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8. 역
  • 3) 호수와 봉족

3) 호수와 봉족

일반 군정의 경제적 처지가 빈약한데도 군정은 특별한 자를 제외하고는 녹봉이 지급되지 않아, 그 立役 기간 중의 비용은 스스로 부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正丁이 입역하도록, 정정에게 余丁을 주어 奉足으로 삼아 정정의 입역비용을 봉족으로 하여금 조달케 하였다. 이와 같이 입역하는 정정은 반드시 봉족의 도움을 얻어 부과된 역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 입역하는 정정을 戶首 또는 甲首라고 부르며, 호수를 돕는 인정을 봉족이나 혹은 助丁 또는 率丁이라 하며, 봉족은 지방에 따라 함경도에서는 管下, 제주도에서는 人祿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봉족인의 戶를 奉足戶, 혹은 助戶라고 하였다.0829)李載龒,<朝鮮初期의 奉足制>(≪朝鮮初期社會構造硏究≫, 一潮閣, 1984), 92쪽.

태조 6년에 군역 편성의 기저로써 처음으로 봉족이 定給되었는데, 군호단위로서 品官馬兵에게는 봉족 4명, 無職馬兵에게는 봉족 3명, 그리고 무직보병에게는 봉족 2명을 정급해 주었다.0830)≪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2월 갑오. 그후 태종 2년에는 군정의 소경전 다소를 참작하여 군적을 만들게 하였고, 태종 4년에는 군역을 비롯하여 各司吏典·향리·역리·皂隷·公衙丘從·院主·津尺 등 거의 국역 전반에 이르기까지 소경전의 다소를 참작하여 봉족이 定給되기에 이르렀다.0831)≪太宗實錄≫권 4, 태종 2년 8월 임자 및 권 7, 태종 4년 6월 계해.

조선 건국 초 이래의 戶는 2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호구의 다과와는 관계 없이 자연히 형성된 한「살림」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役이나 공물을 부담케 하기 위해「법제적」인 호라는 개념이다. 법제적 호는 대개 3丁을 1호로 삼는 것이 통례로서, 3개의 자연호가 1개의 법제적인 호가 되어 호수와 봉족이 각각 다른 살림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 대체로 3정으로서 1호로 삼는 것은 單寒한 호의 경우 1호에 정이 둘이나 셋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殘殘戶와 같은 단한한 호가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3家로서 1戶로 삼는 것”과 “3丁으로서 1戶로 삼는 것”이 본질적으로 아무 차등이 없었다. 富戶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단독으로 한 단위가 되는 것이지만, 절대 다수인 貧戶의 경우에는 3호가 아울러 한 법제적인 호로 되는 것이 통례이었다.

立役은 3정 1호의 원칙에 의하였는데 3정보다 많은 인정을 가진 부호에게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부담이 지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하나의 자연호 중에 10여 명의 인정이 있는 호에 3정 1호의 원칙에 의하여 여러 개의 법제적인 호를 만들어 입역단위를 여러 개로 만드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대호의 부력과 권세도 문제이지만 자연호 자체가 혈연 중심의 체제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조 때에 진관체제가 이루어져 모든 군사는 거주지 단위로 파악됨으로써 군역이 일원적으로 파악되고, 군역 부과를 확대시키면서 호 단위 파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保法은 종래 자연호를 중심으로 한 3정 1호 내지 3가 1호의 원칙에서 2丁 1保로 개편된 것이다. 保에는 두가지 뜻이 있어, 그 하나는 종래 역 부담의 단위로서의「호」에 대신하는「보」라는 개념으로, 보의 신설은 종래의 호 단위에서 인정 단위로 개혁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戶首에 급여하는 봉족과 같은 뜻의 개념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0832)李載龒, 앞의 책, 107쪽. 세조 10년의 군병에 대한 作保로 군액 확장에 획기적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어 세조 12년에 이르러서는 보법이 군역 이외에 여러 직역에까지 적용되었다.

세조 때 호단위에서 人丁단위로 개편한 역이 기본구조인 보법은≪경국대전≫병전 給保조에 그 기준이 실려있거니와 그 중요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2丁 1保의 원칙에 변함이 없지만 자연호와의 연관을 어느 정도 고려하여 戶首로 나가는 호내에 지정된 보수를 넘는 인정이 있더라도 2정까지는 인정하며, 수군의 경우에 3丁戶는 1정을 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② 세조 10년에 田 5결을 1정에 준하게 한다는 土地准丁의 규정을 폐지하고, 奴子의 경우에는 准丁한 수의 반만을 保로 따지도록 한다.

③ 保人으로부터의 재정적 보조는 매월당 綿布 1필 이상 거두지 못하도록 한다.

④ 각 병종별 급보수는 다음과 같다.

