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5. 염업
  • 4) 소금의 생산과정

4) 소금의 생산과정

조선 전기의 제염방법이나 제염기술에 대하여는 당시의 실태를 기술한 문헌사료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그 사실을 밝히기가 어렵다. 예로부터 소금은「煎熬 제염방법」, 곧 海水의 수분을 火力으로 징발시킴으로써 소금을 결정시켜 채취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오제염법은 유치한 제염기술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노역과 시간, 그리고 연료를 필요로 하였다.0704)商工部 編,≪鹽白書≫(藝文社, 1964), 149∼150쪽.
한국산업은행조사부 編,≪韓國의 産業≫3(1960), 69∼75쪽.
專賣廳 編,≪韓國專賣史≫1(1980), 412∼413쪽.

그러나 이같은 원시적인 제염방법도 산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제염장의 설비가 개선되고 燔煮기술도 향상되어, 조선 전기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원시적인「海水直煮術」에서 점차적으로 탈피해가고 있었던 듯하다.

조선시대 전오 제염방법은 대개 두 형식으로 구별된다. 하나는 鹽田에 해수를 끌어들여 여기에서 鹹水를 채취한 다음, 이 함수를 鹽釜에 넣고 끓임으로써 채염하는「鹽田式製鹽法」이고, 다른 하나는 염전을 마련하지 않고, 鹽竈만을 축조하여 해수를 직접 염부에 넣고 전오하는「海水直煮法」이다. 이러한 제염방법은 각 연안의 토질·기후·潮汐의 고저 등에 의하여 염전·염정제염장·염조·염부의 구조라던가 제염기구 및 조업의 방법 등이 달라지게 된다.

염전식제염 방식의 염전에는 有堤鹽田과 無堤鹽田의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유제염전에서 채함작업과 전오작업의 과정을 살펴보면, 염전의 주위에 제방을 쌓아 해수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염전바닥을 평탄하게 하며 그 주변과 중앙의 몇 곳에 도랑을 만들어 해수의 유통을 편하게 한다. 염전바닥에는 모래나 흙을 깔고 여기에 해수를 흡수시켜 햇볕을 쬐어 마르게 한다. 그러면 수분은 증발되고 鹽分만 남아서 모래 또는 흙에 부착하게 되는데 이것을 긁어모아 鹽井으로 운반한다. 그런 다음에 해수를 넣어서 염분이 용해되면 농도 짙은 짠물을 채취하게 되는데, 이 유제염전은 거의 모두가 높은 潮水를 이용해서 해수를 자연스럽게 도입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염정은 대개 염전안의 도랑 옆에 두거나 또는 염전 주위에 배치하였다. 염정의 내부는 진흙으로 벽을 바르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위에 나뭇가지와 솔잎을 덮게 되는데 염전바닥보다는 2·3尺 정도 높게 설치한다. 그 형상은 원형이나 타원형의 것이 대부분이고 방형의 것도 약간은 있으며, 염전의 광협에 따라서 여기에 설치한 염정의 수효나 구조 등에 차이가 있다.

이렇게 하여 채취된 소금물은 鹽釜에 옮겨지고 염부에서 충분히 끓인 소금은 가마니 위에 얹어서 鹽汗을 빠지게 한다. 일단 염한이 다 빠지면 俵裝하는 자리로 옮겨져 그 곳에서 가마니나 섬에 담겨지고 마침내 반출하게 되는데 전라도 남부와 경상도 등 남해안의 염전 대부분이 유제염전에 속한다.

다음으로 무제염전에서 제염하는 작업과정을 보면 煎熬작업은 유제염전과 비슷하나 채함작업과정이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무제염전은 제방이 없으며 염전의 형상은 대개 圓錐臺나 또는 楕圓錐臺 모양이다. 주변으로부터 중앙을 향하여 점차 높아지면서 경사를 이루며, 중앙의 정상부를 평탄하게 하여 제염하는 장소로 삼는데 이 곳에 鹽井을 설치하였다. 그 주위의 경사면은 염전의 지반이 되는데, 이 지반은 모두 점질토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살토도 역시 점질토이다. 매월 한 차례의 大潮時에 자연스럽게 해수가 이 염전 상부까지 차 올라와 살토를 침윤하지만, 小潮時에는 해수가 염전까지 들어오지 않으므로 이 기간에 살토를 긁어 모았다가 펴놓는 일을 되풀이해서 건조시켜 염정에 운반하여 농후한 함수를 채취하고, 그 살토는 다음 大潮時 전에 다시 염전지반에 살포하여 다음 大潮時까지 한 차례의 작업을 끝마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무제염전에는 도랑이 없고 다만 염정 부근에 採鹹用 해수를 가두어 두는 웅덩이가 있을 뿐, 염전 경사의 완급이나 제염장의 구조 및 제염장에 부속된 염전의 면적, 염정수 등에 각각 차이가 있다.

