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2. 중앙재정
  • 1) 세입·세출

1) 세입·세출

조선의 국가재정은 그 수입면에 있어서 전세의 수입을 비롯하여 혹은 중앙 각사나 지방 관아에 나누어 준 토지로서 각각 수입원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신분에 따라 역을 부담케 하여 노동력으로 충당하기도 하며, 혹은 공물·진상 수납에 의지하기도 하는 등 복잡한 양태를 보이고 있으며, 뒤에는 환곡이 재정의 일부로 편성되어 갔다. 그리고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의 구별이 확연치 않고, 세입·세출이 오늘날의 재정제도와 같이 수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입예산표인「貢案」은 고려시대 이래 제정된 제도로서, 조선 건국 초 태조 원년에 貢賦詳定都監에서 고려의 공안을 참작하여 공부 공안을 제정하였다. 공안은 국가의 세입표로서 전세를 비롯하여 각종 부역·공물·진상·어세·염세·선세·工匠稅·坐賈稅·公廊稅·行商路引稅·家基稅·神稅·奴婢身貢 등이 포함되어 있다.0745)貢案을 貢賦에 대한 장기 세입예산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貢案은 貢物과 進上의 貢賦가 주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 밖에 田稅條貢物, 경상도 동남부 각관의 倭料에 사용되는 田稅, 경기도의 生·穀草, 各司選上奴, 各司匠人, 掌樂院樂工, 其人貢, 巫覡稅가 부록되어 있으나, 田稅·徭役을 비롯한 많은 稅役이 貢案에 수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貢案은 기본적으로 貢賦에 대한 세입징세부라고 주장되고 있다(金玉根,≪朝鮮王朝財政史硏究≫, 一潮閣, 1984, 142쪽).

공안에는 각관공안·각도공안·각사공안, 그리고 호조공안 등이 있었다. 각관공안은 주·현 등 지방 각관이 중앙 각사나 지방의 감영, 병·수영 등에 상납하기 위하여 비치한 공안이며, 각도공안은 각 도의 감영에서 관할 각관 공안을 통합한 것을 보관한 것이다. 각사공안은 중앙 각사가 징수할 공부의 종류와 물품명·액수 및 상납지방각관 등을 수록한 공안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통합 수록한 공안이 호조에 보관되었다.0746)金玉根, 위의 책, 129∼134쪽.
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京, 東洋文庫, 1964), 275쪽.

공안은 함부로 개정할 수 없게 하여 고정시켰다. 그러나 공안 중에는 공물·진상·전세포화·잡세와 같이 한 번 정하여 貢額이 고정된 것도 있지만, 전세와 같이 年分法에 따라 수세액이 결정되는 것도 있으며, 巫覡稅·奴婢身貢과 같이 3년마다 改錄되는 것도 있었다. 공안작성의 중요한 기준은 전결과 호구이며, 양전은 20년마다, 호적은 3년마다 고쳐 파악하게 되어 있었으나 규정대로 잘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國用經費는 공안·공액의 범위 내에서만 지출해야 했다. 공안에 비하여 경상비가 부족한 경우에는 임시 조처로서 引納과 別貢의 加定 혹은 量減, 移定 등의 방법이 취해졌다. 인납은 각사의 경비가 부족할 때 내년도의 공납을 미리 상납시키는 것으로, 인납은 자칫하면 공물을 배로 징수하거나 공안 외의 橫斂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별공은 공안·공액 이외에 증액하여 징수하는 것으로 공안에 정한 것을 常貢이라 한 데 대하여 이 加定貢物을 별공이라 했다. 별공은 단지 원정공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세에도 加定되어 징수되었다. 양감은 흉년이나 전란 등으로 민호의 부담능력이 소모되었을 때 왕의 특혜조처로서 취해졌다. 양감은 대개 일시적인 조처가 되었으며, 공물을 양감하는 경우에는 양감된 공물을 다른 지방에 移定하여 공안·공액을 유지하는 것이 상례였다.

태조 원년에 공안이 제정된 이래 태종 말·세종 초에 공안이 사정되었다. 그리고 세종 8년에 각사 경비는 式例를 정하도록 하였다. 이 식례는 供用造作式例인데 모든 각사에 행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供用하는 물품에 모두 적용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태조 이래 세조 때까지의 공안과 국용경비를 대비해 보면 공안이 적어도 국용경비의 3배 이상으로 제정되어 있었다. 당시 각사에 수납된 물품 중 남아돌아 부패하기 쉽고 오래 저장할 수 없는 많은 물자들이 민간에게 방매되었다. 각사 중에는 원래 그 소관물자를 판매하는 직능까지 합하여 설립된 관서도 있었는데 전의감·혜민서의 약재, 와서의 기와, 귀후서의 관곽, 교서관의 서적, 사온서의 술 같은 것이 그것이다.

태조 이래 방대한 공안에 의해 국가재정이 수납되었으나 경비 지출의 기준은 제정되어 있지 않았다. 세조 10년에 공안에 대한 개정을 단행하여 크게 삭감되었다. 그리고 세조 10년에 세출예산표라 할「橫看」을 제정한 것은 조선시대 재정제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제도 개혁이었다. 세조 10년에 經費式例가 제정되어 각 도 감영에서도 그 식례에 따라 행하게 되었다.

각사의 용도경비는 稅貢의 현물로 수납되어, 각사의 경비 중 현물로 직접 지출되는 것과 그것을 자재로 하여 소속 장인 등이 가공해서 供用하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므로 그 식례도 두 가지가 있어, 일반의 經費式例와 供用造作式例가 그것이다. 세종 때 114관서 중 43관서에 供用造作式이 査定된 바 있었으며 공용조작식례는 성종 4년에 이르러 완성되고, 그 횡간이 작성되어 국가경비 전반에 적용하게 되었다.0747)田川孝三, 위의 책, 317쪽.

고려 이래 조선 초에는 공안을 제정하여 그 세입을 거두어 들이는 데 여러 규정이 있었으나 세출에는 일정한 방침이 없었다. 세조 때에 이르러서야 경비식례를 제정하여 경상비를 사정하고, 이것을 토대로 공안을 제정하였다. 세조 때 횡간의 제정으로 종전에 세입을 보아 세출을 정해왔던 것을 지양하여, 이제 세출을 계산하여 세입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경국대전≫호전에 “모든 경비는 횡간 및 공안에 따라 支用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세조 10년에 공안을 개정하여 공안이 삭감되었는데 성종 때에 이르러 공안이 다시 개정되어 또 삭감되었다. 세종 때의 공안을 1로 한다면, 세조 때의 공안은 2/3, 성종 때의 공안은 1/3로 줄어든 개혁이었다.0748)≪燕山君日記≫권 28, 연산군 3년 10월 무자. 이에 따라 새로 상정된 횡간과 공안은 모두 절약된 예산이어서 그대로 준수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공안에 규정된 세입 이외에 引納, 別貢 등으로 징수되고 횡간에 규정된 이외 別例用으로 지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재정제도에 있어서 세조 때 횡간에 의한 예산제도가 제정된 것은 획기적 제도 개혁이었으며, 횡간·공안의 제도는 구속력이 있는 기준으로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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