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6. 수산업
  • 2) 어획물의 종류와 수산자원
  • (3) 명태·멸치 자원에 대한 의문

가. 명태

조선 후기에 함경도에서 많이 잡혔던 명태와 강원도에서 많이 잡혔던 멸치에 대하여서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명태의 경우≪世宗實錄地理志≫에는 明太라는 것이 보이지 않고 또 명태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魚名도 보이지 않는다. 명태는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하여 함경북도와 강원도에서 대량으로 어획되어 방방곡곡에서 소비된 다획성 대중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칭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世宗實錄≫에는 세종 19년(1437)에 議政府에 낸 戶曹의 보고 가운데 “漁水梁은 함길·강원의 大口魚·鰱魚·魴魚, 경상의 大口魚·靑魚, 전라의 石首魚·靑魚, 충청의 靑魚·雜魚, 경기의 雜魚·蘇魚, 황해의 雜魚, 평안의 石首魚·雜魚가 산출량이 제일 많은 것이다”0710)≪世宗實錄≫권 77, 세종 19년 5월 경인.라고 한 것이 있다. 이로써 당시에 대구·조기·청어 등이 많이 잡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명태가 많이 잡힌다고는 하지 않고 있다. 이들 지방에서는 대구·연어 및 방어가 많이 잡히는 것으로만 되어 있다. 漁水梁은 漁梁과 水梁을 말하는데 그러한 어구에 대구가 잡히고 있었다면 명태도 잡혔을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태가 잡히지 않았다면 당시에는 명태자원이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명태는 함경북도 羅津灣 大草島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그 뼈가 발견되고 있는 것0711)정백운·도유호,<라진 초도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1955년 1집), 50쪽.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함경도연해에서 잡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 때에 그것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명태를 대구와 동일시하여 대구와 명태가 잡히는 것을 대구가 잡힌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당시 어류 분류법이 아무리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구와 명태를 구별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新增東國輿地勝覽≫의 함경도 明川과 鏡城의 土産條에 돌연히 無泰魚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이 증보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531년이다. 이로부터 약 100년 전만 하더라도 보이지 않던 어명이 새로이 등장한 것이다. 이 無泰魚가 명태의 원명 또는 이명이냐 하는 것에 대하여서도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명태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그 이름이 왜 1531년의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명태자원이 그 무렵까지 없다가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명태를 그 무렵까지 잡지 않다가 비로소 잡았다는 것인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명태의 명칭이나 어획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그 중에서 다음에 드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北魚란 주로 경기도 이남 지방에서 明太魚의 凍乾제품을 가리키는 명칭인데, 전설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6백년 전 고려시대에 강원도에서 불려진 명칭으로서 북방의 바다에서 群來하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당시 이 물고기는 강원도 연해에서 많이 어획되었으나 이름 없는 물고기는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미신 때문에 世人이 먹지 않았고 그 어업도 성하지 않았으나, 그 후 함경북도에서 어획되어 明太라는 명칭이 명명된 후부터 보건식품으로서 전국적으로 널리 이용되게 되었던 것이다.(鄭文基,<朝鮮北魚明太>,≪朝鮮≫273, 朝鮮總督府, 1938, 47쪽).

이에 의하면 명태는 고려시대에도 잡히고 있었으나 이름이 없는 물고기는 먹어서는 안된다는 미신 때문에 잡지 않다가 明太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후부터는 많이 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또 다른 전승이 있다.

우리나라 元山島 所産인데 明川지방에서는 옛날에는 잡지 않았다. 명천사람 太가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北魚를 釣獲하였다. 크고 살찌고 맛이 좋았으므로 明太라고 명명하였다. 겨울에 잡으면 冬太이고 봄에 잡으면 春太이다. 그 알은 明卵이라 한다. 대개 魚族 중에서 많은 것에 속한다(趙在三,≪松南雜識≫3, 漁獵類 14, 魚鳥類 北魚明太).

이는 明川의 太가라는 성을 지닌 사람이 처음으로 명태를 조획하였으므로 지명 중의 明자와 성의 太자를 따서 明太라고 명명하였다는 것과 그 이전에는 명태를 잡지 않았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명태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하여서는 위에서 본 것과 비슷한 전설이 몇 가지 있다. 명태라고 명명된 시기는 조선 개국 이후 250년 경이라고 한 것도 있고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이라고 한 것도 있다. 대체로 인조대(1623∼1649)에 명태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 일설에는 태조 이성계의 재위시에 명천의 太某라는 어부가 延繩[주낙]으로 珍魚를 잡았으나 그 이름을 몰라 군수에게 물어 보았더니 군수가 즉각 지명과 어부의 성에서 각각 1자를 따서 명태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承政院日記≫효종 3년(1652)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명태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즉 司饔院 관원이 강원도의 進上을 언급하는 가운데 大口魚卵에 明太卵을 첨가하여 막중한 진상을 더럽혔다는 내용의 구절이 보인다.0712)≪承政院日記≫효종 3년 임진 10월 초 8일. 이 때는 이미 명태라는 명칭이 생겼고 명태알이 흔할 정도로 명태가 많이 잡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의 전설들 가운데 인조조 무렵에 명태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 것이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광해군 3년(1611)에 저술된≪惺所覆瓿藁≫의<屠門大嚼>에는 당시의 각종 중요 어류가 다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명태만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명태를 많이 잡기 시작한 시기도 명태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후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명태자원은 있었으나 이를 잡지 않았던 이유는 이름 없는 물고기를 먹으면 좋지 않다는 미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無泰魚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것이 명태라면 1531년 경에는 무태어라고 명명되어 있었던 셈이고, 그 때부터는 명태가 이름 없는 생선이 아니었던 셈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조선 초기에는 명태어업이 그다지 성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