이같은 무제염전식 제염법은 해조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의 평안·경기·충청도와 전라도 북부 지방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이 밖에도 해수간만의 차가 작은 강원도지방에서는 해면보다 높은 지면에 염전을 축조하는데, 점질토로써 지반 하층을 구축하고 그 위에 사질토를 상당한 두께로 펴서 지반을 만든다. 여기에다 도랑을 통하게 하고 다시 해변의 해수에 이르기까지 점질토로써 도랑을 만든 다음, 해수를 염정 등에 퍼올리는 데 사용하는 맛파로 해수를 퍼올려 염전의 도랑에 꽉 채운다. 그리고 염전지반과 그 위의 살사를 축이고 다시 건조시키는 작업을 되풀이해서 채함하게 되며, 염정은 염전도랑 옆에다 2·3척 높게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염전식 제염법에 비하여 원시적인 제염법이라고 할 수 있는 海水直煮法은 염전이나 다른 장치와 설비를 하지 않고 단지 제염장만이 있을 뿐이다. 제염장 안에는 염조를 축조하고, 해수를 떠다가 염부에 부어 다량의 연료와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전오제염하는데, 이는 고대의 원시적인 遺制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수직자법에 의한 제염방법은 함경도 북부지역의 경흥·종성·경성·명천·성진 등 군의 일부 지방에서 이용되었다. 이는 이들 지방이 교통이 불편하고 소금의 공급유통이 월활하지 못한 데다 부근 해안에 염전을 축조할 수 있는 적당한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데, 이 곳에서는 그들의 수요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제염방법을 사용하였던 것이다.0705)農商工部水産局 編,≪韓國水産誌≫1, (1908), 562∼574쪽.
高承濟, 앞의 책, 154∼167쪽.

세종 29년 9월 예조참의 李先齊가 “…가마솥으로 달이어서 하룻밤과 낮을 지내서 하얗게 나오는 것은 동해지역의 소금이고, 진흙으로 솥을 만들어 하루에 두 번이나 달이어 짜게 만든 것은 서·남지역의 소금인데, 서·남지역에서는 노역이 조금 헐하면서도 수익은 동해지역의 배나 된다”0706)≪世宗實錄≫권 117, 세종 29년 9월 임자.고 지적한 데서, 함경도·강원도 등 동해안지역에서는 鐵釜를 사용하여 직자법으로 제염을 하였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 27년 8월 집현전 직제학 李季甸의 상서에 “…동해는 바닷물을 끓이므로 갈아 엎어서 조수를 취하는 괴로움이 없지만…남해로부터 서해까지는 반드시 上弦·下弦의 조수가 물러갈 때를 기다려, 세 차례 소에 멍에를 메어 갈아서 조수를 취하니 그 괴로움이 밭 다루기보다 배나 됩니다”0707)위와 같음.라고 하여, 동해지역에서는 해수직자제염법이 시행되었고, 남해안과 서해안지역에서는 염전에서 채함하는 염전식 제염방법으로 소금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의 제염방법은「해수직자법」에서「무제염전식 제염법」으로, 무제염전식 제염법에서 진일보하여「유제염전식 제염법」으로 발전해 온 듯하다. 특히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지역적인 특수성 때문에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이 세 가지 제염방법이 다같이 활용되었던 것이다.

소금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바닷물을 煎熬 또는 燔煮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연료의 보급 조달이다. 이 연료는 제염작업이 시작되면서부터 완료될 때까지 계속하여 조달되어야 하였다. 세종 27년 8월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의 상서에 “소금의 생산지에는 땔나무가 심히 부족하여 鹽干들이 秋鹽을 구으려면 여름부터, 春鹽을 구으려면 겨울부터 선박으로 나무가 있는 여러 섬에 가서 구하는데 만일 풍랑이 순조롭지 못하면 한번 왕복하기에 한 달이 넘고, 풍도를 만나면 배가 뒤집혀 돌아오지 못하는 자가 많다”0708)위와 같음.고 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여러 섬을 왕복하면서 연료인 땔나무를 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종 9년 4월 강원도 감사의 계에 “…연해변의 禁松令이 엄중하기 때문에 먼 지방에서 나무를 해야하고 매년 세납하는 소금이 그 수량에 차지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0709)≪世宗實錄≫권36, 세종 9년 4월 임오.고 하여 국가의 엄격한 금송정책으로 제염연료인 땔나무 채취가 어렵고, 심지어는 소금 생산량의 감소현상까지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제염장에서의 연료문제는 국가적인 금송정책의 시행과 더불어 염업의 발전을 위축시키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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