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5. 염업
  • 2) 소금의 판매와 유통과정

2) 소금의 판매와 유통과정

고려 후기의 전매제하에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베를 바치고 소금을 받아가게 함으로써 소금의 배급이나 또는 염무역의 교환대상물로 布 한 가지만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조선 태조는 포와 함께 쌀도 市價에 준하여 소금값으로 쓸 수 있도록 하였다.0685)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賦典, 鹽法. 태종 9년(1409) 11월에는 사간원에서 “지금 국가에서 염장관을 설치하여 소금을 구어 무역하는데 포라는 물건은 굶주린 사람이 먹을 수 없으니 서울과 지방의 官鹽을 모두 쌀로 무역하여 군량을 보충할 것”0686)≪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1월 정해.을 상언하여 소금의 교환대상물을 포가 아닌 쌀만으로 교환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2년 후인 태종 11년 11월, 사간원에서 “국가에서 염장관을 설치하고 소금을 굽게 하여 백성의 布貨와 바꾸니 백성이 몹시 편하게 여겼는데 기축년(1409)부터 쌀로만 바꾸니 백성 가운데 가난한 자는 그 이익을 얻지 못하고, 깊고 먼 곳에 사는 자는 쌀을 운반하기가 곤란하니 전례에 의하여 紬·苧·正布·楮貨로 바꾸어 국용에 이바지하고 민생을 편하게 할 것”0687)≪太宗實錄≫권 22, 태종 11년 11월 신사.을 상소한 바 소금값은 쌀만이 아니라 포와 저화 중에서 자원에 따르게 하였다. 특히 저화의 사용은 태종의 저화유통의 장려책이기도 하였으며, 또한 먼 곳의 거주자가 미곡을 운반하기에 고통이 크므로 취해진 조치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태종 14년 9월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도록 잡곡으로도 가격을 감해서 바꾸게 한 적이 있었다.0688)≪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9월 무인. 심지어는 태종·세종년간에 일시 저화 외에 동전을 유통시킨 기간이 있었는데 이 때에는 동전도 소금을 구매하는 데 사용된 바가 있었다.0689)≪世宗實錄≫권 111, 세종 28년 2월 병오.

이와 같이 국초로부터 백성들이 소금을 구득 화매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포와 미, 그리고 잡곡·저화·동전 등 다양하였으나 포와 미가 그 주류를 차지하였고 염가는 市價에 따라서 교환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확실한 값은 알 수가 없었다. 세종 12년(1430) 2월에 시장의 시세를 살펴보면 綿布 1필은 소금 3석 9두, 正布 1필은 소금 1석 3두에 준하고, 綿布 1필은 正布 2필에 준하였다. 이렇게 보면 소금의 매매시세가 너무 헐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면포 1필은 소금 2석 6두에 준하게 하고 이것으로 일정한 법식을 삼게 하였다.0690)≪世宗實錄≫권 47, 세종 12년 2월 을해.

그러나 세종 28년(1446) 2월부터는 매달 초하루마다 市價의 예에 준하여 소금 한 말(斗)을 더하여 화매하기로 하였으니 전에는 소금 5두를 쌀 1두에 준하여 매매하게 하였는데 지금의 시가는 소금 2두가 쌀 1두에 상당하여 염가가 비싸기 때문에0691)≪世宗實錄≫권 111, 세종 28년 2월 병오. 의염가를 개정한 것이다. 그리고 집현전 직제학 李季甸의 상소에 “의염색 설치 이전에는 민간에서 쌀 1두로 소금 3·4두 혹은 5·6두까지 바꾸었는데 의염색 설치 이후에는 쌀 1두로 소금은 겨우 1·2두를 교환하게 되었다”0692)≪世宗實錄≫권 112, 세종 28년 5월 경오.고 한 것으로 보면 의염색이 설치된 후에 염가가 폭등하고 염귀현상까지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국초로부터 고려 후기의 전매제를 그대로 시행하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제염장을 새로 설치하고 소금을 굽게 해서 미곡 또는 포화와 교역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면서도 종래의 사제염과 사매매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판매와 유통분야에 상인들의 활동은 별다른 제약없이 활발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염업제도를 정비해가는 과정에서 소금의 유통과 판매권을 정부가 관장하려는 방향으로 전매제를 더욱 강화해 갔다. 이런 가운데 조선왕조는 다른 산업부문에서도 그러했듯이 판매 유통부문에 있어서 商人을「興利之人」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상업행위를 엄격하게 배제하고자 하였다.