 ◦ 甲士:2保

 ◦ 騎正兵·吹螺赤·大平簫·水軍:2保

 ◦ 步正兵·壯勇衛·隊卒·彭排·漕卒·烽燧軍·差備軍:1保

보법은 호단위에서 인정단위로의 개혁으로, 호와 유리된 보의 구조 자체가 군역제도를 문란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봉족 즉 보인의 재정적 보조는 매월 면포 1필로 규정되고 있는 바, 실제로 戶首와 보인과의 관계는 수탈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군사 중에 유력한 군사일수록 많은 보인, 他戶의 보인이 定給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收布의 濫徵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保布는 원래 軍布와는 다른 것이니, 군포는 번상의 대가로 수포하는 것이며 보포는 호수가 보인으로부터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예종 때에 호수의 보인으로부터의 수탈이 면포 8·9필에 이르는 형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호수가 보인으로부터 함부로 면포를 징수하면 보인으로 하여금 관에 고발케 하였으나 보인은 호수에 비하여 약자였으므로 실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군역 부담자를 확보하는 것은 군적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군적은 호적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원래 호적의 작성은 신고에 의하여 여러 사항이 기재되고, 이것이 합쳐져 戶口案이 되어 호조·본도·본읍에 비치되며, 각 호에서도 한 부씩을 갖도록 하였다. 호적은 3년마다 한 번씩 만들도록 규정되었고, 군적은 6년마다 호적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군적은 한성의 5부와 외방 각도의 절도사가 대장을 만들어 병조에 보내고, 監營, 主鎭·巨鎭·諸鎭 등에 각각 한 벌씩 비치하였다.

호적이 3년마다 작성된 데 비하여 군적은 6년마다 작성토록 규정되어 있었으나, 호적 자체가 3년마다 새로 작성되지 못하였으므로 군적의 경우에도 6년마다 작성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전번의 군적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혹은 형식적으로 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태조 2년에 군적이 처음 작성되었는데, 8도의 마·보병 및 기선군의 총수는 20만 8백여 명이며, 자제와 鄕·驛吏 등 유역자는 10만 5백여 명이었다.0833)≪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5월 경오. 그 후 태종 3년에 병조에서 보고한 전국의 군정수는 모두 296,310명이었고,0834)≪太宗實錄≫권 5, 태종 9년 5월 병오. 태종 6년의 전국 戶丁의 수와0835)≪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병진.≪세종실록지리지≫의 전국 호구의 수는<표 2>·<표 3>과 같다.

도 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길도 합계
20,729 19,560 48,993 15,714 14,170 15,879 33,890 11,311 180,246
38,138 44,476 98,915 39,167 29,441 29,224 62,331 28,683 370,365

<표 2>태종 6년 각도별 호구 통계

도 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길도 합계
20,882 24,170 42,227 24,073 23,511 11,084 42,167 14,739 201,853
50,352 100,790 173,897 94,248 71,897 29,009 105,444 66,976 692,477

<표 3>≪세종실록지리지≫각도별 호구 통계

≪세종실록지리지≫호구 통계의 구는 丁인데, 그 수가 태종 6년의 호구 통계의 정에 비하여 배로 급증되고 있다. 그것은 인구의 자연적 증가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태종 때 이래 세종 초기까지 호적법이 정비되고 철저하게 인구를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세종실록지리지≫에서 각 도 軍丁 통계를 집계할 수 있고,≪慶尙道地理志≫(1425년 편찬)에는 각 병종별 戶首와 奉足의 통계가 나타나 있으니<표 4>·<표 5>와 같다.

도 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길도 합계
軍丁數 5,605 11,846 22,441 15,384 9,027 3,696 21,210 5,957 95,166

<표 4>≪세종실록지리지≫각도별 軍丁 통계

병 종 호 수 봉 족 합 계
別 牌
侍 衛 軍
營 鎭 屬
守 城 軍
騎 舶 軍
합 계
816
2,120
2,261
1,223
15,941
22,361
3,947
7,895
6,107
2,362
36,071
56,382
4,763
10,015
8,368
3,585
52,012
78,743

<표 5>≪경상도지리지≫병종별 戶首·奉足 통계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전국의 정규병력이 95,166명인데, 여기에는 甲士·別侍衛 등 중앙군의 병력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편≪경상도지리지≫에서 경상도 戶首수에 대한 봉족수의 대비가 약 1대 3.5이므로 이 대비율을≪세종실록지리지≫에 적용하면,≪세종실록지리지≫의 군정수는 95,166명이므로 당시 호수와 봉족을 합한 총수는 약 33만여 명이 될 것이다.

도 별 正 軍 奉 足
京 中
개 성
경 기 도
충 청 도
경 상 도
전 라 도
황 해 도
강 원 도
평 안 도
함 길 도
합 계
2,824
696
8,596
23,780
35,517
34,044
9,817
*(2,338)
19,336
*(9,091)
146,399
2,920
1,521
21,180
51,664
94,810
80,949
27,471
(5,845)
52,231
(22,727)
361,308
5,744
2,217
30,136
75,444
130,327
114,993
37,288
(8,183)
71,567
(31,818)
507,707

<표 6>성종 8년 각도별 정군·봉족 통계

≪成宗實錄≫권 81, 성종 8년 6월 을묘조 통계인데, 이 통계에는 강원도와 함길도의 군액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누락된 두 도에 성종 원년 2월의 통계로서 대입시키고, 두 도의 봉족수는 타도의 정군·봉족의 비율 2.5배를 대입시켜 총군액을 산출하였다.

세조 때 保法을 실시하여 군정의 수가 많이 증가되었는데, 무리한 군액증가는 다시 조정되었다. 이러한 조정이 이루어진 직후인 성종 8년의 각도별 정군·봉족의 통계는 앞의<표 6>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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