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4. 조선업
  • 5) 새로운 선종의 개발
  • (3) 판옥선

(3) 판옥선

板屋船은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이 일어난 바로 그 해에 새로 개발된 아주 혁신적인 군선이다.0660)金在瑾, 앞의 책(1977), 62쪽. 종래의 군선은 上粧이 별로 없는 平船이었는데 판옥선은 여느 선체 위 전면에 걸쳐 거대한 상장을 꾸며 놓은 배이다. 이 점에 대하여≪明宗實錄≫에는 “옛날의 왜적은 모두 平船을 타고 왔으므로 우리나라도 平船을 가지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데 지금 왜적은 모두 屋船을 타고 오므로 부득이 板屋船을 쓰지 않을 수 없다”0661)≪明宗實錄≫권 32, 명종 21년 3월 갑진.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림 10>은 규장각 장서인≪各船圖本≫중에 나타나 있는「戰船」의 그림이지만, 그것은 바로 판옥선이다. 그 배의 선체는 노가 꽂혀 있는 자리를 경계로 하여 그 아랫부분과 그 윗부분, 그리고 갑판 위의 다락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아랫부분은 배의 본체이고, 윗부분은 상장이라 이르는 상부구조이며, 다락은 將台라 이르는 지휘소이다. 그 상장은 갑판 전면에 걸쳐 가설되어 있으므로 판옥선은 요즘으로 말하면 全通船樓船(complete superstructure vesse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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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板屋船
<그림 10>板屋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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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그 기본골격이<그림 11>과 같이 되어 있다. 底板과 外板, 駕木과 加龍木(그림에서는 생략되어 있음) 등으로 된 선체 위에 舷欄(밑도리), 柱木(기둥), 牌欄(윗도리), 牌板(방패판), 上駕木 등으로 그림에서와 같이 상장이 꾸며져 있고 상하 갑판 사이에는 필요한 만큼 梁柱(그림에서는 생략되어 있음)가 세워져 있다. 이들 상장은 마치 건축물의 2층과 같은 공간을 이루고 그런 屋을 판자를 가지고 꾸몄다고 해서 판옥선이라는 당초의 이름도 생겼다가 나중에는 戰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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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板屋船의 斷面
<그림 11>板屋船의 斷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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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은 그렇게 갑판을 2중으로 함으로써 여러 가지 뛰어난 기능을 발휘했다. 우선 그 첫째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갈라놓고 비전투원인 格軍을 안전하게 보호한 점이다. 櫓軍들은 판옥 내에 자리잡고 적에게 노출됨이 없이 노역에만 전념하고, 전사들은 상갑판 위 높은 자리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정말로 판옥선의 탁월한 기능이었다.

옛날 군선의 탑승원은 전투력을 가진 전사와 전투력이 없는 노역 기타 잡역을 담당하는 비전투원인 격군으로 대별되고 대개는 전사보다 격군이 더 많은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 후기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판옥선인 전선의 정원은 총원 164∼194명 중 노군이 100∼120명, 砲手·火砲匠·射夫 등 전투원이 52∼62명, 舵工 및 기타 10명이었다.

그러므로 猛船같은 平船에서 전투원과 노군이 한 곳에 모여 전투에 임한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노군은 겁을 먹어 자기 힘을 다 내지 못하고, 전사들은 장소가 비좁아 전투능력을 다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판옥선은 갑판을 2층으로 하여 그들을 갈라 놓음으로써 그런 문제를 쉽게 해결했다.

판옥선의 뛰어난 기능은 둘째로 전사들이 높은 자리에서 적을 내려다 보며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점이고, 셋째로 적이 접근하여 배에 뛰어들기 어렵게 된 점이다. 이 두 가지 장점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로부터 한국 수군의 군비는 오로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검술에 매우 능했다. 여말선초의 왜구도 몸에 지닌 무기라고는 오직 칼 한 자루뿐이었는 데도 그 기세는 강해서 육전으로는 막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일본 수군의 전법도 무조건 적선에 뛰어들어가서 1대 1의 백병전을 벌여 적선을 점령해 버리는 수법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인들이 구사하는 해전의 전술은 검술을 바탕으로 하는 접전(boarding tactics)이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수군의 전술은 적선을 어느 정도의 거리에 떼어놓고 활로 적을 사살하고, 불화살을 쏘아 배를 태워버리던가 포탄을 사용하여 격침해 버리는 말하자면 弓術戰과 砲術戰이었다.