세종 19년 5월 염법에 대한 논의에서 명나라 鹽制를 기준삼아 염법의 기본방침을 제시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貢鹽을 납부하고 남은 餘鹽을 처분하는 데 있어서는 정부가 鹽引을 발급하여 매도키로 하고, 引稅를 소금 1석에 동전 20文으로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명나라 염법의 食鹽折價制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나라 염법과의 차이는 벽지나 먼 지역에 대한 염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상인의 활동을 수용하고자 하는 원칙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염법에 있어서는 상인의 유통기능을 활용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했기 때문에 벽원지인 평안도·강계 등지에 대한 소금의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으며, 이것은 소금의 판매와 유통의 기능적 마비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0693)≪世宗實錄≫권 77, 세종 19년 5월 경인.
高承濟, 앞의 책, 134∼136쪽.
따라서 판매 유통분야에서의 상인의 활동 제약과 위축은 염업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전매제의 점진적인 확립으로 더욱 심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세종 27년(1445) 8월 義鹽法의 실시와 더불어 義鹽色의 설치 이후는 전국의 소금에 대한 통제와 전매제의 시행으로0694)≪世宗實錄≫권 109, 세종 27년 7월 경자 및 8월 정사·갑진·병인. 소금의 공급·판매·유통분야는 국가에서 완전히 독점하게 되었고, 따라서 상인의 활동은 더욱 침체되었다.

이와 같이 소금의 판매와 유통과정에서 상인의 활동은 특기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국가의 전매제운영에서 수요자를 위한 공급수단은 육운과 수운의 두 운수방법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이것은 소금의 유통을 어느정도로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는가를 좌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먼저 육운을 보면 제염지의 염장으로부터 내륙의 벽지나 오지같은 먼 지역의 염창 소재지까지 육로로 운송하는 일인데 소금을 굽는 염간이 염세의 운반까지를 담당하고 있어0695)李讚熙,<朝鮮前期 鹽干에 대한 硏究>(≪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太學社, 1984), 354∼355쪽. 그들의 과중한 부담과 전국적으로 우마차가 부족한 때문에 그리 순조롭지는 못하였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다량의 소금을 운반할 때에는 그 지역 연도의 주민들이 아무런 대가없이 강제로 동원되었던 것이다.

수운은 국초부터 실시한 조운제도로서 관청의 선박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官船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민간의 私船을 빌려쓰고 그 船價를 지불하였다.0696)≪太祖實錄≫권 15, 태조 7년 12월 신미.
≪世祖實錄≫권 27, 세조 8년 2월 을미.
대개 각 도에서 수운으로 운송하는 일은 사선을 많이 이용하는데, 배의 운임을 지불해도 이 일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배의 운임이 고기잡고 장사하는 이익만 같지 못하였고, 또한 소금을 수송하는 일은 미곡보다도 손실된 수량을 많이 물어 바치는 까닭에 운송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0697)≪世宗實錄≫권 111, 세종 28년 2월 신유.
朴容淑, 앞의 글, 367쪽.

이와 같이 전매제에서 소금의 공급유통은 상인의 활동이 배제된 채 관 주도로 이루어졌다. 육로를 통한 운반은 전국적으로 우마차의 부족과 염간의 과중한 鹽役부담으로 순조롭지 못하였으며, 수운은 관선이 부족한 상태에서 민간의 사선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사선소유자의 기피현상으로 수송은 원활치 못하였다. 그 결과 京鄕 각지의 소금 품귀현상마저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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