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7. 환곡
  • 2) 모곡의 징수

2) 모곡의 징수

환곡 원곡의 저축을 위하여 사창과 군자곡에 이식이 부과 징수되었으며 환곡에서도 이식이 부과되었다. 환곡에서의 이식은 사창과 군자곡과는 다른 사정에서 부과 징수되었으므로, 그 명칭도 耗穀이라 하여 이식과는 구별하는 것이었다.

모곡은 耗米, 雀鼠耗 등으로도 일컫고 이식의 의미가 없으며, 그것은 원곡의 모손 즉 자연적 감소를 보충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그러나 명칭이야 어떻든, 그것은 이식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 건국 초에는 환곡에 이식이 없이 대출되었다. 환곡에서 처음으로 모곡이 부과 징수된 것은 세종 5년부터이며, 1석에 3승의 모미를 부과하는 3升耗法이었다.0816)≪世祖實錄≫권 31, 세조 5년 9월 갑오.
宋贊植,<李朝時代 還上取耗補用考>(≪歷史學報≫27, 1965), 34쪽.
이 모곡은 환곡을 징수하여 분급할 때까지 수령이 보관하는 기간에 생기는 耗損을 보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3승모법은 제정된 지 2년만인 세종 7년에 환곡의 모미 수납이 백성에게 폐단이 있다 하여 폐기되고 말았다.

3승모법이 폐기된 이후 어떠한 耗法이 제정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增補文獻備考≫를 비롯하여≪度支志≫·≪大丘邑誌≫·≪嶺南人物考≫등을 통하여 세종·세조 때에 이미 1할모법 즉 매 1석에 모곡 1두 5승을 부과하는 법에 따라 징수한 것으로 보인다.≪대구읍지≫에서는 세종 때 대구·달성지방에서 매 1석에 모곡 5승을 감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고,≪영남인물고≫에서는 조선 후기에 매 1석 모곡이 1두 5승인데 달성지방만은 5승을 감하여 1두만 징수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종·세조 때에 이미 1할모법 즉 매 1석에 모곡 1두 5승이 부가되었다고 할 것이다.0817)宋贊植, 위의 글, 36∼37쪽. 그러나 이 사료는 당시의 직접 사료가 아니고≪경국대전≫에도 耗法의 규정은 없다.

3승모법이 폐기된 이래 새로운 모곡이 부과 징수된 사실은 명종 9년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0818)≪明宗實錄≫권 16, 명종 9년 5월 무오. 우의정 尹漑는 중에 “무릇 費耗率은 1두에 1승을 납부하므로 10석의 비모는 1석이 된다”고 하였고, 같은 자리에서 特進官 成世章도 “1만석의 費耗는 1천 석뿐이니 어찌 10만 석을 歛散하는 邑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원곡의 1/10을 모곡으로 부과 징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석 즉 15두에 1두 5승을 모국으로 징수하는 1할모법은 그 제정된 시기가 확실하지 못하다. 그러나 1할모법이 제정된 시기는 세조 7년 3승모법이 폐기된 이후부터 명종 9년 이전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1할모법은≪속대전≫의 호전 창고조에 ‘取耗什一’로 규정되어 조문화되었던 것이다.

모곡의 부가징수는 정부에서 묵인 내지 공인하는 형식으로 법제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성종 5년에 申叔舟는 세금을 거둘 때 세리들의 濫徵을 어느 정도 인정하여「耗米」라는 명칭으로 법제화할 것을 주장하였고, 예종 1년에 梁誠之는 수령들의 부족한 용도에 충당하기 위해 군자곡 1석에 2두의「鼠耗」를 부가 징수하자고 주장하였다.0819)≪成宗實錄≫권 49, 성종 5년 11월 기사.
≪睿宗實錄≫권 6, 예종 1년 6월 신축.
그리하여 수령들의 남징이 묵인되나, 무제한으로 허용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어느 한도 내에서 법제화한 조처로 보인다. 1할耗法의 제정 시기가 분명치 않은 것도 이러한 남징이 오랫동안 묵인되어 오다가 어느 시기에 공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징수된 모곡은 실제 국가재정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지방관리들이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방임되어 왔으므로 모곡은 수령의 중요한 수입이었다. 선조 8년에 李珥가 수령으로 부임하는 趙汝式에게 충고하기를 “모곡에 대하여는, 1년 모곡의 1/3은 관아의 支供으로 하고, 1/3은 사객 및 친구의 접대비용으로, 1/3은 창고에 두어 여분으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0820)≪栗谷全書≫권 14, 送趙汝式說. 모곡은 회계에 들어있는 국가재정의 일부가 아니었으므로 그 사용방법도 수령의 재량에 따라서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모곡은 국가재정의 일부는 아니었지만 이미 수령들의 부족한 용도에 보태어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실제 국가재정에서 지출되어야 할 부분을 대신 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李載龒>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