7년 6월 신유. 등은 사선의 활발한 활동상을 말해주고 있다.

사선들이 어떻게 건조되었는가를 상세히 전해주는 기록은 거의 없으며, 다만 연안의 목재 산지에서 선주들에 의하여 건조되었으리라 추측될 뿐이다. 세종 8년(1426)에는 병조에서 사선 건조에 대한 금령이 없으므로 소나무를 도벌해서 선박을 건조하는 경우가 있다 하고, 해변의 소나무는 그 소재 지방 관과 각 포구의 萬戶와 千戶가 이를 관할하며, 사선을 건조하는 자가 있으면 치죄하고 선박을 몰수하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다.

선박 건조의 장소는 해안이나 강안으로서 솔밭이 무성하게 우거진 곳이었는데, 그런 곳은 정부에서 모두 금벌구역으로 정하여 관선 제조를 위한 재목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사선 건조는 원칙상 관선 건조장 이외의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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