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4. 조선업
  • 5) 새로운 선종의 개발
  • (1) 병조선

(1) 병조선

兵漕船은 세조(1455∼1468)때에 군용과 조운에 겸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배이다.0655)金在瑾, 앞의 책(1977), 50쪽.
―――, 앞의 책(1984), 111쪽.
그것은 당시 사용되고 있던 大船·中船·小船 등의 군선을 개량하여 만들고, 나중에는≪經國大典≫에 나타나는 大猛船·中猛船·小猛船으로 발전하는 것으로서, 하등 한선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배가 아니다. 그런데도 병조선은 지금껏 한국 조선사상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아주 독특한 배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 설명은 후에 미루고, 우선 兵漕船이 등장하는 배경과 경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초기의 군선은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大船·中大船·中船·快船 등 10여 종에 그 총 척수는 829척에 달했다. 이들은 왜구를 퇴치하는 데 나름대로 잘 활용되었다. 그러나 그처럼 방대한 수군의 세력은 세종 25년(1443) 대마도주와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왜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됨으로써 필요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종부터 세조에 이르는 수십 년 동안 군선 척수의 감소 및 船制의 개혁에 관하여 여러 가지 방도가 강구되었다.

세종대에는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주로 군선의 체질개선을 위한 선제개혁이 추진되며, 한때 중국의 조선법에 입각한 甲造船을 채택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안가서 문종대에 포기되고 전통적인 한국 조선법으로 복귀되었다.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군선보다도 조운선의 보충에 더 주력하였다. 세조 6년(1460) 7월에는 전라도에서 船匠 100명과 목수 200명을 징발하여 船材가 풍부한 변산과 완도에서 조운선 104척을 건조해 가지고 경기·충청·전라의 각 도에 할당하기도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轉運判官을 증원하고 또한 정부 당국자간에 漕船문제를 활발히 논의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세조 10년(1464) 7월 좌의정인 申叔舟가 “諸浦의 병선이 모두 제멋대로 만들어져 쓸모가 없고, 또한 船軍이 부역에 동원되어 배를 지키는 자도 많지 않으니 차라리 軍用과 漕運에 겸용할 수 있는 배를 만들도록 하자”고 제의함으로써0656)≪世祖實錄≫권 26, 세조 7년 10월 무진. 병조선의 개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이 때 돌연 일어난 것이 아니고, 그 전 문종 원년(1451)에도 중국의 조선법을 버리고 전통적인 조선법으로 복귀하며 “單造船은…조운에도 쓸 수가 있어서 무궁한 이득이 있다”0657)≪文宗實錄≫권 8, 문종 원년 6월 기묘.고 역설된 바가 있는데, 이 때에 이미 병조선의 생각은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신숙주는 그것을 계기로 船艦을 관장하는 총책임자인 典船色의 都提調에 겸임으로 임명되어 그 후 몇 년 동안 병조선 개발에 부심했다.

그 결과 세조 11년(1465) 7월에는 그 일이 일단 마무리되어 경기관찰사로 하여금 병조선으로 개발된 80명이 탑승하는 대선 2척, 50명이 타는 중선 4척, 30명이 타는 소선 6척 등을 영솔하고 楊花渡에 모이도록 하여 그것을 시험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世祖實錄≫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이 中宮과 함께 喜雨亭에 행차하여 수전연습을 관람하였는데 孝寧大君 示甫, 臨瀛大君 璆, 永膺大君 琰, 領議政 申叔舟…및 承旨 등이 어가를 따랐다. 兵曹判書에 명하여 金礩을 左廂大將, 西原君 韓繼美를 右廂大將으로 삼고 경기의 병선을 나누어 가지고 서로 오르내리며 수전을 연습토록 하였는데 배의 빠름이 나는 것과 같고 북을 치며 서로 교전하고 고함소리는 천지를 울리며 승자는 개가를 부르며 돌아오니 王은 군용이 정제함을 기뻐하며 특히 申叔舟에게 御衣 한 벌을 하사했다(≪世祖實錄≫권 36, 세조 11년 8월 정축).

이상과 같은 겸용선 개발의 경위는 후세의 기록들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즉 영조 46년(1770)에 편찬된≪東國文獻備考≫의 兵考 舟師條에는 “세조 11년 비로소 兵漕船을 두었는데, 당시에 신숙주는 典艦司提調가 되어 중국·일본·유구 등의 선체를 널리 보고 절충하여 배를 만들어 大·中·小로 나누어 사용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大船은 上粧을 설비하여 전공에 쓰고, 上粧을 철거하여 조운에 써서, 한 배를 두 가지 용도로 하여 그것을 兵漕船이라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후에 편찬된≪增補文獻備考≫와≪萬機要覽≫에 그대로 전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첫머리의 “兵漕船은 중국·일본·유구의 船體를 널리 보고 절충해서 대·중·소선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兵漕船 뿐만 아니라 모든 한선이 마치 중국과 일본 등 외국의 배를 모방하여 만든 것처럼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東國文獻備考≫의 편자가 잘못 표현한 때문이다.

중국과 유구의 배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세종대에 한때 그 시험선을 만들어 시험해 보고 중국의 甲造法을 채택하였다가 문종대에 그것이 한국 현실에 적합지 못하므로 한국의 전통적인 單造船, 즉 한선 구조법에 따른 배로 복귀한 일이 있었다.

일본의 배에 대하여는 태종·세종·세조대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험을 해 보았으나 쓸만하지 못하다는 결론이었다.0658)이 점에 대하여는 金在瑾, 앞의 책(1989), 57쪽에 자세히 해설되어 있고,≪成宗實錄≫권 37, 성종 4년 12월 임오조에도 日本船이 쓸만하지 못하다는 申叔舟의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이런 점을 가지고 전기한≪동국문헌비고≫의 편자가 중국·일본·유구의 배들을 널리 보았다고 표현한 데까지는 그런대로 무방하다 하더라도 그 선체를 절충해서 대·중·소선을 만들었다고 한 것은 옳지 않은 표현으로서 병조선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내용이다.

병조선은 결코 중국·일본·유구의 선체를 절충하여 만든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한국의 전통적인 조선법에 따라 만든 배이다. 그것은 병조선이 다음에 기술하는 猛船과 거의 동일한 배라는 점으로도 이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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