그런데 판옥선은 적의 장기인 접전을 막고, 한국의 장기인 포술전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배였다. 판옥선은 선체가 2층으로 되어 있어서 적이 아무리 접근해도 기어오르기가 매우 힘들게 되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임진왜란에 관한 일본측 기록에 조선의 군선은 성벽처럼 높아서 난공불락이라는 내용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또한 판옥선은 포의 위치가 높아서 포격전에 매우 유리한 배였다. 당대의 화포는 그 사정거리가 고작 수백 보인 것들이어서 포의 자리가 높을수록 명중률이 크게 향상되는 터인데, 판옥선은 상장갑판 위에 포를 안치하므로 포의 자리가 충분히 높아서 접근해 오는 적선을 내려다 보며 포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각 해전에 있어서의 한국 수군의 압승은 분명히 판옥선과 함포의 위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판옥선은 기동성이 매우 좋다는 특성도 지니고 있었다. 판옥선은 선체가 종래의 배에 비하여 크고 또한 노역을 하는 장소도 넓었기 때문에 노군의 수를 쉽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노 한 자루에 5명씩 붙어서 노를 저었는데 이것은 판옥선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느 배에 비하여 기동성이 좋은 것은 당연했다.

개발 당초에 있어서의 판옥선의 크기는 분명치 않다. 오직 임진왜란 때 판옥선의 정원은 125명 이상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판옥선의 크기에 대하여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 7년(1615)에 統制使가 타는 가장 큰 것의 底板 길이를 70척, 다음 크기의 것을 55척, 가장 작은 배의 저판 길이를 47.5∼50척으로 정한 바가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 크기로 여겨지고 있다.

임진왜란을 얼마 앞두고 판옥선이 출현한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큰 것이었다.0662)金在瑾, 앞의 책(1989), 216쪽. 판옥선 탄생의 첫째 의의는 무엇보다도 한국 선박사상 가장 혁신적인 군선이 창출되었다는 데 있다. 그 출현의 계기부터가 猛船 따위의 平船을 가지고는 일본의 침입을 제압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선체 위에 전면에 걸쳐 板屋을 구축한 그 船制는 정말로 참신한 것이었다.

판옥선의 출현은 당시 海防에 있어서 소선주의의 미몽을 깨트리고 전통적인 대선주의로 발전적으로 복귀한 의의를 지닌다. 또 판옥선은 그 선형·구조·기능 등이 완전히 독창적인 배이다. 중국의 군선은≪武經總要≫와≪武備志≫같은 병서에 많이 나타나 있지만, 거기에 판옥선과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다.

판옥선은 조선 후기에 전선으로 이름이 바뀌어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지만, 그 船制는 조선 후기의 여러 가지 군선의 모형이 된다. 조선 후기에 전선과 더불어 해방의 주력을 담당하는 防船은 平船의 선체 위에 방패판을 설치하고 있는 중형군선으로서 판옥선이 간략화된 것이고, 龜船은 판옥선에서 평탄한 갑판을 제거하고 대신에 둥그런 蓋板을 복개한 것이다.

판옥선은 또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전투선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한국 군선에 있어서 여말선초의 군선과 판옥선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여말선초의 군선은 그 선체구조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화기를 장비하여 비로소 武裝船이 되었다는 의의를 가진다. 그리고 판옥선은 오로지 군선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전투함이다. 그 전의 함선들은 군선이라 해도 조운 등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판옥선 출현의 결실은 그 배가 개발된 지 37년 후에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크게 맺어졌다.

<金在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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