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6. 진상
  • 2) 진상과 민호의 부담

2) 진상과 민호의 부담

진상은 그 바치는 물목을 보면 공물과 별 차이가 없었다. 공물은 군현 단위로 나누어 배정되었으나 진상은 감영, 병영·수영에서 왕에게 예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호의 부담이 되는 점에서는 공물과 차이가 없었다.

진상 중에 종묘에서 지내는 薦新은 예조 소관으로 典祀寺에 바쳤으나, 그 밖에 物膳을 비롯하여 모든 진상물은 궐내 기관에 직접 수납되었다. 물선이 궐내에 바쳐지는 절차는, 膳狀이 승정원을 거쳐 사옹원에 접수되고 물선은 사옹원에 직접 수납되었다. 다만 名日方物은 예조에서 물건을 점검해 수납하여 궐내 기관에 납입하였다.

전세에는 풍·흉에 따라 감면의 규정이 있고, 또한 공물에도 국왕의 특혜에 의하여 감면이 있었으나 진상에는 그러한 감면의 규정이나 관례가 없었다. 진상은 다른 貢賦와 같이 貢案에 수록되고 세조 이후에는 經費式橫看에 기재되었다. 진상은 전세·공물과는 달리 왕에 대한 예물로 제정된 것이어서 정부로서도 이에 관여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물선진상이나 別膳같은 것은 일부지역에 제한되기는 하였지만 일시적으로 중단되거나 감면되었는데, 그것은 국왕의 특별한 은총으로 행하여졌다. 그리고 감면된 공물은 다른 군현에 移定되었지만 진상에서는 그러한 예가 거의 없었다.

진상 중에 物膳·方物·薦新 등은 그 중요성에 따라 등급이 있었다. 천신이 제1등급이고, 방물 그리고 물선의 순서였다. 천신은 제사지내는 것이므로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흉년에 물선을 감면해 주는 일이 있어도 천신만은 예외로 하였다. 그리고 진상은 세공과는 달리 그 물자도 품질을 정선하고 제작품도 왕에게 바치는 예물로서 특별히 정성을 다하였다.

공물의 분정은 중앙정부에서 행하였으나 진상 물자의 분정은 관찰사, 병사·수사 등의 권한에 속하였다. 공물은 호구와 전결의 다소를 참작하여 각 군현을 대상으로 물목과 수량을 정하였다. 진상은 특별히 분정의 규정이 정해 있지 않았는데 공물의 분정에 준하였기 때문이었다. 진상은 지방관의 예물로서 제정된 것으로 관할 각 군현에 분정되면 군현에서 조정해야만 했다. 각 군현에 분정된 진상은 공물의 경우와 같이 그 일부는 官備진상으로 관부에서 직접 조달하고, 나머지 일부는 民備진상으로서 민호에 부과되었다.

관비진상에는 관비공물과 같이 관부에서 직접 조달하는 것도 있고, 혹은 사역에 의한 것도 있으며, 혹은 定役戶에 부과된 것도 있었다. 관부에서 직접 조달하는 것으로는 관에서 운영하는 菜田이나 藥圃에서의 소산으로 바치는 것 등이 있었다. 사역에 의한 것으로는 새·짐승·어류 등을 당번군사를 사역시켜 잡아 상납하거나, 무기 기타 기구를 도내 각 군현 소속의 공장에 의하여 제작·상납하는 것 등이다. 정역호는 정부기관에 세습적으로 소속되어 소정의 직무나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민호인데, 꿩 등을 상납하는 鷹人, 짐승 수렵에 종사하는 阿波赤, 漁戶인 海作軍 등이 있었다.

진상은 관에서 조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는 일반 민호에 부담시키는 것이 많았다. 진상 물자의 분정은 호구와 전결의 다소를 참작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방관의 임의에 맡겨져 생산되지 않는 물자나 갖추어 납부하기 어려운 품목도 분정된 것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정해진 진상 품목은 감면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생산되지 않은 물자나 비납키 어려운 품목도 상납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민간에서 거두거나 혹은 價布·미곡을 징수하여 사서 납부하였다.

당시의 관찰사·병사·수사는 진상을 칭탁하여 사사로이 착복하였다. 관에서 만든 덧(檻穽)에서 잡은 범·사슴 가죽은 화살 자국도 없는 상품인데, 주로 사사로이 소비되고 진상품은 민호에 부과되었다. 또 관청에서 직접 경영하는 楮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산은 관부나 수령의 소비에 충당하고 진상하는 것은 따로 민호에 부과하였다. 관비물자를 민호에 전가하는 것은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나 성종 말, 연산군 초에 이르러서는 어떤 품목을 불문하고 거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갔다. 더욱이 관찰사 이하 수령이 관비의 물품을 사사로이 쓸 뿐 아니라 민간에서 책납하는 경우 거의 정액의 수배를 거두었다. 진상을 위한 민호의 부담은 요역으로써 사역하거나 혹은 價布로써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연산군 이후 진상은 공물 물자의 생산, 조달을 위한 사역과 같이 오로지 가포로써 바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한편 진상에 있어서 공물과 함께 민호에게 미·포를 바치게 하거나 요역으로써 사역하게 한 것은, 교환경제를 촉진케 하고 물자를 상품화하였으며 향리를 비롯하여 이서·노복을 상인화하였다. 진상 물자는 다만 감영이나 병영·수영에서만 수집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都會所를 설치하여 부근의 군현으로 하여금 분납케 하였다. 도회소는 대체로 界首官에 설치되었으나 반드시 계수관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따라서 감영, 병영·수영, 도회소에서 經歷·都事·判官·鎭撫·都會所 수령이 진상 물자를 관장하게 되어 있으나, 그 실무자는 중앙 각사의 이서·노복이 담당하여 점차 실권을 그들이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서·노복의 농락으로 많은 뇌물이 강요되거나 고가의 대가가 요구되기도 하였다.

진상은 공납과 함께 교환경제를 촉진하여 상업발달의 길을 열어주었다. 다만 생산되지 않는 물자나 비납하기 어려운 물자를 바꾸어 사서 조달했을 뿐 아니라 防納이라는 청부상납이 상행위로 성행되어 갔다. 진상은 사옹원·내의원을 위주로 하여 궐내에 납입되었으므로 대납이 감영, 병영·수영, 도회관에서 납입될 때 성행되었다.

연산군·중종 때부터 공물은 거의 중앙 각사의 이서·노복이 대납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진상 물자에도 손을 뻗쳐 대납하고 고가로 독징하였다. 그리하여 진상은 공물과 함께 상품화되어 이서·노복의 영리수단에 이용되었다.

<李載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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